더 레이븐, 사랑과 우정과 범인과 사건의 종합선물세트

2012/07/18 11:41 by 무한™  

더 레이븐 - 사랑과 우정과 범인과 사건의 종합선물세트
어린 시절, 부모님 친구 분들이나 친척 어른들은 우리 집에 오실 때면, 종종 '종합선물세트'를 선물로 받곤 했다. 하지만 종합선물세트의 화려한 포장과 큰 크기에 마음이 들떴던 것과 달리, 포장을 벗기면 허술해 보이는 박스가 나타나고, 그 박스를 열면 더욱 허술해 보이는 과자들이 나타나 실망을 했었다. 내가 좋아하는 과자가 3할이면, 나머지 7할은 슈퍼에 가서 절대 구입하지 않을만한 과자가 들어 있었다.

<더 레이븐>을 보고 난 후의 느낌이 딱 그랬다. 구색은 갖춰져 있고, 이것저것 많이 들어간 것도 같은데, 그냥 그게 전부다.


1. 브루스 윌리스의 <13일의 금요일>


내가 생각하는 포우의 장점은, 전후사정이 궁금해지는 기괴함에 대해 잘 다룬다는 것이다. 장면이 확확 바뀌는 스릴러 영화로는 포우의 분위기를 살리기 어렵다. 느린 호흡으로 슬금슬금 분위기를 조성한 후 관객이 '대체 이 불편한 분위기는 뭐야? 원인은 뭐고,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라며 몰입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더 레이븐>은 포우의 작품을 다룬 것이 아니라, 그에게 벌어졌을 법한 이야기를 다뤘기에, 포우 특유의 장점을 모두 놓쳐 버렸다.

이런 전개라면, 굳이 포우일 필요는 없었다는 거. 심각한 문제다. <브루스 윌리스가 제이슨 역을 맡아 열연한 13일의 금요일>따위의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제이슨은 가면 쓰고 나와서 캠핑 온 젊은이들을 하나씩 해치울 텐데, 그 가면 뒤에 부르스 윌리스가 있든 톰 행크스가 있든 뭐가 중요하겠는가.

브루스 윌리스를 '13일의 금요일'에 활용하려면, 제이슨이 해치우려는 집단에 브루스 윌리스의 딸이 속해 있다든지, 아니면 제이슨을 따라한 모방범죄가 많이 일어나 퇴역한 경찰인 브루스 윌리스가 그 사건을 해결하러 나서든지 해야 한다. '지금 가면 쓰고 나오는 사람이 브루스 윌리스'라는 걸 강조하려, 영화에 필요 이상으로 제이슨을 노출시키는 것 대신에 말이다.

포우를 내세워 홍보하는 영화에서, 정작 포우의 분위기는 느낄 수 없다는 게 안타깝다. 차라리 포우가 죽기 전 24시간 정도, 또는 12시간 정도를 다뤄 그 심도 깊은 분위기를 끌어냈으면 어땠을까 싶다. 아니면 포우와 엮는 걸 과감히 포기하고, 포우 소설의 모방범죄만을 현대로 가져와, 보다 빠른 진행과 치밀한 범죄로 관객들이 함께 주인공을 걱정하며 범인을 잡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들든지 말이다. 1800년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수사, 추리물은, 미드 <CSI>도 지겨워 하게 된 현대의 관객들을 따분하게 만들기 쉽다.


2. 저 장면, 어디서 봤더라?


콜라와 사이다, 주스와 와인이 맛있다고 해서 몽땅 섞으면 맛이 산으로 간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너무 밋밋한 사랑얘기 같다고 추격신을 집어넣으면 이야기가 이상해질 것이고, <세븐>이 너무 딱딱하고 잔인한 수사물 같다고 러브신을 집어넣으면 쓸 데 없이 얘기만 길어질 것이며, <쏘우>에 감동적인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고 희생자들의 우정을 엿 볼 수 있는 장면을 집어넣으면 난장판이 될 것이다.

그런데 <더 레이븐>의 제임스 맥티그 감독은 그 일을 실제로 저지르고 말았다. 이전 영화들에서 인상 깊게 본 장면들이 <더 레이븐>에서 비슷하게 재연된다. 그것도 뭔가 2%씩 부족한 상태로.

<더 레이븐>에서 다루는 범죄는 <세븐>과 닮아 있고, 주인공의 로맨스는 <로미오와 줄리엣>과 닮아 있으며, 잔인함은 <쏘우>와 닮아 있다. 두 남자 주인공의 모티브는 <셜록홈즈>에서 따온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홈즈는 없고 왓슨만 둘인 느낌이다. 둘은 사건을 해결하긴커녕, 범죄자가 남긴 단서를 모으기 바쁘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장면들 속에서, 주인공은 뒷북만 치고 다닌다.

어차피 실화에다가 '있을 법한 이야기'를 섞는 거라면, 아예 좀 더 심하게 뻥을 쳤으면 어땠을까 싶다. 포우가 글을 써서 발표할 때마다 그 이야기 속의 범죄가 실제로 일어나고, 사람들은 포우의 글에 관심이 없는 까닭에 그걸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거다. 포우와 범죄자는 서로를 인식하게 된다. 둘 만 아는 그 이야기를 어느 날 형사도 알게 되고, 영화에선 범죄자가 벌이는 '마지막 사건'에 세 사람이 끼어들어 벌이는 이야기만을 다루는 것이다. 관 속에 갇혀서 관객들로 하여금 '근데 저 여잔 밥을 어떻게 먹지? 저렇게 갇혀서 볼일이 급해지면 어쩌지?'라는 생각만 들게 만드는 여자 주인공 얘기는 아예 빼 버리고 말이다.


3. 같이 좀 즐기고 싶어요.
 

수사물, 혹은 추리물이라면 관객에게 함께 즐길 수 있는 떡밥을 꾸준히 나눠줘야 하는 법이다. 그래야 관객이 그게 쉰 떡밥인 줄 모르고 덥석 물었다가 '아, 이게 아니었군.'하는 후회를 하거나, 여러 심증들을 종합해 가며 범인을 지목하려 영화에 빠질 테니 말이다. 그런데 <더 레이븐>은 떡밥을 나눠주지 않는 까닭에, 범인이 드러난 뒤에도 쉽게 납득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런데 범인은 왜 저런 짓을 한 거지?'
'그냥 '모방범죄를 하고 싶어서'라는 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나?'
'처음엔 분명 범인 몸집이 크다는 떡밥을 던졌었는데... 이게 뭐지?'



"자, 이 사람이 범인입니다. 이제 다들 아셨죠? 그럼 다들 집에 조심히 돌아가세요."라는 이야기에 등 떠밀려 극장에서 나온 느낌이랄까.

"근데, 범인이 왜 그런 짓을 한 건가요?"

라고 물으면, 감독은

"열등감 때문이겠죠. 그래서 포우의 소설에 나온 범죄를 따라한 거고…
뭐… 사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포우의 마지막 5일을 영화에 담았다는 데 의의가 있는 거고,
그냥 포우의 마지막은 이랬을 것이다, 라고 상상하며 만들었다는 것에 주목해 주세요."



라고 답할 것 같다. <아마데우스>에서의(살리에르의) 열등감이나 <미져리>에서의(애니의) 집착이라면 충분히 수긍하고도 남을 텐데, <더 레이븐>에서 범인이 범죄를 저지른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납득하기가 어렵다. 물론,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관객이 납득할 수 있으려면 범인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에 대한 배경을 좀 깔아 주거나, 영화 속에서 아주 잠깐이라도 그 모습이 드러났어야 한다. 벽에 걸린 총에 대한 배경 설명이 한 줄이라도 있어야, 나중에 그 총을 주인공이 써도 독자들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는 법칙처럼 말이다. 그런 설명 없이 훗날 필요에 의해 사건이 뚜렷한 개연성 없이 일어나는 건, 반칙이다.


'에드가 앨런 포우'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라, 너무 큰 기대를 하고 봤기에 더욱 아쉬움이 많이 남는 것 같다. 그래도 영화 전체를 한 줄로 요약한 듯한 명대사 하나는 건졌다.

"신은 그에게 천재적인 재능을 주셨어요. 대신 불행한 운명도 함께 주셨죠."


전에 읽었던 헤밍웨이의 책에도 비슷한 말이 있었다.

Q. 작가가 되기 위해 어려서부터 해야 하는 일은 뭐죠?
A. 그건,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는 것이지.



영화를 보고 나서 침착한 심연의 관찰자, 포우의 책을 다시 한 번 들춰보게 된 것으로 만족한다.




▲ <1408>의 존 쿠삭을, 불타는 집 앞에 그냥 세워만 두다니! 이건 명백한 배우 낭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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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오

    우와 선입니다~!!^^

  2. oh~

    와-;;글잘보구가요:)

  3. 봄 꽃

    와!!!!


    ---------------------------

    완전 흥분해서 먼저 달았습니다.
    순위권에 든건 처음이에요!!
    오늘도 멋진 하루 되시어요~~

  4. 새로운 카테고리가 생겼네요 영화이야기 같이할 수 있어서 완전 조아요 ㅋㅋ

  5. iceye

    오~잘볼께요! 삼계탕먹고 힘내세요~^^

  6. cendrillon

    우와 무한님 제발 무한님이 제시한 스토리로 미드 한 편 만들어 주세요 굽신굽신 진짜 재미있을 듯!!

  7. 소마

    흠흠~~
    재미없다고 말씀해도 재미있게 써주셔서
    보고 싶다고 생각되는데요~~
    여긴 오랫만에 햇살이 좋은 수욜입니다.
    무한님, 좋은 하루되세요~~

  8. 초강력궁뎅이

    오잉?

  9. 드링크

    잘 만들지 못한 영화 중에 보고 나서 까주고 싶은 영화가 있고, 그것 조차 무가치하게 느껴지는 영화가 있죠. <더 레이븐> 혹평을 하도 많이 들어서 굳이 볼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비판할 가치는 있었던 영화였나 봅니다:) 형이 다 애정이 있어서 이러는 거야, 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잘 보고 갑니다~

  10. ab

    흠.. 무슨말인지 도통..
    검색해보고 다시 올께요~~ㅎㅎ

  11. lime

    무한님은 정말, 비판하는 글도 잘 쓰시네요. 감탄했습니다..

  12. 사랑스런피리

    새로생긴코너인가요?감각적인 글. 좋네요

  13. 주주0712

    아싸 선!!!

  14. 엄마미소

    어마, 이 코너도 무척 좋은걸요?>_<

    전 포스터와 줄거리를 본 순간 '내 스타일은 아닐 것 같아' 싶어 일찌감치 눈을 뗐습니다.
    포우는 좋아하지만, 영화를 보면 [셜록 홈즈 : 그림자 게임] 을 보고 나왔을 때와 비슷한 마음이 들 것 같았거든요.

    너무 무관심했던 저는 도리어 무한 님의 극장일기를 읽고 좀 더 관심+호감이 생겼습니다^^
    ...예고편을 보니 무한님 평에 동의할만한 단서들이 제법 보여서 안타깝긴 하지만요ㅠㅠ

    // 제 무한님은 꼭 행복한 작가이셨음 합니다. 꼭이요 ㅎㅎ

  15. planta

    존 쿠삭을 애드가 앨런 포 로 만들었다는건 대박 뉴슨데 영화는 중박도 안되나요.. 이 영화는 스릴러가 아니라 그냥 비극이네요 ㅠㅠ 그치만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니까 나중에 DVD가 나오면 한 번 봐야겠어요^^ 참, 영화 감상도 무한님의 글로 하니 재미있네요!

  16. S양

    선-

    -- 헐 ,, 보려고 했는데 얼마나 끔찍했기에 ..;;

  17. K양

    음...더 레이븐은 안 보는게 낫겠어요. 요즘 영화를 거의 못 봐서 그런데 어떤 영화를 보는게 좋을까요?...^^

  18. 사이다맛감

    무한님 더레이븐에 분노하신듯

  19. 과객

    오~ 무한님 감상문 재밌어요. 앞으로 많은 영화 리뷰 기대해봅니다.

  20. nana

    보려다가 잔인하다해서 안봤는데 안보길 잘했네요ㅋ

  21. nana

    보려다가 잔인하다해서 안봤는데 안보길 잘했네요ㅋ

  22. 곱상한

    봐야겟답 ㅎ

  23. 피안

    저는 얼마전에 스파이더맨 보고 와서
    어리둥절...
    이게 뭐지?
    속편도 아닌거 같고
    그렇다고 새로운 것도 아니고
    뭔가 이상한 느낌 ㅎ
    어디서 본거 같긴 한데 말이지... 안타까웠어요 ㅎㅎ

  24. ㅇㅇ

    무한씨
    글쓰는게 너무 매너리즘에 빠진거 아니에요? 처음에 공감갈만한 주제로 글을시작해서 하고싶은말로 넘어가는게 좋은 기법이란건 알겠는데 진짜 거의 모든글이 그런식이라니....
    오래봐서 그런지 질립니다

  25. ejsl

    어렸을 때 봤던 <검은 고양이>가 잊혀지질 않아요.
    특유의 어둡고 기괴한 분위기가 포우의 불운했던 삶을 그대로 나타내주는 듯 했던...
    포우 전집을 다시 봐야 겠어요.
    더위가 싸악 가실테니...

  26. 바라보는 시선이 아주 예리하시군요
    좋은 글 향기에 머물다 갑니다
    즐거운 하루 되시고 행복하세요 파이팅 !~~~~

  27. 종이구름

    영화 비평인데도 친근하고 재밌게 읽혀지네요~
    더 레이븐 보고 싶었는데 종합선물세트 같다니... ㅋㅋㅋㅜ
    근데 그런 영화가 은근 많은거 같아요.
    이것저것 취하려다가 아무것도 취하지 못하는 영화들...
    잘 읽고갑니다 무한님~

    오랜만에 무한님의 다른 글들을 보니 좋네요+_+

  28. 아는여자

    꼭 좋은 글 책으로 발간했으면 좋겠어요
    연애얘기 말고.. ㅋㅋ전 무조건 삽니다
    마지막 헤밍웨이 말이 와닿네요
    불우한 어린시절의 가치ㅋ
    좋은 주말 되시길

  29. ASKY

    흠... 저는 더 레이븐 꽤나 재밌게 봤는데 말이죠 ㄷㄷ
    일단 애드가 알렌 포의 얘기를 다룬것만으로 흥미를 돋구었고
    그의 잔인한 작품들이 범죄로 쓰여졌다는점... 제가 유학생이라 그런지 포는 교과서에 다 있고 작품들도 대부분 배웠던거거든요... 심지어 에나벨 리는 제가 외웠던 시고요ㅋㅋ; 그리고 범행동기는 확실히 영화에서 나온답니다만...? 그 편집자? 그 사람은 포의 열렬한 광팬으로서 포의 슬럼프에 슬퍼? 실망? 하여 그의 글을 더 읽고 싶어하여 범죄를 저질른걸로 기억하는데요... 범죄자가 포의 얘기를 각색?하여 범죄를 저지른 부분은 포의 광팬으로서 약간 인정?을 받고 싶어 해서 저지른걸로 기억하는데요...

  30. 주부구단

    어렵다;;;
    전 아직까진 영화는
    그냥 보기만 하는 수준이라..ㅠ_ㅠ
    앞으로는 무한님의 글을 보고
    저도 감상을 하도록 해야겠군요
    잘 읽고 갑니다.ㅋ

  31. Cvank

    드디어 영화평까지 쓰시는군요!

    무한님의 글빨이 영화와 접목되면 정말 재밌을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아직 더레이븐을 못 본터라 글을 읽어도 장면장면을 떠올리며 봐야

    집중이 될텐데 안타깝습니다.

  32. jackdaniels

    안녕하세요^^
    새로운 카테고리의 첫글이 더레이븐이라니.. 개봉일에 보고 왔어요.
    전 말재주가 없어서 무한님글을 읽다보면 손이 닿지 않는 부분을 누가 대신 긁어주는 시원한 기분이 들어요.ㅋ
    제가 관심있어 하는걸 글에 언급하실때마다 너무너무 반갑구요~
    오늘은 그 기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포스팅을 1빠로 발견했을때도 안남겼던, 첫 댓글을 남기고 갑니다.
    요즘 사연메일을 보내고 싶은 맘이 굴뚝이지만 꾹 참고...
    오늘 하루도 편안한 저녁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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