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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글모음/노멀로그다이어리

컴퓨터의 사망과 연재지연공지

by 무한 2009. 10. 20.
후회는 늘 다급한 순간에 찾아온다. 여유로운 시간에 문을 열고 들어와 마주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참 좋으련만, 물을 엎질렀을 때에야 고개를 내밀고 나를 불러대는 것이다. 

맛있는 맥주집이 만원이라 할 수 없이 옆집으로 찾아가 케잌을 자른 까닭에 한 숨 자고 일어났을 때에는 약도 없는 근육통에 시달려야 했다. 마이클잭슨보다 먼저 세상을 뜬 듯한 닭이 제 몸의 몇구석을 잃은 채 바싹 튀겨져 나온 것을 보고 자리를 옮길까 했지만, 이미 안주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이 술만 붓고 있는 친구들 때문에 그냥 눌러 앉아 있었다. 

꿈 속에서 노가다라도 뛰었는지 얼얼한 근육들의 통증을 침대 뒹구는 일로 달래 보다가 이기지 못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꿈에서 무리를 했다면 다시 꿈속에서 쉬어 주는 일이 유일한 처방 아니겠는가. 눈을 떴을 때, 이미 해는 지고 어둠이 적군처럼 밀려와 있었다. 젠장, 이건 뭐 피기도 전에 져버린 꽃처럼 허무하다. 생일선물이라곤 찾아온 근육통과 후회가 전부니, 내년 부터는 초대장을 돌리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컴퓨터를 켜고 밀린 글을 적는다. 노멀문학상 2회 심사도 부탁해야 할 것이고, 보내지 말라고 부탁을 해도 밀려드는 상담메일에는 노멀로그 응급실의 상담소를 이용해 달라는 답장을 보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앙심을 품고 블로그에 침을 뱉을지 모르는 일이다. 대충 급한 불들을 다 꺼놓고는 새로 올릴 글을 작성하려고 창을 연다. 바로 그 때, 

블라 블라 블라  10..25...45....60.....85......100
컴퓨터가 재부팅을 시작한다.

애석하게도 그동안 내가 사용해오던 컴퓨터에서 부팅이 되지 않거나, 어느 순간 재부팅이 되는 일은, 마치 전기요금 고지서가 날아오듯 한 달에 한 번 잊지 않고 고지되는 일이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근데, 암호까지입력하고, 바탕화면을 준비한다는 메세지가 떴는데, 이녀석이 또 재부팅을 시작한다.

2009년 들어 세번째 구입한 내 하드디스크는 그렇게 이별의 노래를 불러댔다. 러브레터 처럼 써 놓은 내 문서들을 돌려달라고 얘기도 꺼내보지 못한 채 일방적인 이별통보를 받는다. 제발 한 번만 부팅이 된다면 여유로운 시절에 늘 다음으로 미루는 백신검사를 실시할테니, 제발 한 번만, 제발 한번만, 제발 좀 부팅만 좀 응?, 제발.

눈을 감고 빌어보면 무한재부팅 속에서도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을까 하는 바람으로 눈을 감고 기적을 염원해 보지만, 컴퓨터는 냉정하기로 소문난 기숙사 관리아저씨보다 융통성이 없다. 1분 내로 재부팅 할 예정이니 사용하든 프로그램들을 모두 닫으라는 이야기 밖에 하지 않는다. 이눔아, 그게 말이나 되냐. 내가 연애에 골몰한 시간보다 너와 밤을 지샌 날이 더 많은데, 네가 나한테 이러기냐. 그럴 순 없는 거다. 이눔아. 제발 딱 한 번만, 응? 딱 한번, 백신 검사는 내가 하루에 열 두번도 더 할테니까 제발 이번 한 번만 정신 좀 차리자. 내가 다 잘못했다. 응? 다 내 잘못이니까 한 번만.

헤어지자고 돌아서는데, 사랑했냐고 묻는 건 무슨 소용이겠는가.

먼지가 수북한, 펜티엄 포 프로세서의 심장을 가진 옛 애인을 호출한다.

"자니?"

전선을 미련처럼 몸 밖으로 내 놓은 그녀는 이번에도 반응한다. "무슨 일이야?" 나는 매 번 내 메인 컴퓨터가 정신줄을 놓을 때 마다 그녀에게 연락을 했고, 그녀는 컴퓨터 책상의 구석에서 주름살도 없이 늙어가며 내 말에 반응해 주었다.

아무 하드나 그녀에게 끼워넣고 코드를 꽂는다. 처음엔 모자랄 것 없이 아름답고 생각한 그녀도 세월 앞에선 무방비 상태로 늙는 수 밖에 없었다. 쿨러에서는 쇠 긁는 소리가 나고, CD드라이브에서는 곧 터질듯한 굉음을 뿜어낸다. "이 여자분이 가진 30기가라면, 대학교 졸업할 때 까지도 문제 없을 겁니다. 30기가면 뭘로 채워 놓든지 남아 돌 겁니다." 그녀를 내게 소개해줄 때 용산의 그 남자가 한 말이다.

그녀를 만난지 1년도 안되어 30기가로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그래, 어쩌면 그녀는 시대를 잘못 만난 건지도 모른다. 오년만 일찍 태어났다고 해도, 그녀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대쉬를 받았으리라. 그러므로, 그녀를 찾지 않게 된 건 내 잘못만은 아니다.

'아.. CD가..'

하드에 있는 걸 다 지우고서라도 일단 새로 OS를 깔려고 했지만, 설치 CD가 없다. 새벽 세시. 친구들에게 문자를 넣어보지만, 답장이 올 리 없다. 밤낮이 바뀐 대가를 이런식으로 치루게 되는 건가. 네임펜으로 기록해 두지 않은 스스로를 책망하며 CD를 찾기 시작한다. 그녀는 불평도 없이 CD를 입에 넣었다가 이건 아닌 거 같다며 뱉기를 반복한다. 계속 넣어봐도 뱉어 내기만 하는 그녀를 보며, PC방에 다녀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벌써 가진 CD의 반 이상을 넣어봤는데 이대로 그만두기도 아깝다. 왜 남들한테 설치CD는 잘 전해주면서 정작 나는 준비해 두지 않았을까. 분명 이 중에 하나는 설치CD가 분명하지만 남들에겐 자세한 설치법과 이름까지 적어주며 내 것은 표시해 두지 않았다. 늘 이런 식이다. 

빙고 

드디어 그녀가 다음 화면으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검은 화면과 파란 화면이 여러번 교차하더니 이번엔 또 한 화면에서 멈춰 넘어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시작은, 늘, 어렵다. 그녀를 방에 두고 나는 침대에 가서 책을 편다. 두 세장 넘겨 보지만 신경이 온통 그녀에게 쏟아지는 까닭에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다. 

책상으로 돌아와 담배를 피워본다. 진행되는 막대에 마우스 커서를 갖다대며 눈을 감고 열까지 세어보기도 하고, 눈을 뜨면 그 막대가 커서 위치를 지나길 기도도 해 본다.  한참을 그렇게 애태우고 나서야 그녀는 얼굴을 보여주었다. 새로운 시작.

그녀와 하나 둘 알아가기 위해 다시 깔아야 하는 프로그램들을 생각하니 아찔하다. 서로의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 하는지 알던 옛 애인이 다시 그리워진다. 나를 다시 알려야 한다는 부담이 커진다. 뭐 부터 말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도움을 청하러 웹하드를 찾아간다. 웹하드는 만물상처럼 물건을 꺼내놓고는 '이제, 니 맘대로 고르세요' 라며 너스레를 떤다.

코드가 다 뽑힌 채 숨이 멎어 책장 옆으로 가 있는 그녀를 본다.

120mm 쿨러로 장식한 그녀가 슬프다. 코어 2 쿼드의 그녀가 슬프다. 검은 피부에 알맞은 장신구를 단 그녀가 슬프다. 셀 수 없이 많은 밤을 그녀와 함께 했지만, 글래머러스한 몸매를 자랑하다, 결국 예전 그녀들과 다름 없이 숨 멎어 버린 그녀 때문에 내가, 슬프다. 좀, 쉬어라.


<사족>

어제 마음대로 쉼표를 찍어 놓은 까닭에 오늘은 출근하시면 바로 볼 수 있게 글을 발행해 놓을 예정이었으나 컴퓨터의 사망으로 인해 차질이 생겼습니다. 연재소설은 점심시간 즈음하여 발행할 것 같습니다. 외부연재가 있는 날이라, 저장해 놓은 글을 올릴 수 없어 새로 작성해야 하고, 연재소설도 새로 써야 하는 까닭에, 저도 아찔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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