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애매뉴얼(연재중)/연애오답노트

돈 때문에 연애를 포기하려는 김양에게

by 무한 2011. 3. 14.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서정주 시인은 말했지만, 목 늘어난 티셔츠를 입거나 구멍난 양말을 신은 채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서정주 시인의 시대야 장남의 옷을 막내까지 물려받아 입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시대였지만, 지금은 어떤가. 남루한 옷을 입고 나가면 그 옷을 입은 사람도 딱 남루 정도로 보는 것이 이상할 것 없는 시대 아닌가. 이 얘기는 조 아래서 더 나누기로 하고,

친한 친구, 사랑하는 사람에게 조차 털어놓지 못했던 무겁고 비밀한 이야기들을, 내 메일에 대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린 친 대원들의 속이 좀 편안해졌으면 좋겠다. 구멍 난 양말을 신은 까닭에 사람들 사이에서 전전긍긍 했던 사연들. 구멍 난 양말 때문에 안 그래도 마음이 불편한데, 최과장이 "회식은 갈비 어때요? 거기갈비 죽이는데." 라며 신발 벗고 들어가 앉아서 먹는 갈빗집에서 하자고 졸랐을 때, 그대의 염통은 또 얼마나 쫄깃해졌었는가. 내가 가진 양말이 많다면 양말을 좀 보내주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난 맨발로 살고 있는 까닭에 양말이 없다.

부모님이 유산처럼 물려주신 빚이 있고, 정신지체를 앓고 있는 오빠가 있고, 피 뽑히듯 월세를 내는 까닭에 늘 빈혈증상을 느끼고, 뭐 다 좋다. 남자친구에게도 털어 놓지 못한 그 구멍 난 양말, 그것이 부끄러워 늘 사람들 사이에서 튕겨나가듯 이번엔 사랑에서도 튕겨 나가려는 김양. 그대의 부끄러움은 어디서 오는지, 그리고 그 구멍 난 양말을 해결할 수는 없는지 오늘 함께 생각해 보자.


1. 술 권하는 사회

그러니까 1920년대, 현진건의 소설 <술 권하는 사회>에서 "이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 이 조선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라는 절규를 하게 만들었던 조선 사회는 여전히 술을 권하고 있다. 요즘은 그 때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TV에 나와 소주병을 흔들기도 하고, 맥주 맛을 모르면 사람도 아니라는 식의 카피를 써 가며 술을 권하고 있다. 한 병에 얼마짜리입네, 하며 돈이 없으면 이 와인을 못 마신다는 얘기를 대놓고 한다.

주말도 없이 일을 하는 내 친구는 이 성인용 음료의 유혹에 빠져 완구를 탐하는 아이처럼 가게 앞을 서성거린다. 뭐 이게 술뿐만의 일인가. 자신에게 상을 주기 위해, 그간 모은 돈으로 최고급 호텔에서 가장 비싼 방을 빌려 혼자 하룻밤 묵었다는 사연도 있었다. 그 '최고급 호텔'이란 막대기는 누가 만든 것인가? 그 막대기의 끝에는 뭐가 있기에, 앞으로 라면만 먹을 작정 하며 그 막대기를 오르게 만들었나.

오늘자 한 경제신문을 보니, 메인엔 "6천억 대박, 15분간 2800만원, 176억 대박, 하룻밤 1억7000만원" 따위의 제목들이 떠있다. 여러 곳에서 소개하는 것도 아니고 한 신문사다. 그것도 몇 주간에 걸친 뉴스도 아니고 오늘자 뉴스다. 그들이 열심히 일했고, 탁월한 재능도 있었고, 거기다 운도 좋아서 큰돈을 벌게 된 것에 대해서는 축하 할 일이다. 하지만 그 '출세소식'은 반짝반짝한 옷 -그들은 성실하고 뛰어나고 야심을 갖고 있었다 류의 소개- 이 입혀지고, 그 옷으로 인해 순식간에 다른 이들은 -불성실하고, 모자라고, 야심도 없는- 남루한 옷을 입게 된다.

난 정말 성실한 '최부장'이란 분을 알고 있다. 가구공장에서 일하는 분인데, 올해 쉰둘이 되신 최부장님은 어려운 가정환경으로 인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드셨다. 아침 아홉 시에 출근해 저녁 열 시까지 일을 하실 때가 많은데, 담배를 피우거나 화장실을 가거나 식사를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두 작업장에서 보내신다. 게으름을 피운 것도 아니고, 회사를 크게 키우겠다는 야심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술이 없거나 도박을 한 것도 아닌데, 아이들을 키우며 어찌어찌 살다보니 가진 거라곤 십 수년째 살고 있는 전셋집의 보증금뿐이다.

그렇게 성실히 일하고, 열심히 부비며 살아왔음에도 왜 이렇게 가난한가. 뛰어나지 않아서? 뛰어나지 않은 것은 맞는 것 같다. 일에 있어서가 아니라 부탁을 거절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것에서 뛰어나지 못하다. 고등학교 동창이 집에 들여 놓을 장식장을 원가로 좀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자, 최부장님은 주말에 공장으로 가서 작업을 한다. 평생 톱밥을 들이마신 까닭에 잦은 기침, 그 기침을 계속 콜록거리면서도 나무 값만 받기로 한 가구를 만든다. 친구의 오십육 평 아파트 거실에 들어갈 장식장을 만들기 위해, 열여덟 평 주택에 전세로 살고 있는 최부장님은 주말에도 공장에 나가 일을 하는 것이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오래 전에는 할부로 책을 팔기 시작했다는 친구에게 무슨 동화 전집을 구매했고, 전기세가 많이 나온다며 온수는 아예 꺼버렸다는 정수기, 그것도 친구의 부탁으로 들여 놓았다. 역시 친구의 부탁과 관련된 보험이나 건강식품들, 그리고 셋째 임에도 어머니를 모시고 산다는 얘기까지 하면 너무 길어질 것 같으니 최부장님 개인사는 여기까지만 들여다보자. 

당신의 가치나, 인생의 즐거움, 그게 다 부로 측정 가능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서 계속 가난은 죄인것처럼 얘길하고 있으니 당신이 금방 울 듯한 표정으로 내게 "남자친구는 제가 이런 상황인 걸 몰라요."라며 메일을 보내는 거다. 친구들과의 대화에서부터 포털사이트 메인에서까지 듣게 되는 "저 사람이 이번에 성공한 성실한 사람입니다."라는 소식 속엔, "당신은 실패한 불성실한 사람입니다."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으니 말이다.


2. 먹어버린 선악과

위의 이야기를 읽고 '이젠 남들의 눈 의식하지 않을 거야. 누가 날 어떻게 보든 상관없어. 난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될 거야.'라는 다짐을 했다 하더라도, 그 다짐은 몇 시간도 지키기 어려울 것이다. 남의 눈을 의식하고, 다수가 서 있는 곳에 줄을 서려 하던 습관은 마치 화상으로 입은 상처와 같아서 그 자리를 말끔하게 없애기가 어렵다.

그대와 난 이미 선악과를 먹어버린 것이다. 아닌 척, 아닌 체, 아니라 생각하려 노력을 해 봐도 마음 한 편에선 당신과 나의 노력을 비웃는 음흉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렇다고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다. 마음이 호수만하면 그 비웃음의 파문이 호수 전체에 퍼질 테지만, 마음이 바다만 하다면 누가 뭐라고 하든 그건 그냥 그 부분에만 잠시 물결을 일으키고 다시 잠잠해 질 것이다.

무슨 일이든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지며, 우리에겐 아직 깃털같이 많은 날들이 남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며칠만 지나도 며칠 전의 자신이 부끄러울 때가 있지 않은가. 그러니 며칠 후에 부끄러워 할 지금의 모습으로, 모든 일을 다 예측하려 들거나 한계라며 선을 긋지 말길 권한다. 내 친구 Y군처럼, 언젠가 벤츠를 탄 아저씨가 찾아와. "내가 네 진짜 아빠다."라고 말할지 모른다는 희망을 갖는 건 정신과 치료를 요하는 것이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면 당신은 당신의 인생을 칠하고 싶은 그 어떤 색깔로 칠해도 괜찮다. 수많은 색 중 지금 쥐고 있는 회색 하나로만 칠하지 말란 얘기다.

남자친구에게는 현재의 상황을 가감 없이 얘기하자. 절대 거짓을 집어넣어선 안 되며, 한 계단 아래서 올려다보며 얘기해서도 안 된다. 당신의 바로 옆에서 함께 걸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솔직하게 얘길하는 것이다. 당신의 말에 남자친구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그건 남자친구의 몫으로 두고 당신은 '우리' 중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위에선 수많은 날들이 남았다고 생각하며 여유를 가졌던 것과 달리, 당신의 얘기를 전할 때엔 그 날 저녁이 지구의 종말인 듯한 기분으로 하자. 그럼 가감 없이 당신을 모두 털어 낼 수 있다.


3. 혼자가 아니라 함께다

남자친구에게 현재 상황에 대해서 가감 없이 이야기를 했는데, 남자친구가 그 얘기를 듣고 당신에게 이별을 얘기한다면 그를 놓아주자. 그건 그가 나쁘다거나 못돼서가 아니라, 그 시기에 그 상황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자. 난 서랍정리를 하다 가끔 '이건 평생 가도 쓸 일이 없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물건을 버릴 때가 있는데, 시간이 지나 그 물건을 다시 애타게 찾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서랍정리 하던 당시의 난, 그 물건에 대해 잘 몰랐던 것이다. 그냥 그 정도쯤의 이야기로 생각하자.

남자친구와 당신이 모래 위에 사랑의 집을 지은 것이 아니며, 둘의 영혼을 단단히 묶어 둔 상태라면 남자친구는 당신의 이야기에 절대 뿌리 채 뽑혀나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심하긴 이르다. 내 편이 한 명 더 늘었다 뿐이지,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부턴 자유롭지 않다. 특히, 결혼을 생각한다면 '부모님'이라는 거대한 자물쇠가 하나 놓여있기 마련이다.

당신이 사랑하는 그 남자가 많은 열쇠를 가지고 있길 바란다. 집 열쇠나 자동차 열쇠가 아닌, 갈등의 상황을 현명하게 풀어나갈 수 있는 열쇠들 말이다. 부모님이라는 자물쇠 역시 남친의 열쇠가 있어야 풀 수 있다. 그가 부모님에게 "다른 조건 같은 거 다 필요 없고, 우린 누가 뭐래도 결혼 할 겁니다."라거나 "사랑하면 됐지, 더 뭐가 필요한가요? 제가 선택했고, 제가 책임질 일입니다."라고 얘기한다면, 그는 제대로 된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평소에 드라마를 즐겨 봤을 가능성이 크다.

그가 열쇠를 가지고 있다면, 결코 당신에 대한 대리면접 식의 소개나 자세히 말하기 귀찮다는 식의 설명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왜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당신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에 대한 얘기를 부모님께 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더 오랜 시간을 미디어에 치이며 살아오신 부모님은 그대들보다 걱정해야 할 거리가 더욱 많다. 당장 자신의 며느리 될 사람이 친구나 지인, 친척들에게는 어떻게 비추어질지 생각도 해야 할 것이고, '정말 괜찮은 사람인가?'라는 의문을 끊임없이 가지며 당신의 전후좌우를 살펴볼 것이다. 그래도 그대는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길 바란다. 대부분 이 단계에서 '에잇, 나 안해.'라며 침을 뱉고 소주를 원샷하는 대원들이 많은데, 부모님들은 그냥 부모님들이 해야 할 역할을 하고 계신 거다.

언젠가 트위터 타임라인에서 봤던 문장인데, 정확하게 기억이 나진 않지만,

"생활수준이 다들 엇비슷했던 부모님의 세대에선 생활력이 강하면 성공할 확률이 높았다. 그런 까닭에 자식의 신붓감, 혹은 사윗감으로 성공한 사람들을 원하는 것이다. 사랑만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결혼생활로 인해 터득한 부모님들은 살아가며 제일 중요한 것이 '생활력'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당신들이 겪었던 처참한 가난으로 인해, 자식만큼은 그렇게 살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위와 비슷한 뉘앙스의 이야기가 있었다. '부모님'과 '생활력'이란 단어 빼고는 내가 새로 만든 문장이라 뜻이 달라졌을 수도 있지만, 그 문장을 읽고 내 마음 속에 넣어둔 요점은 바로 위와 같은 내용이었다. 온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모님의 결혼 반대'로 중심을 잡지 못하는 대원이 있다면 무작정 대립을 하기 보다는 위의 문장을 천천히 읽어 보길 바란다. 그럼 부모님이 쥐고 계신 '반대'의 뿌리가 '염려'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당신과 남자친구가 함께 하는 것이다. 남자친구가 열쇠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당신이 자물쇠를 잡아주지 않으면 남자친구 혼자서는 그 자물쇠를 열 수 없다. 내성적인 성격이라며 남자친구 집에 가서도 못 올 데 온 사람처럼 쭈뼛거리거나, 남자친구의 부모님께 살가운 말 한 마디 못 한다면 남자친구가 아무리 당신을 반짝반짝한 사람이라 이야기해도 믿기 어려워 질 것이다. '둘 만의 세상'을 점점 키워가다 보면 그 세상엔 여러 사람이 들어올 것이고, 그 수가 많지 않더라도 당신은 눈감는 그 날까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당신이 원하는 해피엔딩 아닌가.


최악의 상황이 찾아와봐야 최악의 상황일 뿐이다. 이전 매뉴얼에서도 몇 번 이야기 했지만, 난 꼬꼬마시절 침대에 라면을 쏟아 놓고는 집을 나갈 생각을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웃긴 에피소드 중의 하나지만, 당시엔 내 인생이 끝난 것 같고, 엄마는 나를 평생 미워할 것 같았으며, 내 삶에는 아무런 희망도 즐거움도 남아있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엄마에게 울며 라면을 쏟았다고 고백했을 때, 엄마는 괜찮다며 나를 꼭 안아 줬으면 더 훈훈했겠지만, 흰색 옷걸이로 내 등을 빨갛게 수놓아 주셨고, 어쨌든 그 일은 눈물의 짠 맛과 라면의 매운 맛에 섞인 채 꼬꼬마시절 에피소드가 되었다.

지금 그대가 짊어지고 있는 문제들도 몇 년 뒤에는 아무렇지 않게 얘기할 수 있는 에피소드 들이다. 아무리 나쁜 일이라고 해도 훗날 씁쓸한 후회 정도로 말할 수 있는 에피소드란 얘기다. 혼자 하는 고민은 스스로를 점점 더 깊을 곳으로 가라앉게 할 것이다. 그러니 그 납덩이같은 문제들을 하나 둘 털어놓아 떼어버리고, 마음 가득 행복을 느끼며 삶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여보자. 이 쉽지 않은 연습을, 꾸준히 해 나갈 수 있길 기원하며 이번 매뉴얼은 여기서 마친다.



▲김양을 응원해 주실 분들은 위의 추천버튼을 눌러주세요. 추천은 무료입니다.




<연관글>

이별을 예감한 여자가 해야 할 것들
늘 짧은 연애만 반복하게 되는 세 가지 이유
나이가 들수록 연애하기 어려운 이유는?
인기 없는 여자들이 겪게 되는 안타까운 일들
예전 여자친구에게 돌아가는 남자, 왜 그럴까?

<추천글>

유부남과 '진짜사랑'한다던 동네 누나
엄마가 신뢰하는 박사님과 냉장고 이야기
공원에서 돈 뺏긴 동생을 위한 형의 복수
새벽 5시, 여자에게 "나야..."라는 전화를 받다
컴팩트 디카를 산 사람들이 DSLR로 가는 이유
카카오뷰에서 받아보는 노멀로그 새 글과 연관 글! "여기"를 눌러주세요.

 새 글과 연관 글을 편하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