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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아, 미안하다. 생각해 보니까 딸일 수도 있겠다. 그저 "딸아!"보다는 "아들아!"라고 하는 편이 개인적으로 더 자연스럽기에 이렇게 부르는 거니, 훗날 딸인 네가 읽게 되더라도 악감정은 가지지 말길 바란다.

그러니까,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입장이며 속도위반을 한 것도 아닌 상황에서 이런 글을 남기는 것이 좀 의아할 수도 있겠지만, 아빠는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네 생각을 한다는 걸 알려두고 싶구나. 너는 지금 어느 곡식이거나 바람이거나, 비를 내리고 천둥을 치는 어느 에너지거나, 뭐, 아무튼 어떠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깊게 들어가면 골치 아파지니, 생명탄생의 비밀 같은 건 알아서 찾아보도록 해라.

아빠는 너를 키우기 전 다른 것들을 키워보며 예행연습을 하고 있단다. 경기도 근방의 하천에서 잡아온 민물고기들은 모두 요단강을 건넜고, 장수풍뎅이와 사슴벌레들은 하늘로 갔단다. 그리고 부화의 부푼 꿈을 꾸며 품었던 유정란은 두 달째 부화가 되지 않아 너희 할머니가 음식물쓰레기 봉투에 넣었단다. 이런, 절망적인 얘기를 해서 미안하구나. 기분을 상하게 하려 한 건 아닌데, 미안하다. 아빠가 이런 부분엔 눈치도 없고 소질도 없구나.

너와 미리 대화를 할 수 있다면, 세상에 태어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건지, 태어나고 싶다면 생일은 몇 월이 좋다고 생각하는지, 이름은 뭐라고 짓는 편이 적당한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그럴 방법이 없어서 안타깝단다. 아빠가 엄마와 상의한 후 최대한 좋은 방향으로 결정하마. 학창시절 방학 중에 생일을 맞으면 친구들에게 선물을 받는데 애로사항이 생기니, 7~8월과 12~2월은 리스트에서 삭제하고,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시즌도 피하는 등의 그런 일말이다. 3월도 학기 초반이라, 친구 녀석들과 아직 친해지지 않아 대충 넘어갈 위험이 있으니 5월 후반쯤이 어떤가 싶다. 어디보자, 10개월이니까, 그럼 아빠는 7월에...(응?)

농담이고,

아빠는 별자리가 천칭자리인 까닭에 다정하게 이야기 하거나 사랑을 표현하는 일에 서툴단다. 그게 별자리와 무슨 상관있냐고 할 지 모르지만, 아빠도 왜 이런 일에 서툰지 이유를 알 수 없기에 그냥 아무거나 갖다 붙인 거니 이해해 주길 바란다. 아무튼 아빠의 이런 특색으로 인해서 넌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라는 물음에 "둘 다 좋아."라는 대답을 해 놓고, 뒤에서는 "사실, 엄마가 더 좋지."라는 이야기를 할까봐 아빤 벌써부터 불안하단다. 아빠는 네가 물어볼 것에 대비해 별자리 이름을 외우고, 꽃 이름을 외우고, 곤충과 물고기 이름 등도 외우고, 가물가물한 국사와 세계사 등을 공부하고 있단다. 이런 노력을 감안해서라도 엄마만 좋아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아빠도 좋아해주길 부탁하마. 아빠는 네가 명절날 친척들에게 받은 돈에도 절대 손대지 않을 것을 미리 약속한다.

시간이 지나면 잊을 수도 있는 이야기들을 앞으로 종종 이렇게 편지로 미리 적어둘 생각이란다. 살다보면 그 이야기들은 침묵으로 변하거나, 달력과 함께 뜯겨 나가거나, 서로 다 알거라 생각해 생략하거나,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들에 치여 결국 마음에만 남아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할아버지와 아빠의 관계가 그랬단다.

네가 아빠에게 말하지 못하는 비밀이 있는 것처럼 아빠도 할아버지에게 그랬고, 할아버지 역시 아빠에게 그랬단다. 함께 집에 있을 때에도 아빠는 아빠의 방에서, 할아버지는 안방에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을 하며 서로 각자의 시간을 보냈단다. 아빤 할아버지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갈 때에도, 알맹이가 없는 근황이나, 친구 누구는 어떻다거나 하는 쓸데없는 얘기만 했단다. 네가 저녁시간 웹이나 일기장에 적어 넣는 것보다 훨씬 가볍고, 진심에서 먼 얘기들 말이다.

할아버지의 실수들을 증거로 마음속에서 할아버지에게 유죄판결을 내리기도 했단다. 사실, 이런 과정은 너에게도 찾아오리라고 생각한다. 어렸을 적 항상 '최고'라고 생각했던 아빠가, 점점 네가 세상에 눈을 떠 갈수록 작게 보이는 것 말이다. 작년의 너를 돌아보면, 지금은 말로 꺼내기 부끄러운 짓도 저지르고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것 자체가 쑥스러운 생각들도 했던 것처럼, 아빠도 그럴 수 있는 거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에겐 '최고'인 아빠이기에, 그 실수에 대해 더욱 엄격하게 바라보게 되고, 더 큰 실망을 하게 될 거라 생각한다. 아빠는 네 겨드랑이에 털이 나기 전까지 '우리아빠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할 테지만, 털이 난 직후부턴 네가 아빠 겨드랑이 털만 볼 생각을 하니 벌써 슬프구나. 아빠에 대한 어떤 판정을 내려야 한다면, 실형 보다는 집행유예를 부탁하마.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창 옆으로 메신저가 떠 있단다. 그리고 메신저 명단에는 할아버지의 이름도 보인다. 위에서 이야기 한 것들을 할아버지에게도 털어놓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단다. 할아버지는 이제 로그인 하실 수가 없으니 말이다.

덜컥, 겁이 났단다.

이런 이야기들을 너에게 못하고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쩔까, 아니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픈 말을 하거나 미움을 품거나, 생활에 바빠 그렇고 그런 대화들만 나누게 되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네가 아빠를 닮았다면 볕이 잘 드는 곳에 앉아도 마음속엔 어둠이 남아, 끝없이 침전하는 기분을 느낄 텐데, 그때, 아빠가 네 손을 잡아주고 싶구나.

지구에서의 한살이는 결코 길지 않단다. 나이가 들수록, 몇 밤을 자고 나니 몇 년이 지나가 버린 기분이 될 텐데, 그 짧은 시간동안 아빠는 너와 친하게 지내고 싶단다. 아무튼, 아빠는 치킨이 먹고 싶구나. 너만 치킨을 좋아하는 게 아니란다. 이 글을 본다면, 아빠도 좀 생각해주길 바란다. 양념 반, 후라이드 반, 무 많이.




▲ 여보, 아버님 댁에 귀뚜라미 풀어드려야 겠어요.(응?) 오늘은 가족들과 맛난 치킨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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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사람12010.10.12 13:4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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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적이에요
언제 사연한번 보낼게요 무한님

2010.10.14 11:3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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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보낸 '스키는 혼자 타야 기술이 는대'라는 문자를 보고 무슨 말인가 갸웃하다가 무한님의 블로그를 알게 됐어요. 쭈욱 눈팅만 하고 답글을 달 생각은 안했는데 오늘은 답글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

연애매뉴얼 시즌1에서도 비단 연애팁만 얻진 않았지만, 사슴벌레 이야기, 내쇼날동네그래픽 폴더의 글들에서는 특히나 무한님께서 갖고 계신 매력이 잘 나타나는 것 같아요.

이 글 읽다가 왠지 뭉클한 감정에 눈물이 났어요. 한순간 지나가는 감상이 아니라 뭔가 움직이게 하는.. '이렇게 해야지' 하고 마음먹게 하는 글 감사합니다.

좋은사람이되자2010.10.27 19:1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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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님 글 늘 잘 읽고 있습니다..
특히나 오늘 글은 더 좋네요,, 뭔가 뭉클하고,,
저도 표현하는 데에는 서투른지라 그동안 쭉 눈팅족이었는데 오늘은 그냥 지나치기 너무 아쉬워 남겨봅니다..
요렇게 조금씩 하다보면 좋아지겠죠,, ㅋㅋ
앞으로도 멋진 글 기대할게요,,

^^2010.11.09 11:1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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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눈팅만 했는데 이글은 댓글달게 만드는군요 무한님 글 정말 재밌게 감동적이게 잘쓰세요 뭉클하네요 글항상 잘읽고있어요!!^^

2010.11.11 10:4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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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생각의 깊이와
문장의 스킬은
완전 부럽습니다

우치2010.11.18 17:5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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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보기만하다 울컥하여 글 남깁니다. 처음엔 웃으며 읽다가 뒤에가서 눈물이 터지고 말았네요. 얼마전 10년 넘는 투병끝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거든요. 마지막의 지금은 할 수 없는 말이 너무 가슴에 와닿네요. 언제나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신현모양처2010.12.03 13:0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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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구멍 뜨거움과 뭉클함이 동시에...

저도 치킨.

후추2010.12.11 21:3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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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무한님 완전 멋있으심ㅋ

내스타일이심(응?)ㅋㅋ

아 맥아더장군 시 이후로 이런느낌 첨임ㅠ

완전감동ㅋ

갓난이2011.01.24 13:0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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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너무 무겁지도 않고 너무 가볍지도 않은
미래의 자식을위한 편지 정말 재밌게 읽었어요.

무한님의 글 솜씨에 다시한번 감탄하면서
더욱 좋은 글들 부탁드릴께요!
감사합니다^^

아이디만커플부대2011.01.26 07:1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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ㅜㅜ좋은 글 감사합니다!

봉봉2011.08.03 16:2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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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넘 감동받아서.
눈물이 다 ㅠ_ㅠ (회산데 어쩌죠 힝)

요즘 무한님의 블로그 덕분에 잼나게 살아요.

이니2012.05.05 01:3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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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이에요 끝에선 눈꼬리에 눈물도 맺히는..

이니2012.05.05 01:3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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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이에요 끝에선 눈꼬리에 눈물도 맺히는..

j2013.04.10 11:1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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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봤는데,
너무 좋은 구절이 있어서 일기장에 적어놨어요
무한님 글을 어쩜 이렇게 잘쓰시나요
특히 마지막줄..ㅋㅋ 정말 센스있으세요

얄얄2013.06.08 19:4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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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님은 좋은 아빠가 되실꺼 같어요.
깊이있으면서 센스 넘치시고 즐거운 가정 꾸리실 듯. ^^

무한님 닮은 딸 낳으시길. 헤헤

괭이 두 마리 주인2013.06.11 01:3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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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아이를 깨워 일정을 시작하느라
아기가 유난히 징징댔어요.
마음 속 검은 털 짐승이 점점
커지더니 커다란 입을 쩍 벌리면서
제 얼굴이 사납게 변하고
그 사나운 얼굴로 소리를 질러버렸네요

-좀 그만좀해!!!

그 순간의 아기의 얼굴이
그 질린 표정이, 오늘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요...

이 와중에 이 글을 뒤늦게 봐버렸으니..
애기 옷들을 개다 말고, 펑펑 우는건
당연한 순서겠지요...-_-

매일매일 잠든 아이의 땀에 젖은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생각해요..
내일은 더 많이 놀아줘야지..
더 예뻐해줘야지..
더 많이 사랑해줘야지..

하지만, 날이 밝아 눈코뜰새 없는
시간들이 시작되면,
그 마음들은 다 날아가 버리고
오늘처럼 아이한테 소리지르지나 않으면
다행이라 생각되니...

아무래도..신이 제 그릇이 너무 작아서
좀 넓혀보려 울애기를 보내신
모양이에요..-_-

마음속의
짐승을 키울게 아니라..
그릇을 키워야 할텐데..
ㅠㅠ

98172014.01.22 01:5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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ㅜㅜ저왜울고있죠...딸의입장이라그런가요

인생뭐있어2014.02.25 00:4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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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아름다운 글입니다. 눈물이 맺히면서도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네요. ㅠㅠ

사막2015.04.05 17:4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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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님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지갑에 imf2016.03.12 00:0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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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무한님 글은 진심이 느껴져요.
특히 누군가에게 대화를 직접 건네는 듯하고 설명하실때라던가. 정말 직접 상대방을 생각하며 진심으로 말하는게 느껴져요.
본받고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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