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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글모음/두번본영화들

록키, 전성기 없는 사람들에게 두 다리에 힘주라고 말하다.

by 무한 2011. 11. 2.
내가 스무 살일 때, 나보다 열 살 더 많았던 K형이 말했다.

"이건 뭐 펴보지도 못했는데 지는 것 같어.
야, 너도 한 달에 십만 원씩이라도 모아.
그럼 내 나이 되면 천만 원이야.
내가 지금 천만 원만 있어도 뭘 해보겠는데, 아무 것도 없다.
뭐, 씨, 할 게 없어."



난 저 '조언과 신세한탄이 겸해진 이야기'를, 이후에도 다양한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이를테면 "겁먹지 말고, 그 나이 때 질러. 못 지르면 나처럼 된다."라거나 "매일 영어 단어 열 개씩만 외워봐. 그게 일 년이면 몇 개야? 아무튼, 나처럼 후회하지 말고, 꼭 해라."따위의 이야기로.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내 전성기는 오지 않을 거야. 아니, 이미 놓쳐버린 건지도 모르지."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간혹 자신의 '전성기'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도 몇몇 있었다. 그들이 꺼내는 이야기는 대부분 신문에 실리는 건 꿈꾸기 어려울 정도로 가냘픈 영웅담이었지만. 그들은 그 영웅담을 -오래된 책을 편 뒤, 그 사이에서 바스라질 것 같이 마른 네잎클로버를 조심스레 손으로 집어 내밀듯- 꺼내 내 앞에 놓곤, 내가 놀라길 기다렸다. 제발 "지금은요?"라든가 "그게 끝인가요?"같은 반문만 하지 말길 기도하는 눈빛으로. 

여하튼, 아무도 "지금이 내 전성기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1. 전성기 없이 세상 살기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전성기를 숫자로 평가한다. 몇 점인가?, 몇 등인가?, 얼마를 벌었나? 따위로. 그리고 그 평가는 곧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된다. 누군가 그저 권투가 좋아 권투선수가 되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그가 가진 '권투의 즐거움'따위엔 별 관심이 없다. 그들은 오로지 그에게 이렇게 물을 뿐이다. "챔피언이야? 몇 KO야? 경기는 몇 번 뛰어봤어?" 그러곤 그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그를 평가할 뿐이다. 만족할만한 숫자가 아닐 경우, 아마추어라거나 무명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부른다.

그렇게 평가된 '전성기 없음'은 곧 '형편없음'이라는 말과 같은 뜻을 지니게 된다. 또, 그런 평가를 받고 난 후엔 쉽게 타인의 비웃음거리나 조롱거리가 되곤 한다. 이때, 사람들에게 같은 '형편없음'평가를 받은 사람들이 더 앞장서 손가락질을 한다. 그 손가락질에 결국, 그저 권투가 좋아 권투선수가 된 사람도 스스로에게 '형편없음'이란 평가를 내리고 만다.

영화에서 록키도 그랬다. 무명 권투선수. 당연히 그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형편없음'이다. 그걸 잘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불량배 집단과 어울리고 있는 소녀 마리를 그녀의 집으로 데리고 가는 장면. 록키는 그녀를 무리에서 떼어내 그녀의 집으로 데려간다. 그 와중에 록키는, 그녀가 담배를 피우고 상소리를 하는 것에 대해 이런 충고를 한다.

"그게 남자야. 여자가 상소리를 하면,
앞에선 웃어도 뒤에 가선 수군거린단 말이야.
존중 받지도 못해."



소위 '노는 여자'라고 불리는 여자들이 왜 '쉬운 여자'가 되며, 남자들이 그녀에게 왜 함부로 대하는 지를 잘 설명하고 있는 대사다. 하지만 록키의 충고들에 대해 마리는 이렇게 답한다.



"꺼져. 너나 잘해. 못난 놈아!"


그녀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록키는 아무 말을 하지 못한다. 그저 혼자 뇌까릴 뿐이다. "그래. 내 주제에 무슨." 전성기 없이 세상 살기, 분명 어렵다.


2. 제발 넌, 나처럼은 살지 마라. 그 슬픈 말.


인생의 페이지는 이제 끝을 향해 가는데, 아직도 이렇다 할 전성기가 없는 사람들. 그들은 바람에 날릴 정도로 가벼운 영웅담들을 타인에게 꺼내며 "이것 봐. 이게 내 전성기야."라고 말한다. 상대가 그 이야기를 듣고 비웃진 않을까 불안해하는 마음을 애써 감추면서.



▲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다고 말해주지 않겠나, 내 전성기.


그들은 특히, 아직 '바람에 날릴 정도로 가벼운 영웅담'도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웅담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부자지간처럼 가까운 사이일수록 그 노력은 더 필사적이다. 그렇게 노력한 끝에 겨우 인정받고 나면, 그들은 마음속에 꼭꼭 숨겨두었던 한 마디를 꺼내 놓는다.

"제발 넌, 나처럼은 살지 마라."


충고란, 대개 자신의 후회를 남에게 전달하는 과정이다. 정답에 관한 얘기라기보다는, 오답에 관한 얘기인 것이다. 충고의 이러한 특성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일도 많다. 늙은 부모의 충고를 젊은 자식은 '잘 하지도 못했으면서'라는 삐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결국 대화는 단절되고 만다. '난 그렇게 살진 않을 거야.''나처럼은 살지 마라.'는 악수를 하지 못하고 등을 돌린다.

"엄청 오래 걸렸군, 여기 오는 데 10년 걸렸어.
(생략)
당신은 전성기라도 있었지, 난 아무 것도 없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요!
그래요, 시합을 제안 받았어요. 물론 싸운다고 했죠.
안 한다고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 록키에게 시합이 잡히고 나서야 찾아온 트레이너 미키. 그를 향한 록키의 대사 중.


록키에게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이 '10년 만의 악수'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거다. 둘은 평생 악수를 하지 못하다, 하나가 죽고 나서야 그 빈자리에 손을 내밀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때까지도 상대를 원망하거나. 부모의 무덤에 엎드려 애처럼 우는 사람들은 모두, 뒤늦은 악수를 청하고 있는 게 아닐까.


3. 전성기를 위한 자기개발


올 여름 개인적으로 '건강한 몸만들기' 프로젝트를 하던 때의 일이 떠오른다. 운동을 시작하려고 이것저것 알아보다 보니, 준비할 것들이 많았다. 먼저, 한 친구가 "운동을 제대로 하려면, 런닝화가 하나 정도는 있어야지."라고 말했다. 그래서 런닝화를 알아봤다. 또 다른 친구는 "운동할 때 입을 옷은 있어?"라고 물었고, 난 '맞아. 운동할 때 입을 편한 옷이 필요하지.'라며 옷도 알아봤다.

식이요법을 위한 먹거리도 문제였다. "이왕 할 거면, 단백질 섭취를 늘려가며 효율적으로 하는 게 좋지 않겠어?"라는 말에, 닭 가슴살도 알아봤다. 닭 가슴살만 먹긴 아무래도 어려우니 단백질 보충제를 알아보라는 말에 보충제도 알아봤다.

내가 운동을 미뤄두고 '알아본 것들'은 위에서 이야기 한 것들 외에도 헬스클럽, mp3 플레이어, 운동일지, 물통, 체중계, 덤벨, 가정용 사이클, 줄넘기, 짐 볼 등이 있다. 모두 구입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 '알아보기 위해 소비한 시간'과 '가격비교를 하던 시간', '필요 없는 이론이나 정보를 훑어 본 시간'등은 내가 운동을 한 시간보다 훨씬 많았다.

'사지 못한 것'들은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좋은 핑계가 되기도 했다. 의지부족은 mp3플레이어가 없어 운동에 집중하기 어렵다는 핑계로 덮였고, 게으름은 제대로 된 런닝화가 없어 운동하기 어렵다는 핑계로 덮였다. '어찌되었건, 지금 바로 시작하자.'고 마음을 먹기 전까지는 계속 '사지 못한 것들'에 책임을 회피하며 시간을 보냈다.



▲ '사지 못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내일'이란 결과는 '오늘'이란 원인 때문에 벌어진다는 것. 자꾸 잊게 된다. 계속 '오늘'말고도 다른 이유들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누구처럼 좋은 형편이 아니라거나, 사야 할 뭔가를 사지 못해서 라거나, 뭔가를 할 환경이 안 된다는 등의 생각들.

충격흡수가 전혀 안 될 것 같은 운동화와, 남의 눈을 신경 쓴다면 아무래도 입기 힘들 것 같은 운동복. 목에 수건 하나 덜렁 건 채 도시를 달리는 록키의 '헝그리 정신'이 말해주고 있는 건 이런 거 아닐까.

"어찌되었건, 지금 바로 시작해라. 핑계대지 말고 달려라."


그런 록키 횽아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근데, 그렇게 딱딱한 아스팔트에서 달리면, 무릎 상하지 않아요?"라고 묻고 있는 나란 녀석은, 참.


난 사실 <록키>를 다시 보기 전까지, 이 영화의 결말을 잘못 알고 있었다. 시합의 후반부까지 실컷 두드려 맞던 록키가, 경기장에 찾아 온 여자친구 '애드리안'을 보고 힘을 내 상대를 이기는 것으로 말이다. 아마 겨드랑이에 털도 나기 전인 꼬꼬마 시절에 본 영화였고, 이후 많은 매체에서 <록키>를 패러디 하며 내가 오해하고 있던 결말로 재구성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정말, 더 바보스럽기도 힘든 오해였다. 이건 뭐 <레미제라블>을 그냥 좀도둑 장발장 얘기로 알고 있는 것과 뭐가 다른가.



▲ 록키가 "애드리안-"을 외치는 장면을 보고 울지 않는 사람도 있을까?


얻어맞기만 하던 록키가 만신창이가 되어 다운을 당했을 때, 늙은 트레이너 미키가 "엎드려. 그냥 쓰러져 있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부터 나는 울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상대는 강하다. 이기기는커녕, 서 있기도 힘들다. 그래서 계속 두드려 맞다가 쓰러졌다. 쓰러져도 괜찮아. 너 젖 먹던 힘까지 낸 거, 내가 알아. 그냥 쓰러져 있어. 괜찮아. 다 괜찮으니까 그만 얻어맞고 쓰러져 있어. 내가 알아. 

록키는 일어선다. 그가 '이기진 못해도 좋으니, 경기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 두 발로 서 있는 거야. 그럼 그게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뭔가를 이뤄낸 순간이 될 거야.'라고 한 다짐을 지키기 위해. 쓰러져 있으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다. 사이클 선수 랜스 암스트롱도 이런 얘길 하지 않았던가.

"고통은 잠시 참아내면 되지만, 포기는 영원한 상처로 남는다."

- 랜스 암스트롱. '투르 드 프랑스'를 7연패 한 사이클 선수.


경기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린다. 록키는 링 위에 서 있다. 사람들은 열광한다. 언론에서는 앞다퉈 록키에게 질문을 해 댄다. 판정을 알리는 소리와 관중들의 함성 등으로 요란하다. 그 순간, 록키는 오로지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를 뿐이다.

"애드리안-"


나란 놈도 뭔갈 해 냈어. 사람들이 형편없다고 한 놈. 전성기도 없는 놈. 그래서 열두 살짜리 소녀한테도 무시당하던 놈.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고 생각했는데,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뭔가를 이뤄냈어. 경기가 끝날 때까지 링 위에서 버텼어. 앞이 안 보여서 눈을 찢어 가면서 버텼어. 해냈어. 애드리안. 지금 막 종이 울렸어. 애드리안.



▲ 두 발에 힘주고 서 있는 거다. 전성기가 어떻든 간에,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 버텨보자.

*본문에 사용된 스틸컷은 문화체육관광부 저작권법 제28조에 의거해 사용하였으며,
사용된 스틸컷의 저작권은 모두 유나이티드아티스츠(United Artists)사에 있음을 밝힙니다.
Rocky(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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