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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친과 1년 째 애매한 사이로 지내는 중. 우린 무슨 관계일까요?

무한 2017. 11. 27. 22:48

이십대 후반이 되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계기가 줄어들고, 거기다 낯을 가리는 타입이라 새롭게 만난 사람들과도 이렇다 할 관계를 만들지 못한다면, 아무래도 새 사람보다는 이미 익숙한 ‘과거에 연이 닿았던 사람들’과의 관계를 복원하려 하곤 한다.

 

특히 내년에 나이 앞자리가 바뀌는 스물아홉쯤을 살고 있을 땐, 이제 결혼까지 생각하며 만나야 하는데 언제 또 새로 만나 친해지나 하며 의기소침해질 수 있고, 연애를 안 해 본 것도 아니라서 새로 만나 겪게 될 일들을 떠올리며 시작도 전에 미리 버거워 할 수 있다. 이전 연애를 하며 감정 소모한 것에 지친 상태라, 새로운 사람에 대한 설렘이 귀찮음을 못 이기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런 이유로 인해 자신의 이전 연애들에서 유물을 발굴하려 하는, 또는 과거에 연이 닿았던 상대로부터 연락이 왔을 때 가볍게 대응하진 못하고 거기서 가능성을 찾으려 하는, 그런 일들을 벌이곤 한다. 몇 년 전 사귄 적 있던 구남친이나 과거의 썸남이 생각지도 않았던 연락을 해 안부를 물으면, ‘나랑 다시 만나보려 연락한 걸까?’하는 생각으로 그 관계에 다시 빠져들곤 하는 것이다.

 

이유야 어쨌든 뭐 그렇게 다시 연이 닿아 만나보기로 하는 거라면, 나도 비슷한 사연 계속 읽어야 하는 일 없으니 참 좋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개의 경우

 

-상대도 비슷한 상황에 비슷한 생각을 하던 중이라서

 

연락을 한 것이거나, 그냥 외롭고 심심한 와중에 문득 떠올라 졸업앨범 한 번 펼쳐보듯 그렇게 연락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게다가 그 ‘구남친들의 상황’은

 

-회사 그만두고 잠시 쉬는 중.

-사업이 잘 안 돼 대출 알아보는 중.

-준비하던 시험 접고 다른 일 찾아보는 중.

-모임 내 갈등이 있어 모임 탈퇴하고 그냥 지내는 중.

 

등으로, 이상하리만치 비슷비슷하다. 미래나 대인관계에 대한 피로감을 느끼던 중이라거나, 자신감이 거의 방전된 상태일 때 연락을 해오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반에 진중함도 없고 깊이도 없는 이 관계는 오랫동안 유지되기도 한다. 여전이 한쪽에게 마음이 남아있다는 걸 확인하곤 ‘자신감 충전소’로 지정한 채 방전될 때마다 찾아와 충전하고 가는 경우도 있고, 자신의 일상을 다 누리면서도 아무 책임 없이 즐길 수 있는 이 관계를 이용하기도 한다.

 

평소에는 팽개쳐두었다가도 심심한 날 이쪽이 좋아하는 머핀 같은 거 하나 사오면 따뜻한 밥도 지어 먹여주니 상대는 그냥 그렇게 지내는 것인데, 밥 짓는 이쪽에서는 그걸 ‘가능성’이라 여기며 점점 그러다가 상대도 정착할 거라 착각하곤 한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 봐도 이렇다 할 말이 없어 관계에 대한 정의를 부탁하면, 상대는

 

-지금 내 상황이 누구를 사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이건 너의 문제도, 우리의 문제도 아닌 내 문제다.

-사실 네가 그렇게 기대할까봐 연락 안 하려고 했다.

-너 실망하는 모습 보면 나도 마음이 안 좋다. 미안하다.

 

등의 이야기로 발을 뺀다. 너를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다든지, 다른 여자들이랑은 헤어지고 생각도 안 나는데 너는 생각이 난다든지, 그냥 상처 받지 않고 너도 마음 편하게 나 만나면 안 되냐든지 하며 여지도 남기며 말이다.

 

그게 무슨 핑계든 어쨌든 결론은 ‘너랑 진지하게 만날 마음 없음’인데, 그러면서도 상대는 이 관계를 유지하려 가끔씩 몰아서 잘해주며 이쪽에 대해 잘 아는 부분들을 활용해 마음을 흔들기에, 이쪽은 그 관계를 놓지 못한 채 계속 기대하고 기다리게 된다.

 

“그냥 딱 이정도만이라도 좋아요. 더 안 바라요. 상대가 결혼 생각 없거나 결혼이 부담스러워서 절 못 만나는 거라면 결혼 같은 거 안 해도 좋아요. 그냥 지금 만나는 것처럼, 가끔 여행 가는 것처럼, 우리 집에 와서 같이 밥 먹고 티비 보며 얘기하는 것처럼, 그렇게 만이라도 살 수 없을까요?”

 

무슨 마음으로 그런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르는 건 아니지만, 안타깝게도 상대는 현재 ‘그 정도는 해야 이쪽이 이런 애매한 관계를 접지 않을 것’이기에 그만큼 해주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자신이 연락했는데 이쪽이 잘 받아주며 리액션해주지 않거나, 만나자고 했을 때 다른 약속이 있다며 거절하거나, 너희 집에 가겠다고 했는데 못 오게 한다면 그 모든 호의는 거두어질 것이다.

 

더불어 이 관계가 안 사귀고 자기 생활하면서 어쩌다 찾아가도 충분히 만나고 즐길 수 있는 관계니, 그게 가능한 상황에서 굳이 사귀며 터치 받거나 연인으로서의 의무를 지킬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너랑 연애할 생각 없다’는 걸 살짝 돌려 말하면 얼마쯤은 찬바람불지만, 다시 또 며칠 지나 안부를 핑계로 연락하면 이쪽은 버선발로 달려 나가지 않는가. 상대는 그걸 잘 알고 있으며 일 년 동안 충분히 학습했기에, 앞으로 연락하지 말라고 이쪽에서 강하게 말해도, 훗날 다시 연락해선

 

“이건 진짜 아무 의도 같은 거 없이 안부 물으려 연락한 거다.”

 

라는 이야기를 하며 안부 인사를 핑계 삼아 다시 또 얼마간 연인처럼 지내려 할 수 있다.

 

 

내가 이런 관계를 참 무서워하는 이유가, 보통 이렇게 엮일 경우 평균 3년을 저 ‘구남친의 늪’속에 빠져 살기 때문이다. 1년 정도는 기대하며 만나보고, 1년 정도는 체념한 채 에라 모르겠다 하며 만나며, 나머지 1년 정도는 막장까지 확인하면서도 미운 정도 정이라고 끊어내지 못해 만나곤 한다. 스물아홉에 다시 연이 닿아 한 3년 빠져있다 정신 차려보면, 서른둘이 된다. 그땐 그간 그만두라고 말리던 지인들도 지쳐서 죄다 포기한 상황인 경우가 많으며, 3년 지났다고 해서 안 힘든 것이 아니기에 그때도 힘들다 하소연하면 남들은 ‘얘 또 시작이네’하며 제대로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상대가 무슨 서른다섯까지 둘 다 솔로면 결혼하자고 했든, 부모님 소개해주며 너랑 결혼까지 생각하는 마음도 분명 있다고 했든, 이번에 하는 일만 잘 되면 정식으로 만나 볼 생각이 있다고 했든, 너는 다른 여자와 달리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했든, 지금 안 되는 건 나중에도 안 될 가능성이 높으며, 그렇게 보상을 기다리며 아무 말 않고 상대가 하라는 대로 하며 지냈던 시간은 결코 다시 찾을 수 없다는 걸 기억했으면 한다.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정말 다시 잘 생각해보길 바란다. 상대와 이전에 사귄 기간이 한 3년 되는 까닭에 정말 반은 가족처럼 되어 그 관성 때문에 한 1년 미련 갖는 거라면 나도 이런 얘기를 안 하는데, 대부분 3~5개월 만났으며 사실 사귈 때에도 이렇다 할 공감대나 애틋한 교감 없었으면서 미련과 기대를 기반으로 몇 년씩 허송세월하기에, 뜯어 말리는 마음으로 이렇게 글을 적는다.

 

일부 질긴 구남친들의 경우 아무 제약 없이 즐거움만 맛볼 수 있는 이 관계를 쉽게 포기하지 못해, 여자 쪽에서 연락하지 말라고 한 뒤 폰 번호를 바꾸고 이사를 가버려도 여자의 지인에게까지 연락해 어떻게든 다시 접촉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이러면 또 여자 쪽에선

 

‘정말 내게 마음이 1도 없는데 이렇게까지 하겠어?’

 

라며 다시 기대하고 희망하기 마련인데, 그건 애정과 상관없이 그저 추격본능 때문에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이며, 그렇게 찾아내고 나서도 ‘자기가 그러고 싶을 때만 그러는’ 사람과는 진지한 관계를 이어갈 수 없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이미 그 늪에 허리 이상 빠졌다면 나오는 것도 힘들 것 같고 애써도 쉽게 빠져나올 수 없어 내 이런 얘기는 한 6개월 후에나 좀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다 할 수 있는데, 그런 대원들은 어쩔 수 없지만, 아직 무릎 정도만 빠진 대원들이 있다면 내가 내민 이 손을 잡고 얼른 빠져나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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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슬픈 눈 보기 싫어서 연락 안 하려 했었대요." 근데, 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