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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글모음/작가지망생으로살기

내 차를 털어간 꼬꼬마에게 보내는 글

by 무한 2009. 6. 4.
우리동네가 경기도 일산에서 게토(ghetto)라는 것은 똥꼬에 털이 나기 시작하던 열 일곱살 때 쯤 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건조대에 널어놓은 옷을 훔쳐가는 일이야 다른 동네에서도 비일비재 할 것이고 군대에서도 남의 이름이 적힌 빤스를 나도 가져와본 적 있으니 그렇다 손 치더라도 도대체 교복은 뭐하러 훔쳐가는지, 그거 가져가서 뭐하려고? 학교다니려고?

자전거를 묶어놓고 은행에 다녀오면 앞바퀴만 남아 있는 이 아름다운 동네. 이사갈 집에 도배와 장판 다 해놓고 새집증후군 없앤다고 며칠 환기 시킬겸 비워놨더니 그새를 못참고 베란다로 기어들어가 지네들 집처럼 술먹고 담배피던 소년 소녀들. '경찰서 갈래, 이삿짐 나를래?'라는 말에 묵묵히 책상과 가재도구들을 옮기던 그 아름다운 소년 소녀들.

어젯밤 내 차를 털어간 그대를 난 꼬꼬마라고 생각한다. 뒷자석에 버젓이 구글 수표가 놓여있었지만 그게 뭔지 모르는지 수표는 놔두고 그대는 나의 소중한 디스 일곱 갑을 가져갔다. 게다가 mp3가 가득담긴 usb를 가져갔다. 그 mp3를 내가 어떻게 모았는지 아는가? 무료회원 가입하고 몇 곡 다운받을 수 있는 사이트에 가입했다가 연장되면 요금 나가는지 모르고 계속 놔둬서 모기처럼 결재되던 그 usb란 말이다.

그대가 선바이저를 내려 내 통장을 찾아냈을때, 그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공이 여러개인 그 숫자에 '아싸 월척!' 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미안하다.

그 통장이 아직 정리를 안해서 그렇다. 아마 거기에 7천원 정도 들어있을텐데 만원 뽑으려면 그대가 3천원을 입금해야 할 것이다. 맨 앞장에 연필로 적어 놓은 네자리 숫자. 사실, 그건 내가 이런 상황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군가 내 통장을 가져가 돈을 인출하려는 시도를 할때 골탕먹으라고 적어 놓은 아무 상관 없는 숫자다. '도설비(도둑을 설레이게하는 비밀번호)' 정도로 이해했으면 한다.

덕분에 난 통장과 현금카드도 새로 만들고 고춧가루가 앞니에 껴 있는 은행직원과 (왜 그리 빼주고 싶던지...) 환율이 어쩌고 금이 어쩌고 하며 구글수표를 추심전매입하는데 성공했다. 기업은행에서만 해준다, 주거래은행만 된다 뭐 말들이 많아서 그저 집에서 읽기만 했는데, 그대 덕분에 은행까지 들리고 추심전 매입도 성공한 것이다.

회사에 도착해서 사장님께 말씀드렸더니, 역시나 쿨한 사장님께서는

"차에다 똥 안 싸놓은 걸 다행으로 여겨라"

라는 진리의 말씀을 들려주셨다.

그대의 생활고도 이해가 간다. 오죽하면 내 차를 털었겠는가. 뭔가 있을 것 같은 앞좌석 나무상자를 열었을 때, 내가 운전하다가 주전부리 하려고 넣어 놓은 아몬드와 호두를 발견했을 때 실망했을 그대의 표정이 눈 앞에 선하다. 그것 뿐이겠는가. 조수석 서랍을 열었을 때, 예전 사랑니 어택 덕분에 마련한 진통제와 쌍화탕을 보며 그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이색히 정체가 뭐야..'

뒷자석 발판에 있는 뼈다귀들과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런닝구를 보며 의문은 더욱 증폭되었을 것이다. 뼈다귀는 회사 개 주려고 모아놓은 거고, 런닝구는 안에 입고 갔다가 요새 날씨가 더워서 벗어 놓은 거다. 주변에 피가 떨어져 있어서 더욱 놀랐겠지만, 얼마전에 소 생간 싸게 판다길래 사다먹다 흘린거니 안심해도 좋다.

근데, 아무리 차가 엉망이어도 그렇지 담배를 훔쳐갈 것 같으면 보루째로 가져가지 알맹이만 빼가고 포장되어 있는 종이는 왜 버리고 갔는가. CSI의 그리썸 반장이 왔다면 그대는 벌써 잡혀서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빌고 있겠지만, 이깟 좀도둑질에 CSI가 출동해 줄 리도 없고, 경찰서 가서 USB와 담배 일곱갑을 도난당했다고 신고하기도 뻘줌해서 이번엔 그냥 넘어간다.

밥은 먹고 다니냐?

신한은행카드는 내가 정지 시켰고, 7천원 남아있는 국민은행카드는 아직 쓸 수 있으니 어디가서 순대국이랑 더운밥 먹으면서 왜 그랬을지 반성하길 바란다. 다음번에 또 내 차를 털지도 모르니 USB는 새로 구입해서 찬송가만 잔뜩 채워 놓으마. 그거 들으면서 회개해라.

그리고, 우리 한 번 만나자.

요즘 형이, 힘이 남아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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