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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매뉴얼(연재중)/연애오답노트

나이 많고 가진 것 없어서 헤어진다는 최형에게

by 무한 2011. 8. 28.
나이 많고 가진 것 없어서 헤어진다는 최형에게
최형, 난 그제 물놀이를 다녀왔어. 양수리 계곡으로 갔는데, 한 십 분 정도 물에 들어가서 놀다가, 저체온증으로 죽을까봐 얼른 나왔어. 슬픈 일이야. 몸이 예전 같지 않아. 근처에 있던 대학생 꼬꼬마들은 춥지도 않은지, 여름의 머리채를 부여잡고 튜브까지 타던데 말이야.

그 꼬꼬마들은 고기도 잡더라고. 뭐, 남자애들이 깔짝깔짝 거리다 눈 먼 고기 하나 잡으면 여자애들이 와서 보곤 소리 지르는 패턴이지. 계속 허탕을 치던 꼬꼬마 하나가 이런 얘길 하더라.

"야, 여긴 고기가 너무 없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고기가 없다니. 거긴 쉬리를 비롯해 참마자, 퉁가리, 묵납자루, 돌고기, 갈겨니, 꺽지, 모래무지, 참종개 등등 수많은 녀석들이 살고 있는 곳이야. 그런데 고기가 없다니. 난 그 꼬꼬마에게 다가가서,

"자네 지금, 여기 고기가 없다고 했나?
여긴 수 많은 어종이 살고 있는 수산시장(응?) 같은 곳일세.
자네가 멍청하게 반두를 대고 있으니 고기를 못 잡는 거지.
반두를 대고 발로 차서 고기를 잡는 건 수초부근에서나 하는 거고
여기선 돌을 들춰야지. 왜 자네의 멍청한 짓은 생각하지 않고
이곳 탓만 하고 있나. 자네를 비웃으며 지나가는 갈겨니 떼가 안 보이는가?"



라는 얘기를 하려다 그만 뒀어. 난 신혼여행에서 막 돌아온 친구에게 빌려간 주황색 수영복을 입고 있었거든. 그게, 계곡과는 어울리지 않는 수영복이었어. 하와이에 갈 때나 입어야 할 수영복인데, 그런 걸 입고 가서 민물고기 얘기하긴 좀 그렇잖아. 아무래도 녀석들에게 '저 사람, 좀 이상해.'라는 얘길 들어 버릴 테니까.

여기까진 그냥 웃자고 한 소리고, "야, 여긴 고기가 너무 없다."고 얘기한 꼬꼬마처럼 "나이 많고 가진 것 없어서 헤어지려 한다."고 얘기하는 최형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있어. 최형이 '속물'이라고 얘기 한 그 여자 분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함께 살펴보고 싶고 말야. 자, 그럼 시작해볼까?


1. 연애 오래하면 헤어진다는 어머니의 말씀


그럴 수 있지. 연애 오래 하면 헤어질 수 있어. 연애라는 게 마라톤이잖아. 마라톤 해 봤어? 처음엔 다들 '뭐, 별 거 아니군.'이라며 출발했다가, 중간 정도 지나면 다리 절면서 포기하는 사람들이 생겨. 고려하지 않았던 물집이 생긴다든가, '좋아, 딱이야!'라며 감탄했던 날씨가 점점 피부를 벌겋게 만든다든가,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코스에 지쳐 결국 '내가 이 짓을 왜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찾아오면 끝장이거든. 존 배리모어가 그랬잖아.

"사랑은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서부터
그녀가 꼴뚜기처럼 생겼음을 발견하기까지의 즐거운 시간이다."

- 존 배리모어


근데 말야, 기타를 치려면 손가락 끝이 한 번 터져봐야 하는 것처럼, 사랑을 하려면 몇 번이고 연애를 때려치우고 싶은 갈등의 강을 건너야 하거든. 오래 하든 잠깐 하든, 갈등은 필연적이란 얘기야.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니 이 부분에 대한 얘기는 나중에 나누도록 하고, 최형,

"어머니께서, 연애를 오래 하면 헤어질 수 있으니,
결혼 하라고 말씀하시더라고. 넌 어떻게 생각해? 우리 결혼할까?"



이게 뭐야. 청혼에 웬 엄마핑계야. 저건 다시 말해, "엄마가 결혼하래. 결혼 할래?"라는 얘기잖아. 결혼은 집에 친구 데려와서 같이 저녁 먹는 것 같은 간단한 일이 아니야. 반평생 함께 할 반려자를 정하는 거라고. 최형 사연의 첫 단추는 여기서부터 잘못 끼워진 거라고 봐 난.


2. 몸 고생 할 수 있다. 마음고생 할 수 있다.


최형, 내가 최형한테 차를 한 대 판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그 차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어.

"연비가 좋다고는 하지만, 최고로 좋은 차는 아니야.
A사에서 이번에 나온 차 보다는 아무래도 기름을 많이 먹지.
또, 안전을 위한 기능들이 많이 추가되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차 사고가 나면 다치거나 죽는 건 마찬가지지 뭐.
아, 그리고 몇 년 타다보면 더 좋은 차가 나와서
결국 차를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찾아 올 거야. 그래도 살래?"



사고 싶은 생각이 들어? 자, 그럼 이번엔 최형이 그녀에게 말한 얘기들을 좀 보자.

"부모님의 경제력이 없는 까닭에 형제들이 함께 생활비를 대고 있다.
앞으로 결혼을 해도 향후 몇 년 간은 부모님을 모시면서 살아야 할 거다.
내가 장남인 까닭에 집안의 경조사는 맡아서 해야 한다.
난 월급이 많지 않다. 그래서 맞벌이도 각오해 줬으면 좋겠다.
결혼 할 생각이 없다면 더 오래 만나지 않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것 같다."



이건 그냥 겁주는 거야. 솔직하게 얘기한 거라고? 거짓말을 한 게 아니니까 '솔직함'의 측면에서는 좋은 점수를 받을 순 있겠지. 그런데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기지만, 이건 그냥 쉴드잖아. 나중에 어떤 일이 벌어지든 최형의 책임은 최소화 하고, 그녀가 원망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한 밑밥이잖아.

'나이 많고 가진 것 없다'는 걸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건 비겁한 일이야. 최형의 말에선 아무 의지도 희망도 느껴지지 않잖아.

"제 집안 사정을 솔직히 얘기하니, 그녀가 망설이는 게 보이더군요.
나이 많고 가진 것 없는 사람에겐 결혼도 무린가 보네요.
그녀만은 속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참 답답하네. 행복에 대한 얘기는 온데간데없고, 무슨 가사도우미나 애 낳아줄 사람 구하듯 얘길 한 게 누군데? 그래놓곤 그게 그녀가 속물이어서 그런 거라고? 최형 '책임'이란 단어와 '회피'라는 단어의 뜻이 뭔지 검색을 좀 해봐. 그럼 지금 최형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거야.


3. 내가 돈이 많았다면, 네가 망설였을까?


헐. 뭐야. 최형은 곧디 곧은 대나무고, 그녀는 무슨 담쟁이덩굴이야? 최형은 그런 식의 가정법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어? 길거리에서 박스로 좌판을 만들고 그 위에 나물들을 올려놓고 파는 할머니가 계셔. 그런데 그 할머니가 최형의 할머니였다면, 최형이 그냥 무심히 지나쳤을까? 아니면, 좋은 상품 있다며 걸려온 광고 전화, 그 전화를 건 사람이 최형의 친척동생이었다면 최형이 귀찮다며 끊었을까?

저런 가정법을 스스로에게 대입시키며 한 번 더 생각하고, 한 번 더 돌아보는 것은 훌륭한 일이라 생각해. 그런데 그 가정법을 남에게 들이대는 건, 그저 그들을 '위선자'나 '속물'의 범주에 넣어 버리는 거야. '내가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면, 부모님이 지금처럼 나를 대할까?'라든가, '내가 좋은 차를 타고 있었다면, 뒤차가 저렇게 경적을 울리지 않았을 텐데.'따위의 상상만 하면서 말이야.

그렇게 남들을 다 '위선자'나 '속물'로 지정해 놓곤, 혼자만 화장실도 안 가는 사람인 척 자위하지마. 그리고 최형, 그녀에게 헤어지자는 얘길 하며,

"나 좋다는 괜찮은 여자 많았고, 연애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어.
그래도 사귀지 않았던 건, 난 속물들이 싫었기 때문이야.
그런데 너도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너에게도 중요한 건 돈이고, 그저 잘 사는 남자인 것처럼 보인다."



이런 얘길 했다고 했지?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연애든 결혼이든 둘이 하는 거야. 최형은 면접관이 아니야. 왜 면접관 석에 앉아서 '어디 한 번 해봐.'라며 채점하고 있어? 연애가 결혼을 위한 그런 식의 평가라고 쳐보자. 그렇다 하더라도 상대만 평가를 받는 건 아니야. 최형도 상대에게 평가 받는 거야. 그리고 '우리 회사는 너에게 박봉과 과도한 업무밖에 줄 게 없다. 그게 싫으면 나가든지.'라는 얘길 하는 악덕사장의 회사에서는 아무도 일하고 싶지 않은 법이고.


알아. 최형이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녀를 누구보다 행복하게 해 주고 싶다는 걸 말야. 그리고 저렇게 '악조건'을 이야기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승낙을 해 준다면, 목숨 바쳐서라도 그녀 하나만 바라보며 최선을 다해 살 거라는 것도.

하지만 꼭 그렇게 그녀를 극단까지 밀어붙이며 확인을 해야 할까? 회사가 어려울 때, 감봉까지 버티며 모두들 회사를 살리기 위해 애썼다는 일화 같은 건 참 멋져. 그런데 그들의 '애사심'이나 '희생정신'이 생길 수 있었던 건, 회사에 '비전'이 있고 훗날 그 노력의 보상을 함께 나눌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잖아.

최형의 말에서는 '사랑'도 느낄 수 없을 뿐더러, '비전'이나 '믿음'도 없어. 그저 죽는 소리와 요구만 담겨 있을 뿐이야. 이렇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악덕사장의 구인광고 같아.

"박봉과 과도한 업무라는 말에 움찔하는 걸 보니,
너도 많은 연봉만 바라는 속물인 것 같다.
너 말고도 지원자는 많다."



위의 얘기와 다를 게 없잖아. "나이 많고 가진 것 없어서 헤어진다."가 아니고 말이야. 전화를 걸어. 그리고 만나. 팥빙수라도 한 사발 하면서, 최형이 뭘 잘못했었는지를 다 털어놔. 진심을 말해. 그럼 두 사람의 얼어있던 마음도 사르르, 녹을 테니 말이야. 나도 팥빙수 먹으러 가야겠다. 즐거운 주말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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