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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매뉴얼(연재완료)/솔로부대탈출매뉴얼(시즌5)

연애도 연애지만 대인관계가 너무 어려워요.

by 무한 2015. 12. 11.

제 지인 중 하나는 삼십대 중반인데, 아직도 고등학교 2학년 때 좋아했던 한 여자에게 함몰되어 있습니다. 지인의 전화번호 뒷자리는 그녀의 생일이고, 메일주소는 그녀가 사용하던 닉네임에서 따 온 것이며, 108배나 새벽기도 하듯 그녀의 SNS를 찾아갑니다. 지인에게 신앙이 되어버린 그녀는, 몇 년 전 결혼해서 잘 사는 중이고 말입니다.

 

이건 좋게 말하자면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스토리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나쁘게 말하자면 껍데기만 남아 있는 관계를 박제해두고 종교로 삼은 것과 같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이런 스토리가 영화나 소설에 나오면 아무도 만나지 않으며 오로지 상대방만 기다리곤 하는데, 그런 것도 아닙니다. 지인은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끌려 매달린 적도 있고, 또 몇몇 이성들과 연애를 하기도 했습니다.

 

언젠가는 지인이 너무 힘들다며 고민을 털어 놓길래, 저는

 

"난 네가 그러는 게 '미완'으로 남은 것에 대한 미련을 박제해 놓은 거라 생각한다. 어릴 적 피아노를 배우다가 말았던 사람이 종종 '내가 계속 피아노를 배웠더라면….'이라는 생각에 빠지는 것처럼 말이다. 정말 피아노가 배우고 싶은 거라면 지금이라도 어떻게든 피아노를 배우지 않겠냐. 하지만 그러진 않고 '과거에 그랬더라면'이라는 불가능을 매만지기만 하는 건, 일종의 도피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네가 다른 사람에게 빠졌을 땐 언제 그녀를 그리워했냐는 듯 친구들과도 연락을 끊고 상대와 잘 지내지 않냐. 넌 '다른 사람을 만나 봐도 결국 그녀가 생각나서 안 되겠다'는 이야기를 하긴 하지만, 누군가와 만나 아무 문제가 없을 땐 그런 소리를 전혀 하지 않는다. 그러다 문제나 갈등이 생겼을 때, 어쩌면 그 관계에 대한 모든 책임을 내려두고 도피하기 위해 '그녀'로 다시 회귀하려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지인은 고개를 가로저었고, 동시에 지인으로부터

 

"그녀에 대한 내 감정에 대해 네가 뭘 아냐."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당시 제 좌우명이 '나나 잘 하자.'였는데, 그걸 못 지키곤 또 문제를 만들어 낸 겁니다.

 

 

1. 수호씨의 사연을 다루며 드리고 싶은 말들.

 

그래서 사실 이 사연의 주인공인 수호씨의 이야기도 그냥 넘기고 싶었습니다. 수호씨의 사연은 이미 예전에 한 번 다룬 적 있는데다가, 제가 느끼는 수호씨의 감정변화가 아래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좀 과하다고 생각되는 예절을 갖춘 첫 모습 -> 짓밟혔다고 생각해 폭발.'

 

이런 경우, 대개 처음엔 저를 완전한 아군이라 생각하며 120%의 예절과 친절을 갖춰 대합니다. 하지만 뭔가 하나 감정이 상하는 일이 생기면, 뒤에서 총을 쏴버리는 것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강렬한 호감과 믿음이, 순식간에 그만큼의 증오와 분노로 변하는 거라고 할까요.

 

뭐, 저기까진 그래도 괜찮은 편입니다. 저도 수년 간 사연을 다루며 복근이 탄탄해질 대로 탄탄해졌으니 말입니다. 정말 무서운 일은 그 이후에 일어나는데, 그건 바로

 

ⓐ 당신에게 사과를 들어야겠다.

ⓑ 생각해 보니 당신 말이 맞는 것 같다. 

ⓒ 아니다. 당신의 생각이 틀렸던 거다.

ⓓ 당신이 내 말을 인정해야 한다.

ⓔ 이제 보니 당신과의 관계도 내가 망쳤다. 

ⓕ 당신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싶다. 

ⓖ 당신은 어떤 답이라도 나에게 해줘야 한다.

ⓗ 당신이 날 진심으로 용서해주지 않아 난 사는 게 힘들다.

ⓘ 날 무시하는 당신을 부숴버리겠다.

 

위와 같은 '후폭풍'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저런 감정의 파도를 탈 순 있습니다. 하지만 그랬다가도 다시 잠잠해지거나 스스로 답을 구하기 마련인데, 위와 같은 경우엔 '상대에게 확인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꽂혀 쓰나미로 변하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제가 수호씨의 사연을 다룰 경우, 이제 수호씨의 포커스는 상대가 아닌 저에게로 옮겨 올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상대에게 집착을 하던 어느 대원의 사연을 다룰 경우, 그 대원의 포커스가 저에게로 옮겨 와 제발 한 줄의 대답이라도 더 해달라고 집착하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연을 다루는 건, 저 역시 여린마음을 가진 까닭에 수호씨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적어두겠습니다. 단, 다음의 조건을 두고 싶습니다. 저는 수호씨와 친해지고 싶은 생각이 없고, 수호씨가 기대더라도 받아주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는, 아래의 이야기를 읽어보시면 알게 될 거라 생각합니다.

 

 

2. 함께 한 시간과 노력과 추억이 없는 관계는, 관계가 아닙니다.

 

저는 수호씨가 가진 '친구'에 대한 의미를 폄하하려는 게 아닙니다. 수호씨와 학창시절을 같이 보낸 그 친구들이 수호씨에게 정말 소중하며, 이제 소극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그들과의 관계를 복원한 채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하면 저는 찬성합니다. 수호씨의 그 생각도 존중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어릴 적 한두 해 같은 반에서 지낸 관계를 두고, 그들이 수호씨 인간관계 복원의 마스터키라도 가지고 있는 듯 생각하는 건, 수호씨가 상상으로 만든 옷을 들고 가 그들에게 입어달라고 하는 게 아닐까요?

 

"저는 친구관계가 주는 행복을 너무 늦은 나이에 깨달아 버렸습니다."

 

뭔가를 깨달았으면 앞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거지, 뒤로 돌아가 남들에게 맡겨놓은 걸 달라는 듯 행동하면 안 되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A라는 사람은 고등학교 졸업 후 거의 모든 인간관계를 끊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서른쯤 되어 사람이 주는 위안과 기쁨을 발견하게 되었고, 과거에 스쳐갔던 인연 중 아직까지 연이 닿아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복원하려 했습니다.

 

A는 고등학교 동창회도 나갔습니다. 가서 1학년 때 짝꿍이었던 친구도 만났고, 2학년 때 짝사랑했던 상대도 만났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그들은 A를 반겨주며 안부를 물었고, 전화번호를 교환하며 앞으로는 연락하고 지내자는 말도 했습니다.

 

여기까지 읽은 후, 수호씨에겐 어떤 생각이 듭니까? 이제 A는 성공적으로 관계의 복원을 마쳤으니, 앞으로 진한 우정을 누리며 그 동창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 것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수호씨는 정말 순진하고 낭만적이며 대책 없이 몽상만 하고 있는 것일 확률이 높습니다.

 

단언컨대 저들 중 그 어떤 누구도, A가 오늘 당장 사고를 당해 오늘내일 한다고 해도 자기 일처럼 생각하며 병실을 지켜주진 않을 겁니다. 물론, 참 안타까운 사고를 당했다고 생각하긴 하겠지만 말입니다. 왜? 함께 한 시간과 노력과 추억이 없으니까.

 

저들은 각자 저마다의 이유로 동창회에 나온 겁니다. 그냥 외로워서 나온 사람도 있을 것이고, 물건을 팔러 온 사람도 있을 것이며, 호기심에 나온 사람, 아니면 과거에 좋아했던 사람이 나온다고 하니 얼굴을 보려고 나온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A가 그 자리에 참석하면 다들 악수하고 반갑다고 말하겠지만, 그게 정말 진심으로 반가워하며 전과 달리 앞으로는 둘 도 없는 친구로 지내자는 뜻은 아니란 얘깁니다.

 

저는 수호씨가 말하는 '관계 복원'이라는 말에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복원'이라는 말을 쓰려면 그 의미를 '다시 연락을 하고 지내는 사이가 될 수 있다는 것'정도로 써야지, 그들에게 10년 치, 15년 치의 우정을 요구해선 안 됩니다. 얼굴 보고 지내온 시간이 2년이라면 이름마저 잊고 지내온 시간은 10년인데, 거기에서 죽마고우의 우정을 찾고 있으면 곤란한 것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러 수호씨의 착각이, 이번 사건을 발생시킨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3. 수호씨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가 잘못된 건 아닙니다.

 

수호씨는 현재 제게 120%의 호감과 애정을 표현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저는 수호씨가 좋지 않습니다. 이렇다면, 저는 뭔가 잘못을 하고 있는 것이며 나쁜 사람인 걸까요?

 

수호씨가 호감과 애정을 표현한다고 해서 누구나 다 그것에 응답하거나 보답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수호씨와 과거에 가깝게 지낸 것도 아니며 그저 '같은 반'이라는 이름으로 교실을 공유했던 거라면, 상대가 수호씨의 연락에 답장을 안 해도 이상한 게 아닙니다. 그건 당연한 겁니다. 동창회에서야 몇 마디 나눌 수 있겠지만, 그 후 계속 연락을 하면 '답장 없음'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도 있는 겁니다.

 

상대가 수호씨의 계속되는 연락에 시달리다 보낸 답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와 이런 얘기까지 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의문이네. 뭘 했다고 절교 얘기가 나오지? 그리고 내가 네 문자에 일일이 답장을 해야 하는 의무가 있나 싶다."

 

전혀 틀리거나 잘못된 부분을 찾아볼 수 없는, 너무나도 당연한 반응입니다.

 

"저는 상대가 저를 싫어해서 답을 안 해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랬던 건데…."

 

상대가 수호씨를 싫어해도 이상할 게 없는 겁니다. 수호씨는, 자신이 호감을 가지고 대하는 중인데 왜 상대는 수호씨에 대해 알지도 못 하면서 싫어하냐고 묻고 싶으십니까? 그럼 저는 반대로 묻고 싶습니다. 호감을 가지고 다가오는 누군가가 있으면 그 사람에 대해 다 알 때까지 겪어야 하며, 이후 다 겪고 난 후 좋다 싫다를 표현해야 하는 겁니까?

 

"저에겐 그렇게 연락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용기를 내서 안부를 물었던 겁니다. 답장이 올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오지 않았습니다.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고, 제 기분 나쁘라고 일부러 읽곤 답장 안 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다음 문자에도 답이 없어서 저는 정말 괴로웠습니다. 문제가 있는 거라면 말해달라고 했지만 역시 답이 없었고, 저는 화가 났습니다."

 

상대의 반응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던 것과 달리, 수호씨가 하는 말은 전부 이상합니다. 상대는 수호씨의 무엇입니까? 동창? 옛 친구?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왜 그들이 수호씨의 친하게 지내려는 노력에 다 화답해야 하며 긍정적인 반응만을 보여야 합니까? 수호씨는 현재 일하고 계신 곳에서도 모든 직원들과 가깝게 지내십니까? 아니면, '남'이 아닌 '가족'들과는 좋은 관계를 맺은 채 지내고 계십니까? 이 물음에 '네'라고 대답할 수 있으십니까? 그렇게 대답할 수 없다면,

 

왜 정작 현재 가장 가까이 있으며 더 오랜 시간을 함께하고 있는 사람들과는 못 맺는 관계를, 먼 곳에서 그동안 잊고 살던 이들과 맺을 수 있길 기대하고 계신 겁니까?

 

상대의 입장에서 보자면 수호씨의 논리는 막무가네입니다. 수호씨는 '관계 복원', '옛 친구'등의 키워드를 앞세우지만, 그들이 느끼기에 그건 뜬금없이 나타나 맡겨 놓았다는 듯 우정을 요구하는 것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대놓고 "앞으로 연락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도 할 수 없으니 그저 눈치 채길 바라며 대답을 안 하는 건데, 수호씨는 계속해서

 

- 오랜만에 친구에게 연락한 건데 답이 없으니 걱정된다.

- 나를 싫어하는 거라면, 왜 나를 싫어하게 되었는지 이유만이라도 알려 달라.

- 이게 절교선언이라 해도, 이렇게 아무 말 없이 관계를 끊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맙니다. 수호씨는 '옛 친구'라는 것에 엄청난 의미부여를 하고 계신데, 그 의미부여가 저런 용도로 쓰인다면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연락 했는데 답이 없다고 '절교' 운운 하실 거면, 관계 복원이고 복구고 그냥 그대로 놔두고 들춰보지 않는 게 더 나은 것 아니겠습니까?

 

 

4. '친구관계가 주는 행복'은 온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수호씨가 발견해내고 복원 중이라는 '친구관계가 주는 행복'에 찬물을 끼얹고 싶은 건 아닙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수호씨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저는 수호씨에게,

 

ⓐ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베푸는 친절을 우정과 오해하신 건 아닙니까?

ⓑ 친구관계가 주는 행복을 느끼셨다면, 왜 돌보기보단 계속 더 발굴하길 원하시는 겁니까?

ⓒ 나이가 들어 사람들 사이에 많은 필터링이 되는 까닭에, 그렇게 느끼시는 건 아닙니까?

 

하는 질문들을 해보고 싶습니다.

 

수호씨가 '옛 친구'라는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것들을 보면, 제가 20년간 우정을 지켜온 친구에게 기대하는 것들보다 더 큽니다. 제 경우, 바보 같은 짓을 함께 하고 쓸데없는 일들로 같이 시간을 죽이기도 했던 오랜 친구가 있어도 그에게 격일로 연락하며 그가 제 고민을 다 들어주길 바라지 않습니다. 그런데 수호씨는 동창회에서 만난 친구가 조금 친근함을 표시하면 아예 그에게 기대버리지 않습니까?

 

사실 이런 부분은, 지금 우리가 이렇게 말로 이야기를 할 게 아니라, 학창시절을 보내거나 또는 사회생활을 하며 겪었어야 하는 부분입니다. 믿었던 친구가 내 뒷담화를 한다든지, 나는 가장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더 친한 친구가 따로 있었다든지, 아니면 오랜 시간 어울렸는데 새 친구가 나타나자 그 둘이 더 어울린다든지, 연애나 결혼을 한 이후로 점점 멀어지는 걸 느낀다든지, 형제보다 더 친하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내 어려움을 모른 척 한다든지, 함께 할 때 무서울 게 없었던 친구와 돈 때문에 멀어진다든지, 뭐 이런 경험들을 하며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험들이 거의 없는 수호씨는, 나이가 든 이후 친구들이 보이는 배려와 친절에 진한 감동만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건, 이제 서로 다 어른이고 하니 더 조심하고, 또 직설적인 얘기를 하기 보다는 필터링을 거쳐서 이야기 하며, 굳이 잘라내지 않고 저 구석에 '친구'라는 이름표를 붙인 채 둬도 문제가 없기에 그렇게 지내는 걸 오해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수호씨를 별명으로 부른다든가, 싸우려 든다든가, 권력관계를 형성해 함부로 대한다든가 하는 친구들이 없지 않습니까? 혹 과거에 그랬다 하더라도 지금은 좀 더 젠틀한 모습으로 대하고, 별로 안 친했어도 '나중에 술 한 잔 하자' 등의 이야기를 하며 사이가 좋은 것처럼 행동하기도 하고 말입니다.

 

제가 친구나 우정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채 아무도 믿지 말란 얘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친구나 우정이 수호씨의 삶을 책임져 줄 순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이번 일이 있었을 때 수호씨는 다른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그가 도와주길 바라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그는 수호씨가 만나자는 것도 피했고, 계속해서 같은 얘기를 반복하며 확인을 받으려는 수호씨에게 단호하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수호씨가 계속 그래버리면, 상대가 정말 박애정신을 가진 채 친구의 삶마저 감당해 내려는 사람이 아닌 경우, 수호씨를 무시하게 되거나 귀찮아하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입니다. 못 믿으시겠다면, 그에게 세 번만 더

 

"우리 친구 맞지? 우리 친구지?"

 

하는 질문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럼 "우리가 친구인 건 맞는데, 네 일은 좀 네가 해결했으면 좋겠다."라는 대답이 돌아올 수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 친구 맞지?'하는 얘기를 하며 부탁을 늘어놓거나 위안만 받으려고 하면, 그 관계가 문 닫는 건 시간문제 입니다. 그건 늘 어디 갈 때 친구 차를 얻어 타려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그런 의존에서 이제 그만 벗어나시길 진심으로 권합니다.

 

 

수호씨와 제가 오늘부터 만나 매일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를 다독인다고 해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 겁니다. 잠깐의 위안은 될 수 있겠지만, 결국 수호씨는 수호씨의 자리에서, 저는 제 자리에서 각자의 몫을 담당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수호씨가 제게 기대려 한다면, 그건 가던 길을 멈추고 휴게소에 눌러 앉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대인관계는 나무입니다. 처음엔 묘목이라 물을 주고 돌보게 되지만, 이후 크게 자라 아름드리가 되고 잎도 무성하면, 가끔 그 그늘에서 쉬어갈 수 있습니다. 비를 피할 수도 있고 말입니다. 그런데 수호씨는 누군가가 잠시 제공한 그늘에 반해, 그간 돌보지 않고 방치해둔 묘목들에 자꾸 기대려 드는 것 같습니다. 때문에 자연히 그 어린 나무는 부러지고 마는 것이고 말입니다.

 

어떤 관계가 시작되었다면, 되도록 아무 기대 없이, 그저 공양하듯 돌보는 게 수호씨나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해를 더해 나이테가 늘어 가면 그때는 잠시 기대거나 쉴 수 있겠지만, 지금처럼 '관계 복구'라는 명분을 내세운 채

 

"우리 친구 맞지? 우리 친구지?"

 

따위의 이야기만 하고 있으면 묘목들마저 다 뿌리 뽑히거나 부러지고 말 것입니다. 또, 그렇게 뿌리 뽑거나 부러뜨려 놓고,

 

"제가 죽기 전 한 번만이라도, 그녀를 보고 싶습니다."

 

라며 까닭 없이 절박해지면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둘이 밥 한 끼 먹은 적 있습니까? 상대의 생일은 아십니까? 3분 이상 전화통화 한 적 있습니까? 편지를 주고받은 적 있습니까? 상대가 어느 학교 나왔는지 아십니까? 가족관계는 아십니까? 현재 하는 일은 아십니까? 무슨 종교를 가지고 있는지 아십니까? 이 질문에 수호씨는 하나도 대답할 수 없지 않으십니까? 그럼 수호씨는 그녀를 모르는 겁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동창회에서 한 번 본 이후로 '죽기 전에….'라며 절박해 하시는 겁니까? 또, 원래 뭔가가 있다가 없어진 것도 아닌데 대체 뭘 복원하신다는 겁니까?

 

다른 이성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과거에 좋아했던 건 좋아했던 거고, 지금은 지금입니다. 각주구검이란 말 아시지 않습니까? 흘러간 건 흘러간 겁니다. 어떻게 스쳐갔던 모든 사람들과 관계를 다시 이어 좋은 사이로 지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모든 사람들이 다 수호씨에게 관심이나 호감을 가지고 살 수 있겠습니까. 역시나 또, 과거에 그냥 알고 지내던 사이였을 뿐인데 어떻게 지금 와서 다시 연락한다고 '친한 사이'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으니 수호씨 마음만 마음 대로 아프고 발굴해내는 것 없이 오히려 상대에게 이상하고 무서운 사람으로 여겨지고 마는 겁니다.

 

중요한 건 '지금' 그리고 '여기'입니다. 수호씨가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못 하고 있는 걸, 그저 친구나 우정과 관련된 곳으로 도피해 찾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시길 권합니다. 자주 만나는, 그리고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과 먼저 그런 관계를 형성해 보시길 권합니다. 그게 가능해야 '옛 친구'와의 좋은 관계 형성도 가능한 것이니 말입니다. 행운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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