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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긴팔 티셔츠를 입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선선한 날씨가 되었다. 이제 선풍기와도 서먹서먹한 사이가 될 걸 생각하니 발가락으로 버튼 눌렀던 일이 괜히 미안해진다. 가을의 입질에 마음은 낭창낭창. 착륙할 곳을 배정받지 못한 커서가 이리저리 기웃댄다.

연락이나 호출을 생략한 채 누군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미니홈피, 참 좋은 서비스다. 사회로 쏘아져 나간 후 생사와 근황을 알 수 없는 이 사람 저 사람의 공간에 들른다. 광어는 올해 초 태평양엘 다녀왔고, 거기서 Orange Roughy와 찍은 사진을 자랑스레 올려놨다. 도다리는 카메라 동호회에서 만난 여자친구 가자미양과 여기저기 여행 다니며 즐겁게 사는듯하다. 멍게는 우리가 함께 다니던 고등학교의 교사가 되어 치어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멍게가 교사라니! 멍게와 나도 아직 꼬꼬마 같은데!

또래의 녀석들이 어른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건, 뭐 새삼스레 이야기 할 것도 아니지만, 나는 이 과거의 녀석들과 현재의 녀석들에 대한 괴리감을 오랜 시간 그냥 '방치'해 두고 있었다. 그러니까, 고교시절 공연하기 위해 내가 만들어 온 반주 CD가, 배속을 잘못 정해 학교 방송도구로 재생할 수 없게 되자, 2층 방송실 창문을 열고,

"야, 너, 방송이 장난이야?"

라고 내게 소리친 어느 선배처럼, '어른인 척'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 선배에겐 미안하지만, 난 지금까지도 내가 살고 있는 것이 '장난'이라 생각한다. 장난이 아니라면, 살기 위해 계속 뭔갈 해야 하는 이것은 차라리 형벌 아닌가. 군대에선 군인놀이, 회사에선 회사원놀이, 블로그를 하면서는 블로거놀이. 이건 오랜 시간 하는 다방구고, 오랜 시간 하는 돈까스며, 오랜 시간 하는 얼음땡 아닌가. 지구 위에 에펠탑보다 오래 서 있지도 못하면서 심각한 얼굴을 하는 건 왜인가?

누군가, "인생은 짧고, 다방구는 길다."라고 얘기한다면 나도 동의한다. 요즘 애들이 다방구를 안 한다고 해도, 다방구 보다 늦게 태어났고, 열아홉 살에 아버지차를 몰래 몰고 나가 다방구 보다 먼저 떠난 내 친구 Y가 있으니, 적어도 Y보다는 다방구가 길다.

편안한 자리에서 녀석들을 만나면 다시 데덴찌나 할 줄 알았는데, 하나 둘 긴장을 풀어 봐도 녀석들은 술래의 얼굴을 지우지 않는다.

"나, 네 블로그 들어가 봤다. 너 책도 냈더라?"

지문방지 보호필름 같은 걸 마음에 딱 붙여 놓고는 나에게도 터치만 하려 한다. 처세라는 가면과 대인관계에 대한 강박, 사회적 잣대라는 측정도구들은 다 어디서 얻은 거냐? 내가 모르는 곳에서 공동구매라도 했던 거냐?

그래도 다행히 절망할 정도는 아니다. 아직 앞다리가 나지 않은 올챙이들도 옆에 있으니 말이다. 시간이 지나 "언제까지 올챙이로만 살 수는 없잖아. 나도 개구리가 되어야지."라며 뭍으로 뛰어 나갈지도 모르지만, 그렇더라도 난 여기 있으련다. 한 여름 함께 했던 선풍기와 서먹서먹 해지는 것이 아쉬워, 선풍기와 함께 창고로 들어갈 순 없지 않은가.

그 마음으로 이번 여름과 함께 가는, 선풍기에게 손을 흔든다.





▲ 광어, 도다리야, 깝치지 마라. 청상아리, 돌고래에도 인사를 해야지. (이상화의 시를 흉내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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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BI2010.09.14 17:1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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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내년이면 반갑게 볼 선풍기이잖아요~
보고싶어도 볼 수 없는 것보다는 어김없이 내년이면 만날 수 있다는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ㅎㅎ

A Happy Warrior2010.09.14 18:4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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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통째로 외우고 친구에게 읊어주곤(?) 했었는데
이젠 가물가물 하네요 ㅜ.ㅜ

직장인 놀이에 너무 빙의한 탓이겠죠~

오늘 글은 웬지
차버렸던 이불을 끌어올리게 하는,
창문으로 슥 들어온 첫 가을 새벽공기 같네요..^^a

늑대회원2010.09.14 19:0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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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도 놀이나름인데
살면서 역할이 너무 많아지는것 같아요.ㅋㅋㅋ
그래도 놀이라 생각하면 한결 낫군요.

요하2010.09.15 00:0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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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세와 대인관계 같은 것들이 왜 반성해야 할 일인지..;;(어떤 댓글)

전 그냥 살아가는 지혜라 받아들이고 싶네요.

내일도 즐거운 인생놀이를 지혜롭게 헤쳐나가길 기원합니다!^^

전북의재발견2010.09.15 00:1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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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인생은 놀이, 잘 놀줄 아는 사람이 승리하는건가요?^^ 재밌는 글 잘 읽고 갑니다.

보라순이2010.09.15 00:3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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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짜 무슨글을이렇게 맛깔나게쓰신대요 ㅠㅠㅠㅠ 완소글 잘읽고갑니다

완주스토리2010.09.15 00:5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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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많은 생각이 드는 글 재밌게 읽고가요. 인생을 놀이로, 너무 심각하게 의미두지 않는 마음... 가끔 필요한 것 같네요.

수영강사랑사랑하고픈뇨자2010.09.15 01:1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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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너무 잘쓰신다.
문장력이 정말 좋으신거같아요!
매번 느끼지만 읽고 또읽고 갑니다~

교과서에나 실릴법한 글이라 머릿속에 익혀두고,
하나씩 꺼내쓰려고 종종 익히고 갑니당 ^ ^

봄이다2010.09.15 09:3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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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잣대에 진저리치면서도
어느순간엔 나조차도 잣대를 들고있는걸
발견할 때마다 흠칫.

그래서 해외유학간 친구들이 안 돌아오나봐요.
외롭고 힘들어도
적어도 거기선 이러쿵저러쿵 비교당하는 일이
훨씬 적으니까..
명절때 친척들이 한마디씩 하는 것 들으면서
가슴 후벼파이지 않아도 되구요..

산들산들2010.09.15 10:1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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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두 오늘 회사원놀이중인데..
가을바람에 백수놀이가 그리워지네요.. ^^

근데.. 요즘은 왜이리 연애놀이가 힘이 드는건지..
그사람 한마디에 속이 상하고 며칠째 냉전중인 저희
먼저 다가갈려다가도 자꾸 속이 상해서 멈칫하고 있는중인데

이번주말엔 등산이라도 다녀와야할거 같아요..

2010.09.15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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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댓글입니다

지원♥2010.09.15 15:1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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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읽고 도망가기만 했는데..
아...이번글은..왠지 눈물이 핑도는 이유가 뭘까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깡이2010.09.15 16:1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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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간만에 들렀네요..
요즘 먹고 살기 너무 바빠서...ㅠㅠ

네쇼날동네그래픽 글이 간만에 올라왔네요..^^*
저는 아직도 올챙이인데
저 빼고 모두 벌써 애 둘씩 낳아 기르는 엄마, 아빠가 되어 있는
친구들을 보고 있노라면
저만 개구리로 탈피를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무한님도 저랑 비슷한 올챙이로 아직 남아 계시다니 반가울 따름입니다. 하하하

오늘 글은 힘든 인생에 그래도 힘이 부쩍 나게끔 하네요.^^
안그래도 일에 공부에 너무 치여서
만득이 200마리가 양쪽 어깨에 올라타 있는 거 같아서..
어깨를 너무 축 늘어뜨리고 다니는 거 아닌가 했는데
힘내서 만득이들 툭툭 털어버리고 씩씩해지렵니다..
고마워요 이런 글!!

덧: 근데 다방구 데덴찌가 뭔가요..-__-;;;
왠지 일본말 같은 느낌만 들고.. 전 모르겠네요..;;

늑대회원2010.09.15 20:4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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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 다방구는 술래잡기 같은거..
데덴찌는 뭐.. 뒤집어라엎어라(편가르기..)..였던가..
가물가물.,..
전 그렇게 아는데요.-ㅁ-

Sonagi™2010.09.15 16:4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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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선선하네요~
그러고 보니 무한의 노멀로그를 알게된것도 1년이 훌쩍 지났군요~
지난해 추석을 지내고 야콘농장 농활을 갔던 추억도 있고 ......

..
방치 한건지는 모르지만 대인관계란게 참 가끔은 부질없어 보이기도 하고
멈추면 왠지 숙제하지 않은 꼬꼬마의 마음처럼 불안하기도 한거죠~

문득 참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친구들 생각이 날법한 시절이네요
추석이 다가옵니다.

ㅇㅇㅇ32010.09.15 18:2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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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무한님 다방구가 뭐죠..
하기사 이름도 모르고 놀던 놀이들이 많긴 했는데
첨들어보네요 뭔지좀 ㅜㅜ

ice2010.09.15 21:3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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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댓글...^^
뭔가 불안한 요즘이었는데...
위로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잌2010.09.15 21:5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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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작가 박민규씨 글을 참 좋아하는데
무한님도 그런 비스무리한 느낌이 나서 참 좋아요!
유머+풍자+독특한 시각+ 훈훈한 마무리 ㅎㅎㅎ

온스타2010.09.16 09:5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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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제 아침 저녁에는 쌀쌀하기 까지 하던데요~
한낮에는 아직 덥지만.....
잘읽고 갑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2010.09.16 18:0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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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맘인지 알것같은데..
그들도 무한님과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자리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서글프네,

꽃보다세일2010.09.20 11:5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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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활하면 할수록 처세술만 늘어가지요..ㅋ
인생 자체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정치'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많아요~

무한님, 명절 잘 보내시고~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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