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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풍기와 서먹서먹한 사이 되기

by 무한 2010. 9. 14.


저녁에 긴팔 티셔츠를 입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선선한 날씨가 되었다. 이제 선풍기와도 서먹서먹한 사이가 될 걸 생각하니 발가락으로 버튼 눌렀던 일이 괜히 미안해진다. 가을의 입질에 마음은 낭창낭창. 착륙할 곳을 배정받지 못한 커서가 이리저리 기웃댄다.

연락이나 호출을 생략한 채 누군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미니홈피, 참 좋은 서비스다. 사회로 쏘아져 나간 후 생사와 근황을 알 수 없는 이 사람 저 사람의 공간에 들른다. 광어는 올해 초 태평양엘 다녀왔고, 거기서 Orange Roughy와 찍은 사진을 자랑스레 올려놨다. 도다리는 카메라 동호회에서 만난 여자친구 가자미양과 여기저기 여행 다니며 즐겁게 사는듯하다. 멍게는 우리가 함께 다니던 고등학교의 교사가 되어 치어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멍게가 교사라니! 멍게와 나도 아직 꼬꼬마 같은데!

또래의 녀석들이 어른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건, 뭐 새삼스레 이야기 할 것도 아니지만, 나는 이 과거의 녀석들과 현재의 녀석들에 대한 괴리감을 오랜 시간 그냥 '방치'해 두고 있었다. 그러니까, 고교시절 공연하기 위해 내가 만들어 온 반주 CD가, 배속을 잘못 정해 학교 방송도구로 재생할 수 없게 되자, 2층 방송실 창문을 열고,

"야, 너, 방송이 장난이야?"

라고 내게 소리친 어느 선배처럼, '어른인 척'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 선배에겐 미안하지만, 난 지금까지도 내가 살고 있는 것이 '장난'이라 생각한다. 장난이 아니라면, 살기 위해 계속 뭔갈 해야 하는 이것은 차라리 형벌 아닌가. 군대에선 군인놀이, 회사에선 회사원놀이, 블로그를 하면서는 블로거놀이. 이건 오랜 시간 하는 다방구고, 오랜 시간 하는 돈까스며, 오랜 시간 하는 얼음땡 아닌가. 지구 위에 에펠탑보다 오래 서 있지도 못하면서 심각한 얼굴을 하는 건 왜인가?

누군가, "인생은 짧고, 다방구는 길다."라고 얘기한다면 나도 동의한다. 요즘 애들이 다방구를 안 한다고 해도, 다방구 보다 늦게 태어났고, 열아홉 살에 아버지차를 몰래 몰고 나가 다방구 보다 먼저 떠난 내 친구 Y가 있으니, 적어도 Y보다는 다방구가 길다.

편안한 자리에서 녀석들을 만나면 다시 데덴찌나 할 줄 알았는데, 하나 둘 긴장을 풀어 봐도 녀석들은 술래의 얼굴을 지우지 않는다.

"나, 네 블로그 들어가 봤다. 너 책도 냈더라?"

지문방지 보호필름 같은 걸 마음에 딱 붙여 놓고는 나에게도 터치만 하려 한다. 처세라는 가면과 대인관계에 대한 강박, 사회적 잣대라는 측정도구들은 다 어디서 얻은 거냐? 내가 모르는 곳에서 공동구매라도 했던 거냐?

그래도 다행히 절망할 정도는 아니다. 아직 앞다리가 나지 않은 올챙이들도 옆에 있으니 말이다. 시간이 지나 "언제까지 올챙이로만 살 수는 없잖아. 나도 개구리가 되어야지."라며 뭍으로 뛰어 나갈지도 모르지만, 그렇더라도 난 여기 있으련다. 한 여름 함께 했던 선풍기와 서먹서먹 해지는 것이 아쉬워, 선풍기와 함께 창고로 들어갈 순 없지 않은가.

그 마음으로 이번 여름과 함께 가는, 선풍기에게 손을 흔든다.





▲ 광어, 도다리야, 깝치지 마라. 청상아리, 돌고래에도 인사를 해야지. (이상화의 시를 흉내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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