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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생활과여행/별볼일있는남자

개기월식, 별 보는 남자의 관측기.

by 무한 2014. 10. 10.

개기월식, 별 보는 남자의 관측기.

뜬금없지만 이 글을, 내 수능시험 전 날 이야기로 시작해 보자. 수능 전 날 저녁, 난 다음 날 시험 볼 장소를 미리 확인해두기 위해 일산 대진고를 찾았다. 사실 손바닥만 한 일산에서 시험 볼 장소를 못 찾을 일이 뭐있겠냐고 생각했지만, 친구 H군이

 

"어차피 마음만 초조한데, 확인 한 번 해주는 게 수험생의 예의 아니겠어?"

 

하는 까닭에 함께 가게 된 것이다.

 

대진고에 가보니, 학교 후배들이 다음 날 시험 볼 선배들을 응원하기 위해 자리를 맡고 있었다. 나도 1, 2학년 때는 그렇게 시험 전 날 가서 좋은 자리를 선점한 후 밤을 새곤 했는데, 응원을 핑계로 불 피워 놓고 밤을 새다 보면 드럼통에 집어 넣은 장작 타는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썸 타는 소리가 들려던 것 같다.

 

여하튼 밖에서 보니 더 반가운 후배들의 얼굴이 보였다. 후배들도 다가와 말을 걸었고, 추운데 몸 좀 녹이라는 권유와 커피 한 잔 하라는 권유, 그리고 수능을 하루 앞둔 심정이 어떠냐는 질문, 사적인 질문 등에 붙잡혀 그곳에서 한참이나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대화시작 1시간 후)

후배1 - 형 근데 졸업하고도 계속 공연 하실 거예요?

무한 - 당연하지. 12월에 저동고 근처에서 공연해. 보러 와.

후배2 - 아, 거기 그 교회에서 빌려주는 공연장이요?

무한 - 어. 거기서 할 거야.

 

(대화시작 2시간 후)

후배3 - 근데 원래 이렇게 추워요? 엄청 추운 것 같아요.

무한 - 넌 멋 부리느라 얇게 입고 오니까 춥지. 집이 여기서 멀어?

후배3 - 후곡이에요.

무한 - 가깝네. 이따 새벽되면 더 추워. 가서 패딩 가져와.

 

(대화시적 3시간 후)

후배1 - 형, 이따가 얘(후배2)가 좋아하는 애 오는데,

           이벤트 뭐 해주면 좋을까요?

후배2 - (부끄러워하며)무슨 좋아하는 애야.

무한 - 뿌리는 눈 스프레이 있잖아. 일단 그걸 하나 사와.

후배1 - 오~ 그걸로 눈 내리는 거 보여준다고 하는 거예요?

무한 - 사오면 알려줄게. 근데 모닥불에 너무 붙어서 뿌리면 119 불러야해.

후배1 - ㅋㅋㅋㅋ 저기 뒤에 백병원 있어요. ㅋㅋㅋㅋ

 

한참 대화를 나누다가, 후배 중 하나가 집에 가서 잠시 자고 오겠다는 얘기를 꺼냈다. 나 역시 좀 피곤한 까닭에 집에 가서 좀 자고 온다는 얘기를 하려다 보니,

 

'잠깐만, 지금 자고 오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난 내일 수능 봐야 하잖아?'

 

하는 생각이 들었다. 놓고 있던 정신의 끈을 그제야 다시 잡게 된 것이다.

 

서둘러 집에 돌아와 잠을 청했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아…. 아까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셨어.

그 자식들이 자꾸 추우니까 커피 마시라고 줘서….'

 

양을 수 천 마리 세도 잠이 오지 않았다. 양을 세다가, 늑대가 양을 뛰어 넘는 그 짤방이 생각나 혼자 웃었던 것도 기억이 나고, '지금 아무 생각도 하면 안 돼. 생각을 하면 잠이 안 와.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해.'하는 '생각 억제'를 생각하느라 또 잠을 못 이뤘던 기억이 난다. 새벽 다섯 시쯤 겨우 잠이 들었고, 다음 날 영혼만 내 영혼일 뿐 '남의 몸'으로 수능을 보는 듯한 느낌으로 시험을 봤던 기억도 난다.

 

 

이번 월식 관측을 준비하면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진지하게 월식을 대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난 긴장했는데,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전 날 나가서 달의 촬영 노출을 살펴 볼 정도로 준비를 했다. 종이에 다음 날 가지고 나가야 할 것들을 다 적었고, 배터리 충전, 렌즈 클리닝, 포커서 확인 등을 끝마쳤다. 그래도 뭔가 부족한 것 같아 남들이 찍어 놓은 사진이나 동영상 등도 열심히 관람했다. 그러다 '연관 동영상'으로 영화와 미드를 소개해 놓은 것을 봤는데, 그게 문제였다.

 

자세한 얘기를 여기다 다 적으면 너무 길어질 것 같으니, 뭘 하면서 그 시간들을 다 보냈는지는 생략하자. 다만, 중간에 끊을 수 없는 시리즈물을 접하게 되어 정신줄을 놓게 되었다고만 적어둔다. 그런 일들을 겪다가 최후에 타협하게 되는

 

'그래, 다섯 시간만 자고도 찍으러 나갈 수 있어.'

 

라는 생각까지를 했던 것 같다. 물론 잠들기 전 내 의지가 다음 날까지 이어졌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충분한 수면 시간인 '8시간'을 채워서 자고 말았다. 어머니의 전화가 겨우 나를 깨울 때까지 말이다.

 

"여기 지금 사람들이 달 찍고 있는데, 너도 오늘 뭐 찍는다고 하지 않았어?"

 

전화를 끊고 시계를 보니, 오후 7시 10분이었다. 월식은 6시 14분 부터 시작인데. 별 사진을 함께 찍으러 다니는 지인과 5시에 킨텍스 뒤 공터에서 만나기로 했었는데, 두 시간을 넘게 늦어 버린 상황이기도 했다. 폰을 보니 그 분께

 

"무한씨, 얼른 하늘 봐요. 지금 80% 진행중이에요."

 

라는 톡이 와 있었다. 나는 그 시간에 킨텍스까지 가면 월식을 다 놓칠 거란 생각에 그 분께 바로 양해의 문자를 보내고, 일단 카메라를 들고 우리 동네 공원으로 뛰어 나갔다. 망원경은 설치시간이 좀 걸리니 포기하고, 가벼운 카메라만 챙겨 나가 사진이라도 건지려고 한 것이다.

 

 

 

 

내가 공원까지 가는 동안, 달이 지구 그림자 뒤로 완전히 숨어버리는 본영식이 시작되었다. 본영식 직전 달이 손톱만큼 보이는 걸 확인했는데, 카메라를 설치하자 완전히 가려버렸다.

 

 

 

 

간디(애완견, 애프리푸들)를 산책시키러 나오신 어머니를 공원에서 만났다. 난 정해진 시간마다 셔터가 눌러지도록 카메라를 설정해두고, 어머니께 카메라를 봐 달라고 부탁드린 후 집에 와서 망원경을 챙겨 나갔다.

 

 

 

 

지구 그림자 뒤에 숨었던 달이 다시 고개를 내미는 모습이다. 밝은 쪽에 노출을 맞추면 어두운 쪽이 까맣게 나와 보이지 않고, 어두운 쪽에 노출을 맞추면 저렇게 밝은 부분이 하얗게 타버린다. 

 

 

 

 

여기서부터는 밝은 쪽을 찍는 게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밝은 쪽에 노출을 맞췄다. 이전까지의 사진에서 붉게 나왔던 부분이, 여기서는 노출 언더로 까맣게만 표시되었다. 지구 그림자에 가려진 달이 붉은 이유에 대해서는 TV뉴스에서도 설명을 해줄 정도였으니 설명은 생략하자. 노을이 붉은 이유와 비슷하다고 생각 하면 될 것 같다.(빛의 여러 색 중, 파장이 긴 붉은 색만 살아남아 우리 눈에 보이게 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뒤늦게 망원경을 가지고 나와 찍은 사진들을, 시간의 순서대로 배열해 보았다. 전날까지 멀쩡하던 망원경의 포커서가 말썽을 부려 초점을 맞추는 게 쉽지 않았다. 어쨌든 월식을 촬영한 후 전문가 분께 여쭤봤더니, 모터의 클러치가 고장 난 것 같다고 하셨다. 망원경에서 카메라를 제외하면 전동으로 잘 움직이는데, 카메라를 달면 모터가 소리만 낼 뿐 움직이질 않는다. 이것 때문에 필드에서 당황해 식은땀을 한 바가지 흘렸다.

 

좀 더 큰 사진으로 보고 싶어 하실 분들이 계실 것 같아, 아래에는 위에 있는 대상들의 개별사진을 올려두도록 하겠다.

 

 

 

 

 

 

 

 

 

 

 

촬영 중 망원경이 달을 추적하지 못해 애먹었는데, 어제 집에 돌아와 샤워하며 생각해보니 경도와 위도 값을 입력하지 않았다. 그래서 망원경은 이전 세팅인 '동두천'을 기준으로 달을 추적했을 것이고, 때문에 살짝씩 계속 틀어지는 결과를 보였던 것 같다. '어린이 크리스마스 선물용' 망원경치고는 만족할만한 관측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고마운 녀석이다. 

 

 

이렇게 생에 첫 개기월식 관측이 끝났다. 휴대용 적도의와 망원렌즈가 있으면 내가 계획한 영상도 만들 수 있었을 것 같은데, 현재 내 지갑에 IMF가 온 까닭에 일단은 이 정도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지금 찍은 사진들로는 달 추적에 실패해 달이 통통 튀는 영상밖에 만들 수 없는데, 그 영상이나마 마무리가 되면 이 카테고리에 올려둘까 한다.

 

월식 관측 중 한 모자가 내 옆을 지나가며 대화하는 소리를 들었다.

 

아들 - 엄마, 일식이야 일식.

엄마 - 어. 그래. 앞에 보고 가.

 

'월식'을 '일식'으로 알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훗날 그 꼬마가 자라 엄마에게 달을 보며 알려줄 기회가 있을 거라 생각하며 그냥 두었다. 내가 이번에 우리 어머니, 그리고 공쥬님(여자친구)과 앉아서 달을 보며 왜 월식이 일어나는지, 일식과는 뭐가 다른지, 달이 왜 붉게 보이는지를 이야기 해 줬던 것처럼, 그 꼬마도 엄마와 지구 그림자 뒤로 숨는 같은 달 보며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을 테니 말이다.

 

아, 그리고 그런 대화를 나와 독자 여러분들도 나눌 수 있도록 이 <별볼일있는남자>라는 카테고리를 새로 만들었다. 내가 본격적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기 시작한 것은 작년 페르세우스 유성우를 보기 시작했을 때부터인데, 그 이후 관측지에 눈동냥을 다니고, 또 여러 책이나 강의들을 찾아 본 결과 지금은 하룻밤 정도는 날이 새는 줄 모르고 밤하늘을 떠듬떠듬 읽어줄 정도가 되었다. 훗날 내 아이들에게 별과 꽃과 새와 나무, 그리고 물고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자 열심히 배워가는 중인데, 관심이 있는 분들이 있으면 함께 배워갔으면 좋겠다. 그럼 다음 글에서 또 뵙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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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사진을 원하시는 분이 계셔서, 아래에 첨부합니다. (클릭하시면 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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