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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매뉴얼(연재완료)/솔로부대탈출매뉴얼(시즌5)

짝사랑 때문에 4년 동안 절망 중인 남자.

by 무한 2015. 1. 27.

안녕 K군. 내가 공쥬님(여자친구)을 짝사랑하다가 퇴짜 맞은 게 열세 살 때야. 포도밭 옆에 있는 도로변에서였는데, 그때 공쥬님은-그간 느낀 내 시선과 다른 이들이 전했을 것이 분명한 내 마음을 알고는- 내게 "너 나 좋아해?"라고 물은 뒤, 내가 그렇다고 하자

 

"그래. 고마워. 우리 좋은 친구로 지내자."

 

라고 말했지. 전에 몇 번 말했지만 난 저 '좋은 친구'가 정말 '좋은 친구'인 줄 알았다니까? 그래서 이제 난 공쥬님과 영화도 같이 보고, 롯데리아(당시 근방에 있던 유일한 패스트푸드점)에도 같이 가는 건 줄 알았어.

 

근데 그게 아니더라고. '좋은 친구'로 지내자는 얘기는,

 

"귀하의 지원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저희 회사에 변함없는 애정과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금번 모집에서는 당사 정책상 한정된 인원의 채용으로 인하여

불합격 하셨음을 알려드리니, 이점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라는 통보를 받은 것과 같은 거였어. 저 이후로 공쥬님은 내게 일부러 더 밝게 인사도 해주고 먼저 말도 걸어주고 그랬는데, 그래서 더 슬펐어. 차라리 "나 너 싫어."하고 벽을 세웠으면, 내가 그 벽을 느끼고 포기라도 했을 텐데. 여하튼 15년쯤 지나서 공쥬님과 내가 연인이 되었을 때, 난 물었지.

 

"근데 너 졸업식 때 왜 나랑 사진 찍자고 그랬던 거야?"

 

라고 말이야. 대답이 뭐였는 줄 알아? "그냥, 졸업식이었으니까."이었어. 그냥 그랬던 거야. 아무 의미 없이. 하긴, 따져보면 공쥬님은 추억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타입이라, 그때 나 말고 다른 친구들과도 같이 사진 찍고 그랬거든. 근데 난 저기에 엄청난 의미부여를 하곤 중학생이 되어서도 늘 '오천 원'을 지갑에 넣어 가지고 다녔지. 타 중학교에 다니고 있는 공쥬님을 만나면 같이 롯데리아에서 불고기버거 세트 먹자고 하려고. 그때 그 세트 두 개가 딱 오천 원이었거든.

 

 

1. 짝사랑을 하면 머리가 좋아진다.

 

짝사랑을 하면 확실히 머리가 좋아지는 것 같아. 상대에 대한 별 걸 다 기억하게 되거든. 여기다 다 적을 순 없지만, 난 중학생이 된 뒤 공쥬님을 한 번도 못 보다가, 공쥬님이 유학을 가게 되어 다른 친구들과 송별회를 하게 되어 만난 적이 있어. 그때 공쥬님이 입고 나왔던 옷, 구두, 그리고 노래방에서 공쥬님이 불렀던 노래, 모임이 파하고 공쥬님이 간 방향 등을 지금도 전부 기억하고 있지.

 

그 중 하나만 얘기하자면, 공쥬님이 불렀던 노래가 포지션의 <Remember>였어. 이것도 나중에 물어봤지. 그때 왜 그 노래를 불렀던 거냐고, 무슨 의미였냐고. 공쥬님 대답이 뭐였는 줄 알아? 역시 "그냥."이었어. 왜 K군도 노래방에 가면 일단 그냥 눈에 띄는 노래 중에 아는 노래 있으면 예약을 하잖아. 그것처럼 공쥬님도 그냥 눈에 띄어서 예약을 했던 거야. 자주 듣던 노래 중에 하나였으니까.

 

근데 짝사랑하는 입장에선, 상대가 하는 말이나 행동, 또는 상대가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는 모든 것들에 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이거든. 그래서 그 노래를 고른 게 상대의 심정을 잘 나타내고 있는 노래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게 되고, 그 노래의 가사가 바로 상대가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라고 믿어 의심치 않게 되는 거지. 뭐 어쩌면, 내가 그렇기에 상대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걸 수도 있겠다. 그때 내가 가장 아끼던 노래가 김현성의 <소원>이었거든.

 

"그쵸 내가 뭔가 잘못한 거죠.

원하시면 고쳐볼게요. 어렵지 않은 걸요.

내가 왜 싫어졌는지 가르쳐 줄 순 없나요.

아직도 그대 사진은 날 보면 웃고 있는데.

우린 여기까진가요. 죽어도 난 아닌가요.

이해해보고 싶지만 그게 잘 안 되나봐요.

이제는 끝인걸 알지만

생각의 마지막엔 이러지 말았으면 해요."

 

-김현성, <소원> 중에서

 

아,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짝사랑을 하면 노래도 잘 하게 되는 것 같아. 김현성의 저 <소원>이라는 노래 참 높거든. 근데 가사가 내 얘기라고 생각하며 매일 부르고 다니다 보니, 난 득음을 했어. 그래서 지금은 웬만한 여자노래들까지 다 올라가는 고음을 소유하게 되었지.

 

더불어 상상력도 풍부해지는 것 같아. 고백을 할 여러 상황들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 해보게 되거든. 난 기차를 타고 통학했는데, 기차에 보면 비상시에 누구든 전 객실에 방송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장치가 있어. 그걸 보면서 난 그 장치를 사용해 사랑고백을 하는 상상을 꽤 많이 했지. 공쥬님은 기차가 아닌 버스로 통학해서 만날 일이 없었다는 게 함정이긴 했지만.

 

이렇게 적어 놓으니까 그냥 재미있는 과거의 해프닝 같지? 아니야. 저 순간순간들이 내게는 고통이었고 괴로움이었어. 지금은 굳은살이 박여 아프지 않지만, 저때는 내 여린 살에 물집이 잡히고 피가 나는 느낌이었거든. 상대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숫자나 문자 하나하나가 내 마음속에 새겨져 그대로 내 일부분이 되었던 것 같아. 나 스스로 나를 학대하듯 계속 패배한 기분으로 내몬 까닭에 받게 된 상처가, 또 셀 수 없이 많았고 말이야.

 

 

2.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난 뭘 어떻게 달리 할까?

 

우선 그, 변죽만 울리며 주변을 인공위성처럼 맴돌기만 하는 멍청한 짓거리부터 때려치우겠지. 그건, T5 드라이버를 동네 철물점에서 구입할 수 있는지를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글을 올려 물어보는 것만큼이나 멍청한 짓이니까. 그냥 철물점을 찾아가거나, 철물점을 찾아가는 게 헛걸음이 될 것 같으면 전화를 해보면 되는 거거든. 근데 답을 금방 알 수 있는 그런 직접적인 행위는 하지 않고 간접적으로만 접근한다 말이야. 웹에 올린 글을 누군가가 보곤 "팔걸요. 전 저희 동네에서 철물점에서 산 적 있어요. 세트로."라는 답을 단다고 해서, 그게 우리 동네 철물점에서도 판다는 건 아닌데 말이야.

 

어쩌면 겁이 많고 마음이 여린 까닭에 그런 것일 수도 있어. 금방 답을 듣는다는 게 겁나는 거야. 내 자신이 실망하게 될까봐. 그래서 그 목적지까지 금방 질러가지는 않고, 그 주변을 맴돌며 구경만 할 뿐인 거지. '내 기대대로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가진 채 말이야.

 

당시 내가 했던 멍청한 짓 중 하나는, 수학여행가서 가지고 있던 비상금으로 목걸이를 산 뒤, 버스를 탈 때 공쥬님에게 슬쩍 주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갔던 거였어. 나도 내가 당시에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여하튼 뭔가를 줘서 환심을 사고 싶은 마음과 그렇게라도 해서 내게 좀 관심을 가져줬으면 하는 바람이 엉켜있었던 것 같아. 하지만 공쥬님의 입장에선 그게 뜬금없는 행동이었으며, 그냥 어리둥절하게 있는 반응 말고는 할 게 없었던 거지.

 

아, 수학여행 갔을 때 나 혼자 방에서 나가 1층 로비에 있었던 것도 기억난다. 컨피던스! 지금도 나오는지 모르겠는데 그때 컨피던스라는 음료수가 있었어. 자판기에서 그걸 뽑아선 혼자 홀짝홀짝 마시면서, 아무도 없는 1층 로비에 앉아 공쥬님이 영화처럼 딱 그 자리에 나타나길 기다린 거지. 만나기로 약속한 거냐고? 그럴 리가 있겠어? 그냥 나 혼자 청승맞게 궁상을 떤 거야. 근데 그땐 그게 무슨 수행처럼 느껴졌거든. 분명 누가 봐도 삽질이긴 하지만, 내 입장에선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는 느낌이었달까. 공쥬님이야 당연히 자신이 배정된 방에서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고 있으니 1층 로비까지 내려올 일이 없잖아. 그런데도 난 공쥬님이 딱 그 시간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괴상한 기대를 하며 기다린 거지. 그러다 저체온증이 올 것 같아서 결국 들어오긴 했지만 말이야.

 

저 따위 행동들을 하며 난 공쥬님을 미움의 대상, 애증의 대상으로도 생각했던 것 같아. 그냥 좀 나에게 왔으면 좋겠는데 공쥬님은 나 없이도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었거든. 그러니까 그게 싫고, 밉고, 그것에 심술이 난 적도 있었던 것 같아. K군도 그랬다고 했지? K군은 온 마음을 다해 다가가도 상대는 그저 K군을 '동료 중 하나'로 생각하며 대하니까, 그것에 심술이 나서는 울퉁불퉁한 카톡을 보냈다고 말이야.

 

그런 상황에선, 패배감에 흠뻑 젖어 거의 절망과 같은 이야기만 상대에게 하게 될 수 있어. 상대의 모든 반응, 또는 아직 상대가 하기도 전인 반응까지도 이쪽에서 부정적으로 예측하며 전부 '패배감의 먹이'로 줄 수도 있고. 상대에게 연락도 하기 전에 이쪽에선 이미, 상대가 

 

'아 짜증나. 얘가 또 연락했어.'

 

라는 반응을 할 거라고 부정적인 상상을 하는 거야. 나도 그래서 당시에 더 다가가질 못 했던 것 같아. 나라는 사람이, 또는 내 연락이 상대에게 민폐가 될 거라고 내가 미리 겁을 집어먹어 버렸으니까. 이러니 무슨 일이 잘 될 수 있겠어. 마음으로는 상대를 종교처럼 여기며 가까워지길 바라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상대가 날 싫어할 게 분명하다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거잖아.

 

내가 여자라고 해도 저 당시의 나랑은 안 만나. 어딘지 모르게 뭔가 의뭉스러워 보이고, 사소한 것으로도 삐쳐서는 괴롭힐 남자처럼 보이거든. 다른 남자들과는 멀쩡하게 다이어리에 쓸 스티커를 교환하거나, 일산 어디에 뭐가 생겼다는 이야기들을 하며 놀 수 있어. 그런데 나랑은 그런 대화 같은 건 할 수도 없을 뿐더러, 나는 어느 순간 쓱 사라져서는 혼자 음료수 마시다가 저체온증으로 파랗게 질려 들어올 뿐이거든. 같이 놀고 싶으면 함께 어울리면 되는데, 그러진 않고 뒤에서 혼자 괴상한 기대를 하며 스스로를 학대하다 나중에 와선 그것에 이쪽의 책임도 있다고 말하는 이상한 사람이거든. 지금의 K군이 딱 그렇지 않아?

 

"퇴짜 맞은 후로 저는, 계속 B를 피해 다녔습니다."

 

그렇게 상대도 원치 않는 숨바꼭질을 K군 혼자 하다가, 갑자기 또 K군은 뜬금없이 "할 말이 있으니까 밖에서 단 둘이 좀 봤으면 좋겠다."라고 했지? 상대는 할 말 없으니까 안 만난다고 했고. 그 상황에서 오로지 상대의 부정적인 답에 절망하고 있지만 말고, 둘의 관계를 크게 봐봐. 상대의 입장에선 괜히 또 K군과 만나 커피라도 한 잔 마셨다가 무슨 욕을 들을지 몰라 아예 관계를 맺고 싶지 않은 거야. 이전에 K군이 그녀에게 보낸 톡을 봐봐. 그녀가 자신이 있는 팀에 언제 한 번 오라고 하니까, K군은

 

"너 꼴보기 싫어서 안 간다."

 

라고 했지? 조금이라도 친해지면 혼자 기대하고 실망하는 걸 반복하다가 저 따위 이야기만 하는 남자를, 어떤 여자가 만나고 싶어 하겠어? 그것에 대해서는 이미 사과했다고? 아니, 세상 참 편하게 살려고 하네. 이 글 보면 다음 주에 면접 보러 가기로 한 곳 담당자에게 연락해서, 꼴보기 싫어서 면접 안 간다고 말해봐 봐. 그러고는 내일쯤 생각이 짧았다고, 충동적으로 한 말이라고 사과해봐. 다른 사람에게는 못 할 행동을 그녀에게 하는 건, 그녀를 괴롭히는 일일 뿐이야. 게다가 현실의 그녀가 상처를 받든 말든 그것엔 개의치 않고 그저 K군의 욕심만 들이미는 건 이기적인 행동일 뿐이고 말이야. 짝사랑? K군이 정말 그녀를 짝사랑 하는 걸까? K군이 만들어낸 그녀의 이미지를 짝사랑하는 건 아니고? K군이 정말 현실의 그녀를 짝사랑하는 게 맞다면 그렇게 상처를 주진 않을 거라 나는 생각하는데, K군은 어떻게 생각해?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냥 가지고 싶어 하는 거 아닐까?

 

 

3. 이상한 귀결.

 

왜 '불주사'라고 하잖아. 초등학교 고학년 때 왼쪽 어깨에 맞는 주사. 난 그 불주사 자국이 남들의 네 배는 되는 것 같아. 딱지를 뜯는 것에 재미를 느껴서 새 딱지가 앉을 때쯤이면 계속 다시 뜯었거든. 공쥬님도 내 불주사 자국을 보고는 "여기 왜 이래?"라고 바로 물었지. 아, 공쥬님이 내 벗은 어깨를 어떻게 봤냐고? 그게 수, 수영장에서 본거야. 아무튼 그건 그렇고.

 

내 불주사 자국이 커진 건 불주사를 놓은 사람의 잘못일까, 아니면 그 딱지를 계속 뜯어 낸 내 잘못일까? 내 잘못이잖아. 이건 쉬워. 그런데 저 위에서 말한 대로 짝사랑을 하게 되면,

 

"이게 다 B양 때문이야."

 

라는 이상한 귀결에 도달할 수 있거든. K군이 B양과의 관계에서 헛발질을 한 까닭에 불편한 사이가 되었어. 그런 와중에 K군은

 

'그래, 내가 너에게 민폐라면, 볼 일 없도록 아예 회사를 나가주지.'

 

라는 마음을 먹었고. 그러면 그 퇴사는 B양 잘못이야, 아니면 K군 잘못이야? 더불어 K군은 퇴사 후에도 계속 B양과의 일이 마음에 걸려 재취업도 하지 못 하고, 가족들과의 관계까지 나빠지게 되었어. 그럼 그건 B양 잘못이야 K군 잘못이야? 나아가 K군은 지금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대로 K군이 인생에서 로그아웃하면 그건 B양 잘못이야, 아니면 K군 잘못이야?

 

이렇듯 K군이 혼자 감정을 질질 끌고 온 까닭에 벌어진 일들을 B양과 함께 고통분담 하자고 하면, 당연히 B양은 K군을 차단할 생각부터 하는 거야. 역시 한 발짝 물러서서 이 관계를 봐봐. K군이 이 관계를 위해 한 건 도대체 뭔지. 책 선물한 거? 그래서 될 것 같으면 나도 솔로부대원들에게 "매일 책 한 권씩 선물하세요. 그게 답입니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겠지. "매일의 그녀의 집 현관문 문고리에 초밥 도시락을 걸어두세요. 그렇게 6개월 쯤 하다가 연애를 요구하세요."라는 이야기를 하거나 말이야.

 

"그 전에, 제가 따로 한 번 보자고 B에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B는 단 둘이 보는 게 부담스럽다며

사람들과 같이 보자고 하더군요.

저는 그럴 바에는 안 보는 게 낫겠다고 말하고

카톡으로 제 마음을 모두 털어 놓았습니다."

 

봐봐. K군은 그녀 자체에는 관심이 없어. 그녀가 K군의 기대대로 움직여 주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거지. 내가 바라는 기대의 속도대로 따라와 주지 않으면 상대를 저주하겠다는 거잖아. K군은 B양이 제일 가깝게 지내는 친구 이름 알아? 모르잖아. B양이 좋아하는 색깔은? B양이 좋아하는 가수는? B양이 좋아하는 영화장르는? B양이 감명 깊게 읽은 책 제목은? B양의 가족들 이름은? B양이 자주 가는 곳은? B양이 나온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이름은? K군은 B양에 대해 아는 게 없어. 아는 거라곤 그녀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전부야. 그런데 그렇게 아는 것도 없으면서 다짜고짜 내 여자친구가 되어 달라고 그녀에게 요구하지. 그건 그렇다 쳐. 근데 만약 B양과 사귀면 K군은 뭘 어떻게 할 생각이야?

 

"전 여자 앞에서 수줍어하고 당황합니다.

다분히 모태솔로 기질을 타고 난 듯…."

 

그녀와 사귀기만 하면 목적을 달성한 것이니 그걸로 끝나는 거야? K군은 그녀와 사귄다 해도 전화통화 10분을 못 넘기고, 카페에라도 가서 앉게 되면 멀뚱멀뚱 불편한 침묵만 유지하고 있을 것 같지 않아?

 

패배감에 젖어 있는 사람에게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악취가 나게 돼. 자기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 습관이 되고, 자신이 차라리 이것보다 훨씬 더 불행한 상황에 놓이면 누군가가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까 하는 괴상한 생각만 하게 되지. 때문에 연애를 시작해도 상대는 그 악취 때문에 금방 벗어나려 할 거야. 대개 이런 상황에서는, K군이 원하는 스킨십 진도나 만남의 빈도, 또는 연락의 성실도를 상대가 따라주지 않는다고 K군이 징징거리게 되고, "나만 너를 사랑하는 것 같다."라는 이야기를 하며 집착하고 구속하게 되거든. 만약 이번 설이 되어 K군이 "난 이번에 가족모임에서 빠질 거야. 너 만나려고."라고 했는데, 상대가 자신은 그럴 수 없는 처지라고 답하면, K군은 "너에게 난 1순위가 아닌 것 같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말겠지.

 

그럼 그런 행동을 한 까닭에 결국 이별을 맞이하게 되더라도, K군은 역시나 "이게 다 B양 때문이야."라는 결론을 내게 될 거야. 눈으로 또 마음으로 B양만 보고 있지 말고 K군 스스로를 봐봐. 스스로를 돌보지 않아 엉망이 된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 바라는 누군가가 곁에 오지 않는다고 그저 속상해만 하고 있는 건 아닌지. K군은 누군가가 흥미를 느낄만한 사람이야? 누군가가 매력을 느낄만한 사람이야? 같이 있으면 즐거울 수 있는 사람이야? 난 K군이 만약 오늘 나를 찾아오면 금방이라도 바다낚시를 하러 가고 싶도록 만들 수 있어. K군은 내가 찾아가면 뭘 어떻게 할 수 있어? 나가서 밥이나 술 같이 먹는 거, 그리고 또 뭐? 게임방 가거나 당구장 가는 거, 그리고 또 뭐? 여기서 막히면 안 되는 거야. 난 내 고등학교 시절에 대해서만도 14박 15일 동안 이야기를 해줄 수 있어. 상대의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14박 15일 동안 들어줄 수도 있고. 잘난 척 같은 걸 하려는 게 아니야. 내가 패배감에 젖어 무기력한 태도로 있는 게 아니라, 상대를 나와 같은 '사람'이라 생각하며 공감대를 찾아갈 수 있다는 얘기를 하는 거지.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건 나쁜 일이 아니야. 단, 그 '좋아함'이라는 게 뜯어서 살펴봤을 때

 

- 기대와 요구

 

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그건 문제인 거지. 그렇게 상대에게 기대와 요구를 하다 상대가 들어주지 않는다고 자신의 인생을 파멸로 몰아가겠다고 말하는 건, 꼬꼬마가 엄마에게 백화점 장난감코너에서 저 장난감을 안 사주면 에스컬레이터에서 굴러버리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아.

 

"부담주어서 미안한데 포기는 못 하겠다고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악을 쓰고 울며 스스로를 인질로 삼아 위협만 할 게 아니라 '될 수 있는 방법'이 뭔지를 찾아야 하는 거잖아. 이게 K군 친구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 쭉 살펴봐봐. 매일 밤 9시에 카톡을 보내거나, 그녀의 퇴근 시간에 맞춰 전철역까지 따라가서 "정말 난 안 되겠냐. 정말 안 되는 거냐."라는 이야기를 하는 게 이 관계에 1g이라도 도움이 될지 말이야.

 

내가 성인이 되어 공쥬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를 돌아보면, 난 어떻게든 내 마음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던 전과 달리,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 같아. 예전이었다면 난 사실 만나서 뭘 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지금 만날 수 있냐, 없냐."만을 물었겠지. 그런데 마음이 잔잔해지고 나니, 대화를 '만남'이라는 목적을 이루려는 수단으로만 사용하는 게 아니라, 그냥 정말 대화를 할 수 있게 되더라고. 상대가 원치도 않을 선물을 줘서 그저 환심을 사려 했던 전과 달리, 가깝게 지내다 보니 필요한 것도 눈에 띄어 그걸 선물할 수도 있게 되고 말이야. 또, 같은 초등학교 동창인 다른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공쥬님을 봐도 실망스럽거나 서운하지 않았어. 혼자 나가서 이상한 기대를 하며 저체온증 올 때까지 있는 대신, 그냥 그 자리에 어울려서 한 마디라도 더 나눌 수 있었고 말이야.

 

그러다 같이 노래방에 갔을 때 내가 앞서 말한 포지션의 <Remember>도 부르고, 공쥬님은 그 노래 자기가 좋아했던 노래라고 말하고, 그럼 난 또 안다고, 예전에 네가 불렀던 거 기억한다고 말하고, 그것 말고도 기억하고 있는 게 많은데 하나 당 500원씩에 말해주겠다고 하고, 뭐 그랬지. 예전 같았으면 이 정도 상황에서 얼른 속이 후련해지고 싶어 내 마음을 다 쏟아놓는 고백을 했겠지만, 깃털처럼 많은 날들이 있으니 급할 건 없다고 생각하며 같이 출사도 가고, 주꾸미도 먹으러 갔지. 그러다 어떻게 고백했냐고? 궁금해? 궁금하면 K군도 500원 내.

 

아직 끝난 건 아무 것도 없으니까 낙심은 그만 하고, 일단 그 악취를 풍기는 패배감부터 좀 걷어내자고.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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