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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매뉴얼(연재중)/연애오답노트

구남친과 재회는 싫고, 친구로는 지내고 싶어요.

by 무한 2016. 7. 28.

아이고, 좋은 남자 놓치셨습니다. 요즘 시대에 6년 넘게 사귀도록 한결같이 다정하고 세심하고 자상한 남자는 ‘멸종위기 1급 보호종’보다 찾기 어려운 법인데, ‘조건’과 관련해 좀 모자란 부분이 있다고 종지부를 찍고 마신 게 참 안타깝습니다.

  

물론 L양의 고민을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지금 둘이 가진 돈을 모아도 수도권 아파트 전세 하나 들어가기 벅찬데….’

‘결혼해 살면서도 남친이 자기 집에 돈 보태야 한다고 하는 거 아닐까….’

  

그럴 수 있습니다. 결혼해서 서로 얼굴 보며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순 없는 법이니, 냉정하게 생각하면 헤어지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추운 겨울이 왔을 때, 다이아 반지 없이는 버텨도 장갑 없이는 버티기 어려운 것 아니겠습니까.남친은 투박한 벙어리장갑 같은 사람이었는데, 반짝이지 않는다고 해서 이별을 고하신 게 전 못내 아쉽습니다.

  

  

1. 똑똑한 여자가 빠질 수 있는 함정.

  

전 똑똑한 사람은 아닙니다만, ‘무얼 선택하면 어떻게 될지’에 대한 직관은 좀 있는 편입니다. 때문에 팀을 꾸려 한창 공연을 하러 다닐 때에도 선곡이나 컨셉은 제가 고르곤 했는데, 한 번도 입상에 실패한 적은 없습니다.운이 좋아 대상까지 받은 적도 있고 말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얼마쯤 지난 후 팀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듣게 되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건

  

“독단적이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은 무시당하고 자기가 하려는 것만 주장한다.”

  

라는 이야기였습니다.제 입장에서는 ‘입상할 수 있는 공연, 인기를 끌 수 있는 공연’을 생각하며 선곡하고 연출했던 건데, 팀원들은 자작곡 발표나 비주류의 음악을 가지고 공연하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저는 저 나름대로 억울해

  

‘그럼 선곡할 때 주장을 강하게 하든가 하지, 그땐 왜 가만히 있었지?’

‘상 탈 거 다 타놓고 이제 와서 하고 싶었던 음악이 아니라고 하네?’

‘따로 공연했을 때 본인이 선곡했던 음악으로는 상도 타지 못했으면서….’

  

하는 생각도 했는데, 따로 공연했던 팀원은 그냥 그 나름대로 즐기며 만족하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제 기준에서 보자면 실패였지만,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성공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쉽게 바뀌는 게 아니라서 저런 일들을 겪은 후 제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할 순 없지만, 반쯤은 양보하며 상대의 의견도 내 의견만큼이나 무게가 있다고 생각하려 노력하며 살고 있습니다. 메뉴를 고르는 것에 빗대 말하자면, 전 밖에서 동태찌개나 콩나물 국밥 같은 걸 돈 주고 사먹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중 하나지만, 지인이 그게 먹고 싶다고 말하면 같이 갈 줄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전까진 스토리텔링을 사용해서라도 다른 메뉴를 더 먹고 싶게 만들어 제가 생각하는 ‘옳은 선택’쪽으로 이끌곤 했습니다.

  

연애 사연을 읽다 보면, 똑똑하거나 직관이 뛰어난 사람들이, 제가 저질렀던 일들과 비슷한 일을 저지르는 걸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쪽의 기준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려 들며, 상대의 의견 같은 건 ‘잘 몰라서 하는 소리’정도로만 여기고 마는 것입니다. 아직 좀 생각이 말랑말랑할 때 누군가

  

“넌 너무 독단적이야.”

  

라는 이야기를 했다면 돌아볼 수 있었을 텐데, 아무도 그런 얘기를 한 사람이 없었기에 머리가 굵어버리진 지금은 반발이 있으면 무조건 쿠데타로 여기며, 합리화나 정당화를 통해 자기변호만 하고 맙니다.때문에 상대는 상대대로 답답해지고, 이쪽은 이쪽대로 억울해지게 될 뿐입니다.

  

L양과 상대의 연애에서, ‘상대의 의견’이 얼마나 존중받았는지를 한 번 돌아보시길 권합니다. 상대는 자신의 생각을 풀어 놓을 기회가 없이 L양의 추궁이나 재촉에 답을 해야 했던 건 아닌지, L양이 ‘최선의 해결책’이라 말하며 그에게 따를 것을 종용했던 것이 L양 혼자서 낸 답은 아니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2. 호의와 배려만 다시 받고 싶어 할 때 발생하는 문제.

  

상대를 놓칠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해 다시 만나고 싶어 하는 것도 아니고,

  

- 조건 때문에 결혼상대로 별로라는 걸 알지만 그 사람만큼 다정하고 세심하고 자상한 사람 없어서.

  

라는 이유로 친구로 지내고 싶다고 말하는 건 이기적인 일입니다. 조폭영화에 흔히 나오는 대사에 비유하자면 밥은 거기서 먹고 충성은 다른 데서 하겠다는 건데, 세상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걸 흔쾌히 허락해줄 사람이나 단체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운이 좋아 상대와 ‘친구’로 지내게 되더라도, 친구인 그에게 연애할 때의 호의와 배려를 기대할 순 없을 것입니다.그건 L양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구남친에게 연락했던 거의 모든 여성대원들이 경험한 일입니다. 그녀들은 대개 상대의 차가운 모습에 이쪽이 불평을 하게 되거나, 전과 달리 무슨 얘기를 해도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것에 분노하게 됩니다. 그러다

  

“내가 괜한 기대를 한 것 같네. 이렇게 지낼 거면 그냥 연락 안 하고 사는 게 낫겠다.”

  

따위의 얘기로 상대에게 상처나 한 번 더 내려 시도하다 끝나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말입니다.

  

전 L양이 상대에게 연락해보겠다는 걸 말릴 생각은 없습니다만, 그 연락을 ‘그 시절 그 사람’이 받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다시 전화만 하면 아무렇지 않게 그가 이름을 불러줄 것 같고, 만나서 얼굴 보면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은 L양의 상황에 놓인 대원들이 자주 하는 착각입니다.

  

L양은 상대의 한계를 규정하며 이별을 말했고, 이후 두 사람은 1년 넘게 연락을 하지 않았으며, L양은 다른 연애도 한 번 했다가 마친 상황입니다. 계절은 네 번이나 변했고 말입니다. 이건 지난주에 싸운 뒤 이번 주에 화해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일이니,큰 기대를 걸고 연락했다가 그게 모두 실망으로 치환되는 경험은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3. 꼭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문제.

  

세상 그 누구를 데려오더라도 몇 가지 단점은 금방 찾아낼 수 있습니다. 성실하지만 센스가 없다거나, 다정하지만 돈이 없다거나, 돈도 많고 센스도 있지만 바람기가 있다거나, 남들이 다 부러워할 남친이지만 그에게서 존중을 찾아볼 수 없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상대에 대해서만 그렇게 따지다 보면, L양은 누구를 만나도 불만족하며 언제나 자신이 참아가며 연애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될 수 있습니다. 구남친과 사귈 때를 보면 L양은 자신의 연애관이나 결혼관에 상대가 미치지 못하는 부분을 보며 불만족스러워했는데, 그게 L양 기준에서 봤을 땐 그럴 수 있겠지만, 기준이 다른 사람이 보기엔 상대가 정말 좋은 남자 일 수 있습니다.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보다 ‘우리의 교감’을 더 높은 순위에 둔 사람에겐 그가 만점짜리 남자일 수 있으니 말입니다.

  

일부러 현실과는 먼 곳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상대 정도면 사실 월급이 적은 것도 아니고, 대책이 없다거나 불성실한 것도 아니며, 가족들까지 책임지느라 모으기 시작한 게 좀 늦은 거지 엉뚱한 소비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L양이 많이 버는 거고, L양이 많이 모은 것이며, L양이 고속도로를 탄 듯 잘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L양은 본인 회사의 사람들과 남친을 비교했을 때 남친이 초라하게 느껴졌다고 하는데, 그건 상대적으로 그런 거지 절대적으로 봤을 땐 남친이 다니는 회사를 못 들어가서 안달 난 사람이 줄을 서 있을 정도입니다.

  

또, 사귈 때의 데이트 비용 역시 6:4 정도로 상대가 더 많이 부담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L양 남친이었다면 뚜껑이 열렸을 것 같습니다. 사귀면서 돈도 내가 더 많이 쓰는데 초라한 남자가 되어야 하고, 물론 장난이지만 L양으로부터 ‘오빠랑 결혼하면 고생할 게 뻔하다’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어야 하니 말입니다. L양은

  

“제가 장난으로 자주 그랬었는데, 어느 날은 오빠가 굳은 표정으로 그만 하라고 하더라고요.”

  

라고 했는데, 그건 정말 그가 보살에 가까운 인내심을 가지고 있기에 그 정도로 참고 거기서 그친 거지, 저라면 앞으로의 대화는 내 변호사와 하고 집에 가서 내용증명 기다리라고 했을 것입니다.(응?)

  

L양은 상대가 L양과 평생을 함께 할 생각을 하며 옆에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L양도 그럴 생각을 하고 있으니 쌤쌤인 거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L양은 상대 여동생 결혼할 때에도 ‘이 사람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라는 생각에 불참하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괜히 연을 맺고 싶지 않다며 상대의 지인들을 만나는 것도 꺼렸고 말입니다.

  

L양의 남친이 제 지인이었다면 저는 그를 불러 축배를 들었을 겁니다.

  

“잘 헤어졌어. 이제는 너를 너라는 사람 자체로 봐주는 사람이랑 만나서 행복한 연애해. 남들과 널 비교하며 초라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랑 만나지 말고. 자기 잘난 것만 알며 할 도리는 하나도 하지 않으면서 불평만 하는 사람을 뭐하러 만나. 6년 넘게 만나며 부모님과 식사 한 번 할 수 없는 사람과는 안 만나는 게 나아. 그러면서 결혼하면 한강 보이는 아파트에 살아야하네 어쩌네 하는 얘기만 하고 있잖아. 걔는 한강 사는 애랑 만나서 살라고 두고, 너는 이제 너대로 재미있게 살아.”

  

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말입니다.

  

상대는 L양과 사귀며, 과연 어떤 기쁨과 즐거움을 누렸을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L양이 상대에게 했던 말과 행동들을, 반대의 상황에서 상대가 했다면 L양은 어땠을지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랬다면 자존심 강한 L양은 상대의 따귀라도 올려붙였을 것 같은데, 상대는 그 모든 것을 참아가며 그저 웃음으로 넘기지 않았습니까? L양은 제게

  

“서로 미워하고 소리지르며 싸우다 헤어진 게 아니라서, 그가 이렇게 보고 싶은 걸까요?”

  

라고 하셨는데, 그건 그가 ‘좋은 남자’였기에 보고 싶은 걸 겁니다. L양은 그런 그의 ‘좋은 점’에 대해 칭찬하기보단, L양의 기준에서 봤을 때 부족한 점을 계속 들쑤시며 그를 고문했던 것이고 말입니다. 언젠가 L양이, 그가 얼마나 L양을 사랑했었는지를 깨닫게 된다면, 그땐 헤어지고 나서까지도 L양 편하고자 그저 그를 ‘친구’로 다시 두려했던 것까지 전부 미안해질 거라 저는 생각합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연애를 할 때에는 L양이 생각하는 목적지만을 거듭해서 말할 게 아니라, 상대가 생각하는 목적지도 들어봐야 합니다.결혼이라면 어디서 무얼하며 어떻게 함께 살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야지, 내가 바라는 것들을 말하며 거기에 맞출 수 있냐 없냐만 물어선 곤란합니다.

  

이별은, 많은 것들의 유효기간을 지나게 합니다. 기백만원짜리 세계여행 티켓을 소유하고 있었다 해도 유효기간이 지나면 종잇조각에 불과하듯, ‘그 시절 그 사람’이 어땠든 이별 후엔 그게 아무 소용 없어질 수 있습니다. 때문에 연애할 때 봤던 상대의 장점 중 몇 가지만 취사선택해 이별 후 이어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우며, 이쪽이 다른 사람 만나봤지만 별로였다며 다시 돌아가고 싶다 해서 쉽게 돌아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건 애끓는 마음이 있어도 어려울 수 있는 것이며, 인터넷 쇼핑 묶음배송 문의글 남기듯 남겨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L양 편에 서서 좀 더 이야기를 하자면, L양이 확실하게 마음을 먹어야 모든 것이 명료해지며 뭐가 돼도 될 것이란 얘기를 해주고 싶습니다.정말 운이 좋아 구남친과 친구로 지내게 되더라도, 그에게 일상공유와 감정해소를 맡겨두면 새로운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만들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 새남친을 사귀더라도, 구남친에 대한 기억을 내려두지 않는다면 역시나 비교하며 새남친에 대한 불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이 힘들고 답답하긴 하겠지만, 그건 이별 후 어쩔 수 없이 겪어내야 하는 L양의 몫이라는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모쪼록, 힘내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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