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형은 뭐랄까, 좀 꿋꿋해. 고교시절 전교생이 이질로 고생해 뉴스에 날 때에도 엄청난 소화 능력을 자랑해 혼자 멀쩡했고, 지금도 꿈이 생명연장일 정도로 강인한편이야. 물론 기침이 며칠간 심하게 날 때나 명치 아랫부분이 아플 때는
‘아…. 올 게 왔구나. 담배도 술도 남보다 많이 했으니 뭐….’
라며 체념하긴 하지만, 다시 괜찮아지고 나면 걱정 따윈 개나 줘버리라면서 빈속에 찌르르하며 들어오는 독한 술을 찾지.
허세를 부리는 건 아니야. 허세를 부릴 것 같으면 약국 앞에 줄 서서 오늘이 내 요일이 맞나 민증을 확인하며 ‘마스크만 주면 되는데 왜 이리 오래 걸리지?’ 하는 고민 같은 걸 하지 않겠지. 난 소중하니까 참새 같은 소시민인 양 줄 서서 마스크를 사긴 하는데, 사서 잘 쓰진 않아.
2.
흰뺨검둥오리와 박새, 오목눈이와 오색딱따구리, 족제비를 코앞에서 볼 수 있는 곳에서 일을 하게 됐어. 이렇게 얘길 하니 무슨 수감생활을 하는 줄 아는 지인이 있던데, 그런 건 아니고 여차저차 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 인생이란 원래 여차저차의 연속이잖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내 취미 중에 그런 게 있어. 어디를 지날 때, 그게 난생처음 지나는 길이라 해도
‘이 길을 내가 훗날 이러저러한 이유로 완전히 다른 상황이 되어 지날 수 있겠지.’
라는 상상을 해보는 것. 근데 삶은 더 버라이어티한 까닭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습으로 그 길을 지나게 하더라고. 학창시절 시간을 죽이며 지냈던 거리를 외근의 이유로 지난다든가, 친구가 산불을 냈던 마을 근처에서 누군가와 인사를 한다든가 그런.
3.
노멀로그를 10년 넘게 운영하며 가지고 있던 자부심 중 하나가 ‘술을 한 모금이라도 마시고 쓴 글은 하나도 없다.’라는 것이었는데, 오늘은 그 자부심을 내려놓게 되네. 물론 방금 막 마신 건 아니고, 두어 시간 전에 마시고 들어와선 ‘검독수리’를 검색하다가 또 여자저차 해서 이렇게 노멀로그에 들어와 글을 쓰게 된 거야.
근데 어떻게 보면 이게 또 잘 한 거지. 안 그랬었으면 ‘각 잡고 소상히 그간의 일들을 이야기 하며 정리된 한 편의 글을 써야지.’ 하는 생각에 손도 대질 못 했겠지. 하지만 알코올이 내 소뇌에 끼친 영향을 봐. 목 마르다며 벌써 두유를 두 팩이나 마시게 만들었잖아. 두유 노?
하지만 아쉬운 점도 하나 있어. 텐션이 이 정도가 아니었다면, 저 위에서 말한 새 이야기를 보다 자세히 했을 거라는 거야. 직박구리와 딱새, 그리고 해오라기와 할미새로 추정되는 녀석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겠지. 요즘 새들에게 백미를 주며 친해지고 있다는 이야기, 그리고 종종 닭들에게 먹이 줄 일이 있다는 이야기들까지 말이야.
4.
지금은 시간이 생긴다면, 노멀로그에 새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보다, 잠깐이나마 낚시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좀 더 큰 것 같아. 열쇠고리만 한 우럭이라도 좋으니, 실컷 입질을 좀 보고 싶어. 찌가 쑥 들어가는 걸 본지도 오래됐고, 펄떡이는 물고기를 손으로 쥔 채 우주 같은 눈동자를 들여다본 지도 꽤 된 것 같아.
낚시엔 여러 종류가 있지만, 내가 해본 것 중에 제일 재미있었던 건 찌낚시야. 정통 찌낚시는 아니고 변태채비라고 하는 건데, 루어대에 합사를 그대로 쓰면서 거기에 3호 구멍찌와 3호 추, 그리고 세이코 12~16호 바늘 정도를 달아서 하는 낚시야. 동해, 서해, 남해 어디서든 통하는 채비인데(아, 상황에 따라 바늘을 전어 카드채비 바늘로 바꿔 달면 되긴 해. 추와 찌는 그대로 쓰고), 어디든 방조제 찾아가서 수심 2~3미터 정도 주고 하면 뭐라도 꼭 잡혀서 손맛을 보긴 할 거야. 나 혼자만 알고 있으면서 썩히긴 아까운 즐거움이니, 기회가 된다면 한 번 해봐.
5.
검독수리가 진짜 멋있는데, 아쉽게도 내가 있는 곳의 최상의 포식자는 까마귀야. 어제 아침에 맹금류 우는 소리를 들은 것 같기는 한데, 여유롭게 찾아볼 수가 없어서 소리만 들었어. 혹시라도 보게 되면, 그게 뭐였는지 꼭 알려줄게. 육감으로는 아마 그게 새홀리기 따위였던 것 같은데, 제발 황조롱이라도 되었으면….
이도 저도 안 된다면, 좀 더 지나 붉은머리 오목눈이 둥지에 탁란한 뻐꾸기 유조라도 찾아볼 테니,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거라는 걱정은 하지 마. 여기 새 진짜 많아. 영상으로든 사진으로든 꼭 공유할게.
밤이 깊었네. 아침을 위해 이만 애기망원이라도 챙겨놓고 자야겠다. 자 그럼, 좋은 꿈 꾸고, 힘내서 또 하루 살아보자고. 형 걱정은 하지 말고, 오늘 하루 어떻게 맘껏 즐길지 걱정하고. 알았지? 또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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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복치2020.09.25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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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8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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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둘2020.10.07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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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2020.10.11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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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님 글의 감칠맛은 여전하네요. 근데 알콜때문에 소뇌가 일을 잘 못했나봐요. 최상의->최상위
무한님 섬세한 관찰력과 통찰력이 많이 아까워요. 요즘은 동영상이 대세라 유투브에 도전해보심 어떨까요. 카메라 울렁증이 예상되지만 몇번 하다보면 나아질꺼예요. 뭐하시면 얼굴 안 내놓고 그냥 간단한 삽화로 화면처리하고 나레이션 하는 채널도 있더라구요.
일산독자하나2020.10.19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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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처럼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댓글놀이는 절대 안 해주실 거 알아요
대신 생일 맞이 글 하나만 투척해주시면 안 될까요+_+?
윗분 말씀처럼 유튜브 간절히 소망합니다.
(누군가 노멀로그 글을 교묘하게 짜깁기한 영상을 목격한 적 있네요 ㅂㄷㅂㄷ)
린2020.10.19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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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뭐2020.10.20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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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보고 싶습니다!!!!!!!
판자2020.12.11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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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2020.12.16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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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현마이갈비2020.12.17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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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님2020.12.23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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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싶어 가끔 들어오는데 오랫동안 안오시네요 ㅠㅠ
잘 지내시는거죠?
ㅇㅇ2020.12.26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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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당2020.12.27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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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숑2020.12.28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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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양2020.12.28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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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뿅뿅2020.12.29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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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2020.12.3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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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과 많이 바쁘신가보네요.
오랜팬2020.12.30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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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곰2020.12.31 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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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뭐2021.02.20 03:3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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