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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매뉴얼(연재중)/천오백자연애상담

고시생 여자의 짝사랑. 친구들은 ‘기승전그남자아니야’ 래요.

by 무한 2018. 2. 3.

M양은 일단, 소설을 끊자. 픽션을 자꾸 보면서 현실에서의 남자들에게 그런 이미지를 씌우면 괴상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 내가 요즘 <팡세>를 다시 읽고 있다고 하면 M양은

 

“오오옷! 파스칼 좋죠!”

 

라고 할 것 같은데, 난 <팡세> 말고 <갑옷 곤충세계의 최강자! 장수풍뎅이 VS 사슴벌레>도 읽고 있다.

 

아, 저걸 두고도 어쩌면 M양은 ‘오오옷! 무규칙이종독서법!’이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그거 말고 난 <화난 등근육 만들기>같은 영상이나 <광어회 뜨는 법>같은 영상도 보고 있다. 안경 코 받침 고무가 떨어졌는데 딱 맞는 사이즈의 여분을 파는 곳이 없어 수소문 하는 중이며, 백팩 큰 거 하나 사려고 하는데 온라인으론 사이즈를 확실히 알 수 없어 아울렛 가서 골라볼까 생각 중이다. 불면증 때문에 멜라토닌을 좀 먹을까 했는데 그게 직구가 막혔다고 해서 다른 걸 알아보는 중이며, 해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렌즈 지름신이 와서 50미리 렌즈를 추가 영입할 생각을 하고 있다.

 

 

 

내가 저 묻지도 않은 얘기를 구구절절 늘어놓은 건, 사람이라는 게 달라 봐야 크게 다르지 않으니, M양 스스로를 깍두기로 생각하며 타인에 대해 너무 큰 환상을 갖지 말잔 얘기를 하기 위해서다. 누군가가 장정일 소설의 첫 문장

 

“내 나이 열아홉 살, 그때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타자기와 뭉크화집과 카세트 라디오에 연결하여 레코드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턴테이블이었다.”

 

와 같은 얘기를 한다고 해서, 그에 대한 오래된 단풍나무 책상의 이미지를 만들어 거기에 빠지면 곤란하다. 저건 그냥 그의 만 가지 모습 중 하나를 고르고 골라 얘기한 거라 여기면 된다. 저런 이야기를 한 상대의 마음속엔

 

“내 나이 열아홉 살, 그때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아이패드와 문화상품권과 TV에 연결해 플레이할 수 있는 엑스박스였다.”

 

라는 생각도 함께 들어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M양이 내게 어떤 가수를 좋아하냐고 물으면 난,

 

“최근 해질녘에, 이어폰을 끼고 걸은 적이 있어요. 전날 내린 눈이 녹질 않아서 천천히 걷는 중이었는데, 육교 위로 해가 떨어질 때 박효신의 <그곳에 서서>가 나왔어요. ‘그냥 함께 갈 거야. 네가 빛이었으니. 어차피 너 없는 나는 나 아닌 거니’하는 부분이 나올 때, 이유는 모르겠는데 뭉클하며 코끝이 찡해지더라고요. 그래서 그 이후로, 걸을 땐 박효신 노래를 모아 듣는 중이에요.”

 

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저 얘기는 M양에게 대답해주기 위한 멘트에 더 가깝고, 사실 난 요즘 “아기 상어 뚜 루루 뚜루~”하며 돌아다니고 있다. <상어 가족>이라는 동요인데, 이상하게 중독성이 있어서 계속 부르게 된다.

 

내 대답을 두고 나에 대한 이미지를 만든 M양은, 이후에도 계속 박효신 얘기를 하려 할 수 있다. 카페에 갔는데 박효신 노래가 나왔다거나, 박효신 콘서트 소식을 보고 생각이 났다거나 하며 말이다. 그것 외에 내가 영화나 미드, 노래, 책, 커피 등에 이야기를 하면, 날 ‘그런 것에 대한 마니아적 인간’이라 생각하며 그걸 주제로 이야기를 하려 들 수 있다. 심남이에게 그랬듯이.

 

난 M양이, 저 지점부터 좀 수정을 했으면 한다. 첫 단추를 저렇게 끼운 후 시작을 하니 M양은 자꾸 상대 팬클럽이 되어 상대 인터뷰를 하려 들며, 어쩌면 상대는 그다지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은 지점들이 대화주제로 잡히고 마는 것 같다. 게다가 상대가 살짝 센치한 날 그냥 좀 무게를 잡으면, 그걸 두고도 상대를 ‘그런 형태의 인간’으로 정의하고 마는 까닭에, 다음 대화에서도 당연히 상대는 그 상태일 거라 여기며 대화를 시작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고 말이다.

 

“흠…, 무한님은 매뉴얼을 통해서,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상대 자체에 관심을 두라고 하셨잖아요. 저는 그래서 그랬던 건데….”

 

내가 그 얘기를 한 건 맞는데, 그건 ‘얼른 상대와의 연애가 시작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만 꽂혀 있는 대원들에게 한 이야기였다. 그런 대원이 아닌 M양처럼 상대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고 의미부여를 하며 환상을 갖는 대원들이 그래 버리면, 오히려 상대를 스타로 설정하곤 그의 100문 100답을 읽고는 그것에 대한 이야기만 하려 드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리고 난

 

-연애만 생각하지 말고 상대라는 사람 자체에도 관심을 둘 것.

 

이라고 말한 거지,

 

-상대에게만 관심을 두고 그에 대해 캐묻거나, 상대를 종교로 생각하며 신도가 될 것.

 

이라는 얘기를 한 게 아니다. 그걸 오해해

 

“오빠 근데 여기 가봤어요?”

“오빠 이 웹툰 봤어요?”

“(사진)오빠가 말한 책에 나오는 구절 좋네요.”

“영화요? 무슨 영화 봤어요?”

“오빠 공부 잘 돼가요?”

“특별히 먹고 싶은 거 있어요?”

 

하고 있으면 곤란하다.

 

위에서 이야기 한 부분들 외에 -이건 M양이 아무래도 현재 꽤 오래 시험준비를 해 온 상황이라 그럴 수 있는데- 아직 이십대 중반밖에 안 되었으면서 자꾸 삼십대 후반은 된 듯한 마음으로 자신과 자기 삶을 회의적으로 바라보진 말았으면 한다. 고시를 오래 준비하던 대원들 중엔 ‘남들은 다 사회에서 자리 잡는데 난 늦은 지금에도 또 1년 더 공부해야 할 것 같다’며 스스로를 잉여분이라 생각하는 함정에 빠지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경우 자신이 상대에게 말을 거는 것 자체가 민폐라고까지 생각할 수 있다.

 

자꾸 친구나 내 또래의 사람들과 나를 비교할 필요 없으며, 나는 내 템포 대로 간다고 여기는 게 좋다. 큰 그릇을 만들려면 더 시간이 걸리는 것 아니겠는가. 또, 고음 안 올라간다고 해서 노래 못하는 거 아니고 작곡을 못 한다고 해서 진정한 가수가 아닌 것도 아니니, 권위자든 뭐든 누가 하는 소리에 겁먹곤 그 말에 갇힐 필요도 없다. 강한 멘탈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도 남의 평가나 비교에는 겁쟁이가 될 수밖에 없으니, 힘들 땐 소설가 박민규의 <조까라, 마이싱이다!>라는 칼럼을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M양은 ‘읽씹이 두 번 등장했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연락을 더 해야 하나요, 말아야 하나요?’를 물었는데, 난 그것에 대한 대답보다는 ‘그렇게 된 이유’에 대해 긴 설명을 한 것 같다. 그건 연락의 빈도보다는 내용에 문제가 있어서 벌어진 일이니, 지금까지 얘기한 부분들을 수정하면 앞으로는 첫단추를 잘 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상대에게 연락하는 건, 내 경우 아무리 호감 가는 상라고 해도 내 얘기에 귀 기울이지 않으며 읽씹을 할 뿐이라면 더는 연락하지 않는다. 세상엔 다른 좋은 사람도 많은데, 굳이 거기서 아쉬워하느라 시간을 다 보낼 필요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상대로부터 새해인사라도 온다면 이어서 대화해볼 순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쪽이 또 안부 물어가며 억지로 대화를 이어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자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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