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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매뉴얼(연재중)/천오백자연애상담

전 성격적 결함이 많은 여잔데, 재회하고 싶어요

by 무한 2017. 5. 24.

P양이 보낸 신청서는 ‘자기학대’에 가까운 반성이 8할을 차지하고 있다. 연애 중 자신이 얼마나 상대에게 함부로 굴었으며, 상대에게 부린 심술과 재촉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연애 이외의 부분에서도 자신이 상대와 비교했을 때 어떤 지점에서 형편없었는지가 빼곡히 담겨 있다.

 

 

 

그런 반성만으로 연애 중 벌였던 일들이 전부 초기화 될 수 있으며 이제 다시 만나 ‘잘해주고 싶은 마음’으로 행복한 연애를 할 수 있는 거라면, 난 이런 매뉴얼을 대신

 

- 심층반성 4주 완성.

- 108배하며 내 단점 108개 찾기 과정.

- 반성문 쓰며 배우는 반성법.

- 브레인스토밍이 가능한 그룹반성코스.

-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종교 반성반.

 

등의 강의 같은 걸 하고 있을 것 같다. 저는 야근한 남친에게 절 보러 안 오면 헤어질 것처럼 협박한 적 있습니다, 아멘. 저는 남친 앞에서 돈 많은 남자랑 결혼해 고생 그만하고 싶다고 말한 적 있습니다, 주여. 저는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남친이 사온 케이크 집어던지고 무릎 꿇게 한 적 있습니다, 아버지.

 

 

연애 중 ‘갑질’했던 것에 대해 뼈아프게 반성하는 중이라는 대원들을 보면,

 

- 그랬던 것을 반성하기에 이제는 내가 상대에게 받았던 사랑을 상대에게 해주고 싶으며, 입장이 뒤바뀌어 내가 을이 된다고 해도 괜찮다.

 

라는 이야기를 공통적으로 하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서 상대에게 울며 매달리기도 하는데, 그걸 또 가만히 보면

 

- 내가 을이라도 되겠다고 했던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인 경우가 많다.

 

- 난 내가 달라졌다는 걸 보여줄 건데 그러는 동안 네가 다른 여자 만나면?

- 내가 연락하는 것도 이젠 부담스러워? 날 사랑하지 않으니까?

- 사람이 이렇게까지 하면 여지라도 좀 보여야지….

 

‘을질’이라고 할까. 저런 마음으로 또 상대를 괴롭히고 마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그냥 또 이래버릴 거라면, 앞서 했던 ‘자기학대’에 가까운 반성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 아닐까? 언젠가 소개한 적 있는 <일진의 반성>이라는 다큐에서도, 그 일진은 자신이 학창시절 괴롭혔던 친구들을 찾아가 ‘사과하고 싶다. 만나달라’고 요구했었다. 하지만 그에게 당했던 친구들이 끔찍한 기억 때문에 만남조차 거부하자, 그는

 

“전 좋은 마음으로 온 건데 저러니까 짜증나요.”

 

라고 말했다. 과거에 친구를 때리면 찰싹찰싹 소리 나는 게 재미있어서 때렸다며 후회하고, 한 시간 가까이 친구를 때리다 손이 아파서 빗자루로 때렸던 것을 반성한다면서, 자신은 이제 사과하려 하는데 친구들이 연락도 제대로 안 받고, 밖으로 나와서 얘기 좀 하자는데 안 나오니 열 받는다는 것이다.

 

“무한님이 다른 매뉴얼에서 그랬잖아요. 눈물로 호소하거나 징징거리지만 말고, 마음의 빚을 갚는다는 생각으로 꾸준히 상대를 정성스럽게 대하며 감동시키라고요.”

 

P양의 사연에 ‘꾸준히 상대를 정성스럽게 대하며 감동시키는’ 부분이 있는가? P양의 말은, 당장 그러겠다는 게 아니고 상대가 100% 호의적인 태도로 P양의 정성을 받아줄 것 같으면 그때 시작하겠다는 것인가? 그럴 마음이 있긴 하지만 상대가 재회에 대해 부정적인 것 같으면 어차피 다시 못 만날 거니까 정성을 들이긴 싫은가? 나중에라도 다시 사귈 수 있을 것 같으면 상대에게 받은 것들을 갚아나가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나 혼자 고생하는 거니까 그냥 안 되는 거라 생각하며 놓겠다는 건가?

 

내가 얘기했던 건 꼬리 내리고 몇 주 선연락 하다가 ‘나에 대한 마음이 없는지’를 물으라는 게 아니었고, 재회라는 분명한 목적을 지닌 채 잠깐 상대를 접대하듯 모시라는 것 역시 아니었으며, 이전과는 달라진 것처럼 얼마쯤 연기하다 어느 날은 못 참겠어서 ‘다른 여자 만날 거냐’고 물으라는 것도 아니었다.

 

 

‘난 좋은 마음으로 재회를 원하는 것이며 잘못한 것들을 사과하고 싶은 건데 왜 넌 안 받아주냐’는 것은 또 다른 강요이며, 다른 형태의 이기적 모습일 뿐이다. 그건 여전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자는 것이며, 내 죄책감과 미련, 후회 등을 해결하기 위해 상대를 움직이려 드는 것 아닌가. 내가 얘기한 건 P양이 상대에게 원하는 것도 없고 아쉬울 것도 없는 상황일 때에도 상대를 은인으로 여기며 빚을 갚는 마음으로 대해보라는 거였지, 바라는 걸 잔뜩 품은 채 일단 무조건 퍼주거나 저자세만 취하란 게 아니었다.

 

두 사람이 운 좋게 재회를 하더라도, 해결된 건 하나도 없는 까닭에 두 사람이 ‘우리가 왜 헤어졌었는지’를 다시 깨닫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 수 있다. 연애 중 P양은 하루하루를 감당해가는 것이 힘들다며 매번 남친에게 자신의 기분을 풀어줄 것을 요구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P양의 하루하루는 힘들지 않은가. 게다가 P양이 이전과는 달라졌다는 걸 보여주려 일부러 반대로만 행동하면, 거기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P양을 질식시킬 수 있다. P양이 재회를 원하는 건 과거에 상대가 보여줬던 보살핌과 헌신 때문인데, 다시 만난 그가 냉정한 표정으로 읽씹과 단답 정도만을 할 뿐이라면 P양은 상대의 눈치나 보는 노예생활밖에 할 게 없지 않겠는가.

 

P양은 당장 을의 입장에서 밖에 상대를 만날 수 없는 거라 해도 어쨌든 상대가 남친이란 이름으로 옆에 있어야만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먼저 거기서 벗어나야 재회든 다른 연애든 가능하다. 내 삶을 그저 짐처럼 여긴 채 혼자 끙끙 앓다가 ‘남친’의 자리에 앉는 사람에게 이것 좀 들라고 할 생각을 하지 말고, P양 자신의 삶에 행복도 있고 즐거움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연애를 하더라도 한 쪽이 힘들어 할 때 다른 한 쪽이 그걸 나눠줄 수 있는 거지, 그게 안 되면 매번 연인에게 의존하고, 연인을 감정의 종말처리장으로만 사용하는 관계를 반복할 수 있다.

 

사과를 하더라도 용서는 상대의 몫이니, 거기까지 기대하거나 요구하지 말고 P양의 몫만큼만 하자. 재회하면 분명 달라질 거라는 말로 상대를 설득시키려고만 애쓰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매달리고 징징거리고 상대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그 모습을 거두자. 상대에게 안부인사를 하면서도 그걸 받는 상대의 태도가 예전 같지 않다며 ‘부담스러워? 이젠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하며 우울의 끝을 달리지 말고, 그저 상대를 은인이라 생각하며 P양의 몫만큼만 안부를 묻는 거라 생각하자. 이게 P양이 생각하기에 ‘놓는 것’같다면, 난 놓는 게 맞다고 대답하도록 하겠다.

 

P양의 죄책감과 후회를 지우고자 그의 말을 무시한 채 계속 P양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건, 또 다른 욕심이며 끝까지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에 불과하다. P양의 경우 상대가 ‘종종 연락하며 가끔 보자’는 이야기를 한 상황이니, 그가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 인연 끊은 채 남으로 살 수 없을 것 같다면, 그가 말한 정도의 관계를 유지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러는 동안, P양은 스트레스와 우울만 쌓여가는 듯한 일상을 청소하고, 작더라도 행복과 기쁨들을 마음 곳곳에 채워두는 연습을 하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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