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언제부터 박사님들과 친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추측해 보건데, 아마도 어렸을 적 심하게 아팠던 동생 때문에 몸에 좋다는 것을 찾기 시작한 이후가 아니었나 싶다. 지나가는 누가봐도 "어머 너무 귀엽게 생겼다" 라고 할 정도로 인형같은 외모를 자랑하던 동생은, 많은 한약을 먹은 뒤 옛 모습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지금은 일산 밤거리에서 가장 무서운 녀석으로 통한다. 나름 머리도 길러보고 스타일도 바꾸어 보는 등 많은 시도를 하는 것 같지만, 이미, 너무 멀리 왔다.(응?)
나에게도 엄마의 실험은 진행되었다. 정확히 기억나는 것은 아니지만, 초등학교 이학년 여름방학 때 쯤이었던 것 같다.
엄마 - 우리 식구는 비염이 심해서, 오늘부터 죽염으로 코 세척을 할꺼야. 무한이 부터 화장실로와
무한 - 응?
엄마 - 화장실로 와 봐
내 유년기의 기억 중 가장 끔찍했던 일을 꼽으라면, 그 날 엄마가 숫가락에 담긴 죽염 녹인 물을 내 콧구멍에 집어넣던 순간이라 말하겠다.
무한 - 우웨에엑, 켁 켁
엄마 - 그걸 삼키면 어떻게 해 뱉어야지
무한 - 엄마 나 못하겠어. 살려줘.
엄마 - 가만히 있어. 박사님이 이렇게 해야 한다고 했어.
무한 - 무슨 박사님?
엄마 - 아침에 티비에서... 가만히 있어.
약 일 년간 내 코는 죽염물 고문을 당했지만, 비염이 낫진 않았다.
그리곤, 그 시련의 순간이 지나간지 얼마 안되어 당근이 찾아왔다. 당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지만, 내게 당근이란 김치에 들어간 생강을 통째로 씹는 것 만큼이나 먹기 힘들다.
엄마 - 우리 식구는 다 눈이 안 좋으니까 오늘부터 당근을 먹을거야.
무한 - 엄마 그건 안경쓰면 해결 되는...
엄마 - 씨끄러. 당근이 얼마나 우리 몸에 좋은데. 베타카로틴도 풍부하고 또,
무한 - 베타카로틴이 뭔데?
엄마 - 몸에 좋은거야. 엄마가 주면 먹어. 토끼봐봐. 토끼가 당근을 먹으니까 그렇게 눈이 좋은거 아냐.
무한 - 토끼가 눈 좋다는 얘기는 처음 들어보는데..
엄마 - 토끼가 당근을 안 먹으면 눈이 빨개지는 거야.
무한 - 엄마.. 토끼 눈은 원래 빨간..
엄마 - 엄마가 주면 좀 먹어. 다 니들 생각해서 그러는거야.
당근을 열심히 먹었지만, 우리집 식구는 모두 안경을 쓰게 되었다.
우리 가족의 건강을 위해 그 외에도 질경이, 양파, 파프리카, 생밤, 두부, 오이, 파슬리, 샐러리, 알로에(이건 바르기도 했다), 다시마, 청국장... 많은 음식들이 지나갔다.
그리곤 KBS에서 <생로병사의비밀>이 할 때부터 였는지, 밥상이 바뀌었다.
엄마 - 우리 식구는 앞으로 고기 줄이고 채식만 할거야.
무한 - 고기가 없는 삶은 무의미해..
엄마 - 어쩔 수 없어. 암을 이기려면 채식을 해야해
무한 - 우리 식구 중에 암 걸린 사람 없잖아..
엄마 - 제일 무서운게 가족력이야.. 친할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셨잖아.
무한 - 아...
가족력으로 '설득의 심리학'을 마스터한 엄마는 그 후에도 계속 암을 강조했다.
엄마 - 이건 검은콩 감식초에 불린건데 오늘부터 밥 먹고 나서 먹을거야.
무한 - 앜ㅋㅋ 맛 없어.
엄마 - 맛으로 먹는게 아니라 약으로 먹는거야.
무한 - 토할 것 같아
엄마 - 이게 암도 치료해 주는거야.
무한 - ......
먹기 제일 힘들었던 것은 표고버섯 이었다.
엄마 - 표고버섯 갈은거야. 숨 쉬지 말고 마셔.
무한 - 이건 정말 토할 것 같아.
엄마 - 그러니까 숨 쉬지 말고 꿀꺽꿀꺽 마셔.
무한 - 그냥 반찬으로 먹으면 안돼? 갈아 먹어야돼?
엄마 - 불에 익히면 영양가가 다 파괴돼.
무한 - 이건 도대체 어디에 좋은건데?
엄마 - 다 좋아. 다. 암도 치료해주고. 식품중에 1위야. 1위.
무한 - 전엔 파프리카가 1위라며
엄마 - 이건 또 다른 1위야. 다 좋은거니까 마셔.
무한 ......
나는 TV를 보다가 어느 프로그램에서 한 주에 하나씩 병에 좋은 음식 1위를 뽑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방송을 놓친 엄마가 인터넷으로 다시 볼 수 있냐는 방법이 없냐고 물었을 때, 난 그거 다 돈 많이 내고 다시 봐야 하는 거라고 거짓말을 해버렸다. 살고 싶었다.
표고버섯과 비슷한 데미지를 가진 녀석이 있었으니, 양파였다. 하지만 고맙게도 양파는 엄마의 무분별한 박사님 사랑을 반감시킬 수 있도록 도와줬다.
당시 엄마는 '모든 야채는 익히지 않을 때 영양가가 제일 높다' 라는 이론과 '갈아서 마시면 흡수가 잘 된다'라는 이론을 가지고 있었고, 마침 양파가 등장했던 것이다.
엄마 - 양파를 먹으면 병에 안걸린데. 자, 양파 갈은거야.
무한 - 엄마. 이건 진짜 아니야. 양파를 갈아서 마시는 사람이 어딨어.
엄마 - 아까 그냥 마셔봤더니 토할 것 같아서 양배추좀 넣었어. 마셔.
무한 - 엄마...양배추 넣어도 토할 것 같은건 마찬가지야.
엄마 - 중국 사람들 봐봐. 양파를 먹으니까 병에 안걸리잖아.
무한 - 앜ㅋㅋㅋ 중국 사람이 왜 병에 안걸려?
엄마 - 마셔 얼른. 엄마가 다 니들 건강 생각해서 그러는거야.
무한 - ......
그 날 저녁, 우리 식구는 모두 배를 잡고 굴렀다. 미식거리는 양파의 냄새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강했고, 속쓰림과 울렁거림을 동반한 복통이 쓰나미처럼 왔다. 일가족이 응급실에 실려갈 뻔한 사건을 만든 뒤 엄마는 더이상 양파를 갈아먹자고 하지 않았다.
건강에 좋은 음식을 찾는 엄마에게 가장 이해가 안되는 부분은 바로, 박사님을 신뢰하는 것 만큼이나 '냉장고'를 신뢰한다는 거다.
무한 - 이거 요플레 유통기한 삼일 지났는데 버려?
엄마 - 그걸 왜 버려. 냉장고에 있던 거라 괜찮아.
무한 - 삼일이나 지났는데 뭐가 괜찮아?
엄마 - 발효식품이라 먹어도 돼. 더 발효가 된거야.
무한 - 뭐야... 그런게 어딨어. 버릴거야.
엄마 - 놔둬 그럼. 엄마가 먹게. 발효식품이라 괜찮다니까.
무한 - 아 엄마 이런 것 좀 먹지마. 내가 새로 사올께 버리자.
엄마 - 놔둬. 엄마가 먹을거야.
어느 날은 만두가 나왔다.
무한 - 올레~ 만두다~ 야 이거 아직도 나와? 요즘 납작한 것만 팔던데
엄마 - ......
무한 - ... 이거 언제꺼야?
엄마 - 냉동실에 있던거라 괜찮아. 먹어도 돼.
무한 - 앜ㅋㅋㅋㅋ 내가 군대 있을 때 유통기한 지난 거잖아.
엄마 - 괜찮아. 냉동실에 있던 건 먹어도 돼.
무한 - 엄마 제발.. 이런거 먹지 말자...
엄마 - 냉동실에 있던 건 괜찮다니까. 먹기 싫으면 놔둬. 엄마가 먹게.
무한 - ......
그런 엄마가 아프다. 무릎이 아프고 발가락이 아프고 귀 뒤쪽이 자꾸 아프다.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했더니 당 수치가 높다고 한다. 당뇨다. 합병증이 제일 무섭다는 그 당뇨다. 지금은 입에서 모래알을 굴리는 듯한 현미밥과 코를 막지 않고는 먹기 힘든 녹즙들을 마시지만 아무 소리 안하고 마신다.
걱정이 된다. 마음만 먹고 있던 제주도도 못 보내드렸고, 사랑한다는 말도 많이 못했는데 엄마가 아프니 덜컥 겁이난다. 사랑해서 계속 갈아주셨나보다. 파프리카도 알로에도 샐러리도 양배추도 아프지 말라고 계속 갈아주셨나보다. 걱정하지마 엄마, 이제 내가 갈아줄게.
사랑해. 엄마.
▲ 추천도 좋지만, 어머니한테 사랑한다는 말 꼭 하세요. 한 번이라도 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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