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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매뉴얼(연재중)/연애오답노트

예전에 좋아했던 여자를 만난다는 한심해씨에게

by 무한 2011. 2. 1.
심해씨, 그러니까 "꿈에 네가 나와서 문자 보낸다. 잘 지내지?"란 멘트는 딱 한 번 써먹었어야지. 그걸 시도 때도 없이 써? 아니, 무슨 무속인이야? 매일 막 예지몽 꾸고 그래? 그러니까 연락 없는 게 당연하잖아. 그건 건전지가 다 방전되었을 때, 최후의 보루로 꽉꽉 깨물어 충격을 주는 거랑 비슷한 거야. 꿈에 나왔다는 얘기로 그녀가 반응했으면, 충전을 하거나 다른 건전지를 준비해야지 마냥 손 놓고 있어선 곤란하잖아. 

그렇게 연락이 닿았으면, 밥 먹자고 약속 잡기 좋잖아. 예전에 심해씨가 뭔 헛발질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는 걸로 봐선, 과거의 심해씨가 벌인 헛발질이 그녀의 마음에 앙금 없이 가라앉았다는 거잖아. 이 황금 같은 기회를 왜 문자로 떠보며 망치고 있냐 이거야. 그 상황에서 "나 너 정말 좋아했었는데."라는 문자를 보내는 건, 다시 그녀의 마음을 휘젓는 거야. 겨우 가라앉은 심해씨 헛발질의 추억들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거라고. 이 혼탁한 상황 이제 어쩔 거야?


일단 만나

만나야 뭘 보여줄 거 아냐. 많은 솔로부대원들이 이 결정적인 '만남'은 뒤로 미뤄두고 문자나 전화나 메일, 메신저 같은 것들로 자꾸 떠보다가 다 스러져 가는 거잖아.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게, 그냥 있는 말이 아니라니까. 그 뜻이 그 뜻이 아니라고? 괜찮아. 쫄지 말라니까. 그 두려움 다 누가 준 거야? 결국 심해씨가 심해씨 자신에게 준 거잖아. 아무도 뭐라고 안 하는데, 왜 혼자 핸드폰만 쪼물딱 거리고 있어? 허리 펴고, 어깨에 힘 빼고, 그렇게 가는 거야.

"토요일에 시간 괜찮아?"라고 묻지 마. 이거 너무 정직하잖아. 인형 뽑기 안 해봤어? 인형 뽑기도 집게가 너무 정직하게 들어가면 계속 허탕만 치게 되는 거야. 하나는 사이드에 걸고, 두 개로 움켜쥐는 거지. 심해씨가 메뉴를 먼저 정해. 이거 안 정하고 만나면 "뭐 먹을까?"만 묻다가 집에 돌아오게 되니까, 상대의 집에서 전철로 세 정거장 정도 떨어진 곳의 맛집을 찾아봐.

왜 세 정거장이냐고? 그 정도 거리가 딱 부담 없이 만나기 괜찮아. 밥 먹다가 술자리로 이어진 까닭에 시간이 늦어져도 쫓기는 기분으로 시간 체크하지 않아도 되거든. 그렇다고 '동네'의 개념도 아니라 긴장이 완전히 풀어지지도 않고 말야. 심해씨 동네에 전철이 없다면, 택시로 4200원 정도의 요금이 나오는 곳을 기준으로 잡아. 

만나서 무슨 얘기 하냐고? 그냥 심해씨 대신 내가 연애까지 할까? 농담이고, 그 부담감부터 버려. 동성친구랑 만나러 가는 길에 '얘랑 무슨 얘기 하지?'라며 고민한 적 없잖아. 바로 그 마음으로 만남에 임하는 거야. 집에서 막 계획하고 준비할 필요 없어. 그렇게 '예상문제'를 만들며 고민해 봐야, 심해씨의 예상과 다른 화제가 나오면 더 긴장될 뿐이야. 심해씨가 할 일은, 코털이 그녀를 보겠다며 달려 나오지 않도록 정리하는 것과 깨끗한 신발을 준비하는 것 정도면 충분해.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된다면 치과에 가서 스케일링 한 번 받는 것도 괜찮고.


집중해

만남에서 상대에게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대화의 8할은 성공이야. 상대에게 들려줄 재미있는 얘기 생각하느라 상대를 방치하지 말고, 상대를 앞에 두고 스스로의 자아와 대화를 하며 그 만남에서 구경꾼이 되지 마. 상대 스마트폰에 어플을 깔아줄 일이 생기더라도, 절대 상대를 3분 이상 혼자 두지 말고. 

상대의 이야기에 리액션을 하며 부연 질문을 하는 것은 좋지만, 너무 깊게 파고 들진마. 이번에 그녀에게 한 계단 내려갔으면 다음에 또 한 계단 내려가면 돼. 그리고 무엇보다 '과거 연애사'의 계단엔 아예 발을 들여 놓지마. 그녀가 심해씨의 '과거 연애사'를 묻더라도 "계속 혼자였지 뭐."따위의 대답을 하지 마. 인터넷 쇼핑몰에 들어가서도 구매자가 한 명도 없는 상품은 괜히 꺼림칙한 생각이 들잖아. 심해씨가 모태솔로라는 걸 훈장처럼 꺼내지 말란 얘기야. "오늘 날씨가 참 춥지?" 정도로 모호하게 답하는 방법도 있잖아. 알면 재미없는 법이야. 궁금하게 만들어.

자랑하지 마. 과거에 알던 사람과 다시 만난 솔로부대 여자대원들이 보낸 사연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잘난 척'과 '자랑'에 관한 얘기야. 오랜만에 만나서 '나 이렇게 달라졌다.'는 걸 보여주고 싶더라도 참아. 연봉, 차, 아파트 얘기는 나중에 동창회 나가서 실컷 하고, 그 자리에선 둘의 행복을 공유해. 공유 할 행복이 없다고? 그래서 내가 늘 '연애'보다 자신의 '행복한 삶'부터 찾으라고 얘길 하는 거야. 연애를 '도피처'로 삼은 모든 이들은 머지않아 연애에서도 도피하고 싶어 하니까.  


마음으로 프리허그

받으려고 하지 말고 주란 말이야. 고백? 고백은 상대의 마음을 받고 싶다는 호출이지, 주는 게 아니야. 결과가 어떻든 마음을 전달할 수 있으니 된 거라고? 그건 그냥 떠안고 있던 고민을 상대에게 바톤 터치 한 것일 뿐이야. 사는 건 누구에게나 힘든 법이니까, 꼭 안아줘. 그렇다고 또 허그 할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지 말고, 마음으로 꼭 안아 주란 말야.

마음으로 어떻게 안아 주냐고? 남자들의 세계에서 "오, 이색히 끝나. 마셔"정도의 얘기로 프리허그를 한다면, 여자들의 세계에선 "힘들었지? 이제 괜찮아."정도의 얘기로 프리허그를 하는 거야. 잘 이해가 안 된다면 심해씨 등을 토닥토닥 해줬던 부모님을 생각해봐. 술 취해서 들어왔을 때 화장실에서 토닥토닥 한 거 말고, 심해씨가 울음을 꾹 참고 버티다가 부모님의 "괜찮다."는 말에 눈물이 툭, 터져 버렸던 뭐 그런 상황 말이야. 파리채로 맞은 기억밖에 떠오르질 않는다고? 그럼 어떤 느낌인지 시 한 편 소개해 줄게, 읽어 봐봐.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 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며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아저씨가 안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 주셨습니다 나는 당황하여 주인 아저씨를 흘금거리며 국물을 더 받았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넌지시 우리 모자의 행동을 보고 애써 시선을 외면해주는게 역력했습니다

나는 그만 국물을 따르시라고 내 투가리로 어머니 투가리를 툭, 부딪쳤습니다 순간 투가리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 나는 울컥 치받치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설렁탕에 만 밥과 깍두기를 마구 씹어댔습니다 그러자 주인 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만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일순,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 함민복, <눈물은 왜 짠가> 전문


난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몇 번이고 저 시에 나오는 '성냥갑만 한 깍두기'가 목구멍에 걸린 듯한 느낌이 드는데, 심해씨는 어떨지 모르겠네. 어머니께서 투가리(뚝배기)에 국물을 부어 주시는 모습과 그만 따르시라고 투가리로 어머니의 투가리를 툭, 부딪치는 저 모습이 '마음으로 하는 프리허그'란 얘기야.

게다가 '마음으로 하는 프리허그'는 무료야. 심해씨가 좋아하는 공짜라고. 그녀가 잘되길 바란다고 나에게 얘기만 하지 말고, 심해씨가 할 수 있는 저 프리허그로 그녀에게 직접 말해줘. 정말 심해씨가 바라지 않고 준 거라면 지금처럼 억울해 하거나 괴로울 일도 없는 거잖아. 연애의 괴로움은 대부분 주려는 마음보다 받으려는 마음이 커서 생기는 거라는 걸 잊지마.


마지막으로 심해씨, "압니다." 이거 너무 남발하지 마. "저 말고도 많다는 걸 압니다.", "제 입맛에 맞추려 했단 건 압니다.", "그런 생각으로 한 거란 거 압니다.", 전부 다 아네. 알면서 왜 마지막엔 "조언바랍니다."로 끝나?

나한테는 그렇게 메일을 보내도 상관없는데, 상대에게 메일을 보낼 때엔 절대로 "네가 ~라는 거 알아."라고 단정 짓지 말란 얘기야. 어디까지나 심해씨 짐작일 뿐이잖아. 심해씨가 알고 있는 건 심해씨가 만든 '상상속의 그녀'에 대한 이야기야. 심해씨가 마음대로 만든 이미지와 현실 속의 그녀를 착각하지 마. 심해씨가 메신저로 그녀와 대화를 나누다 갑자기 집에 중요한 손님이 오셔서 한 시간쯤 메신저를 켜 놓은 채 나갔다 왔어. 그런데 손님이 가시고 메신저를 확인해 보니까, 그녀가 "심해씨 이 글 보고 있는 거 다 알아."라거나 "그렇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면 예, 아니요 만으로라도 답해줘."라는 글을 남겼어. 그럴 때 심해씨 기분이 어떨 것 같아?

물론 나중에 오해임을 이야기하고 풀 수도 있지만, 그녀가 저주에 가까운 말들을 메신저에 적어 놓았다면 어떨까? 오해를 풀기 보다는 인연을 끊고 싶은 생각이 더 크지 않을까? 혼자 쓴 시나리오대로 진행해 나가며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 혼자 널 좋아하는 것 같다."따위의 푸념만 늘어놓지 마. 그건 그녀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녀를 '자극'하는 일이야.

그럼 더 궁금한 점 있으면 normalog@naver.com 으로 메일을 주기 바라며, 세상의 모든 한심해씨들이 이 매뉴얼로 환골탈태하는 2월의 첫 날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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