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도 남자지만, 사연의 주인공인 G양이 이 관계를 너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철저히 수동적인 관찰자 입장에서만 상대를 볼 게 아니라 좀 할 건 해가면서 결론을 도출해야 하는 건데, G양은 상대의 액션만을 기다리다가
‘내가 이 정도로 어필을 했으면 좋아하는 마음이 있다는 걸 상대도 알 것 같은데, 상대에게 아무런 리액션이 없는 걸 보니 나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음. 그러니 마음 접어야지.’
하는 생각을 할 뿐이다.
상대에게서 ‘마음이 있냐, 없냐’의 증거만을 찾으려 하기 전에, G양은 무엇을 했나 돌아보길 권한다. 열정적으로 연락을 한 것도 아니고, 상대가 술 한 잔 하자고 했을 때 매끄럽게 응한 것도 아니며, 문자대화에서도
“저도요.”
“ㅋㅋ 밖에 비오나?”
“넹 ㅋㅋ”
라며 말만 열심히 아꼈다. 그러면서 놀랍게도 저렇게 행동한 것이 ‘노멀로그의 매뉴얼대로 실천하려다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대체 무슨 매뉴얼을 어떻게 읽었길래 그런 해석을 하게 된 건지 나 역시 당황스러워 이렇게 매뉴얼을 발행하게 되었다.(G양은 날 ‘노멀님’이라고 불렀는데, 이렇게 호칭한 사연은 실제로 다루지 않는다) 아무튼, 시작해 보자.
1. 노멀로그 매뉴얼의 오해석.
내가 매뉴얼을 통해
- 언제든 상대가 부르면 나가는 '애니콜'이 되어선 안 된다.
라고 한 건, G양처럼 이렇게 상대와 애정전선이 형성되며 썸을 타게 될 때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 이야기가 등장했던 매뉴얼을 보면, 상대가 이쪽의 반한 마음을 이용해 휘두르려 할 때라든지, 아니면 사귀자는 말도 없이 스킨십 진도에만 관심을 두고 있을 때라든지 하는 경우다. 누가 왔다고 해서 덜컥 문부터 열고 확인하지 말라는 거지, 누가 오든 문 열지 말고 문 앞에서 스무고개만 하라는 얘기가 아니었다.
G양의 경우는 신원이 확실한 동료와 이제 막 가까워지는 상황이니, 상대가 끝나고 저녁 먹자고 하면 의심하거나 밀어낼 것 없이 만나도 된다.
“저는 상대가 제게 일 끝났냐고 물은 뒤에 뜬금없이 술 마시자고 해서 깜짝 놀랐거든요.(중략) 매뉴얼에서 그러셨잖아요. 애니콜에서 벗어나기! 그래서 돌려서 거절하곤, 역시 매뉴얼에 있는 대로 약속을 잡았어요. 금요일이 좋아, 토요일이 좋아. 선택지 주는 거요.”
아니 그 선택지를 주는 건, 보통 데이트 신청을 먼저 하는 쪽일 때 그렇게 하라고 권했던 건데, 왜 그걸 또 G양이 가져다가 거기다 써 먹는 건지….
상황이 다르고, 사람이 다르고, 경우가 다른데, 그렇게 막 가져다 쓰면 안 된다. 꾸러기 퇴치할 때 사용하라고 소개한 방법을 썸남에게 아무렇게나 써버리면, 뭘 시작해보기도 전에 막을 내릴 수 있다. 기회가 찾아왔을 때마다 G양이 그 기회를 전부 잡았다면 벌써 둘을 가까워졌을지도 모르는데, 매뉴얼을 이상하게 해석해 철벽같이 방어하며 상대를 밀어냈다는 점이 난 참 안타깝다.
G양을 연애유형에 따라 분류하면 ‘어쩌다 한 번씩만 적극적인 철벽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굳이 방어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매뉴얼을 참고할 것 없이, 그냥 마음 가는대로 좀 더 자유롭고 유연하게 행동하길 권한다. 아니, 사내 썸남이
“끝나고 맥주 한 잔 할래요?”
하면 바로 그 기회를 잡아야 하는 거지, 그걸 막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서
‘이것 봐라? 날 쉽게 보고 지금 당일 술 약속을 잡으려는 건가? 그렇게 쉬운 여자가 아니라는 걸 알려줘야겠군. 나랑 술 한 잔 하고 싶으면 정식으로 날짜와 장소를 잡은 뒤에야 마실 수 있다는 걸 알려줘야겠어.’
해서는 안 되는 거다. G양은 모태솔로부대원도 아니고 이전에 연애를 몇 번 해봤다면서, 왜 이렇게 흐름을 못 읽고 타이밍을 놓친 건지 모르겠다.
2. 부정적인 결과만을 기다리는 것 같은 모습.
G양이 이 관계에 임했던 태도를 보면, 결국 이 관계는 상대가 G양에게 관심이 없다는 게 드러나며 슬픈 마지막만이 존재할 뿐인 관계로 생각하는 것 같다. G양이 찾고 있는 건 오로지
- 상대가 날 안 좋아한다는 증거.
일 뿐인데, 그런 식이라면 상대가 열정적으로 들이대는 경우가 아닌 이상 모든 썸이 전부 부정적으로 해석되고 말 것이다.
- 비슷한 시간에 끝나면 같이 나갈 수 있는데도 상대가 같이 가자는 말 안 함.
- 같이 술 마신 다음 날에도 상대는 그냥 평소처럼 대할 뿐임.
- 사내 메신저로 말을 걸 때가 되었는데도 안 걸 때가 있어서 좌절.
저런 건 G양의 기대대로 상대가 움직이지 않은 것만을 카운팅하며 실망하는 거지, 실제로 두 사람의 관계가 부정적이라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다. 여기서 보기엔
- 두 사람이 새벽까지 문자대화를 하기도 함.
- 상대가 다음에 또 술 마시자고 약속을 잡았음.
- 사내 메신저 대화를 할 때에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임.
- 상대가 먼저 연락할 때가 훨씬 많음.
이라는 긍정적인 증거들이 있는데, G양은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며 ‘기대대로 안 된 것’에만 신경을 쓴다.
너무 앞선 기대를 하며 ‘현재 안 되는 것’에 대해 실망만 하지 말고, ‘되고 있는 부분’을 보며 ‘될 수 있도록’ 만들자. G양은 계속해서
‘내게 호감이 있는 거라면, 상대는 벌써 이러이러한 일들까지 했겠지.’
하며 ‘내게 완전히 반한 남자가 할 만한 행동들’을 상대에게 찾으려 하는데, 그런 조건에 딱 들어맞을 남자는 ‘금사빠’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남자 뿐이다. 보통의 경우는 이제 막 통성명을 하고 술 한 번 같이 마셨다고 열정적으로 연락하거나 계속해서 말 걸 타이밍만 노리고 있지 않는다.
또, G양은 그렇게 엄격한 잣대로 상대의 마음을 가늠하고 있으면서, 정작 자신은 상대에게 아무런 어필도 하고 있지 않음을 돌아보길 권한다. 상대가 열 번 넘게 연락하는 동안 G양은 몇 번이나 그에게 연락했는가? 그는 두 번이나 G양에게 먼저 만나자고 하고, 같이 밥 먹은 뒤엔 2차로 술 한 잔 하자고도 했지만, G양은 그에게 전혀 그런 제안을 한 적 없잖은가.
문자나 사내 메신저, 그리고 밥 먹자는 제안 같은 걸 꼭 상대가 먼저 해야 하는 게 아니다. G양도 충분히 먼저 할 수 있는 것들인데, G양은 상대의 마음을 알아보겠다며 관찰만 하고 있으니, 오히려 상대 입장에선 G양의 그런 미지근한 반응과 ‘먼저 뭘 하자고 제안하는 일 없음’을 두고 G양이 간을 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퇴근 후 상대에게 연락이 없는 날이 있다고 해서 그것만 두고
‘상대는 내게 마음 없는 듯. 마음이 있다면 지금 내게 연락했을 텐데….’
라는 생각만 하지 말고, 그럴 땐 G양이 먼저 연락하길 바란다. 그 상황을 상대 입장에서 보면, 역시나 G양에게서 아무 연락이 없기에 ‘마음 없음’으로 여길 수 있으니 말이다. 먼저 연락한다고 지는 게 아니다. 이건 누가 이기고 지는 싸움이 아니니, 마음 놓고 연락하자.
3. 속으로만 다 고민하고 생각하다, 이상하게 터트리는 문제.
G양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혼자 속으로만 고민하고 생각하며 결론을 짓기도 하고, 또 열두 번도 더 마음을 폈다 접었다 하거나 체념했다 다시 희망했다 하다가, 그걸 상대에게 이상하게 표현한다는 거다.
G양은 가장 최근 상대와 술을 마시며 이야기한 걸 두고
“이 정도면 ‘나 너 좋아해’라는 말만 빼고 다 말한 거잖아요. 제 속을 다 보여준 것과 같아요. 이렇게까지 했는데 뭐가 더 없으면, 이제 전 끝난 거라 생각하기도 했고요.”
라고 했는데, 사실 그건 그렇게까지 혼자 심각해할 일이 아니다. 남들은 그냥 장난삼아 하거나 지나가는 말로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을 두고, G양은 그렇게 혼자 심각해 한다. 상대 역시 보통의 시각에서 그걸 장난으로 받아들인 건데, 그걸 두고는 또
“다음 날에도 그는 평소와 다름없었어요. 저는 정말 심각하게 고민했는데….”
라며 혼자 좌절한다. 단언컨대 이건 G양이 과도하게 의미부여하며 혼자 섀도복싱을 하고 있는 것이니, 실제로 일어난 것, 그리고 확실하게 의사소통이 된 부분만을 가지고 생각하거나 판단하길 권한다.
행간의 의미나 뭐 침묵의 뜻 같은 걸 읽는 것도 분명 필요하긴 필요한데, 멀쩡히 쓰여 있는 문장들은 다 놔두고 행간과 침묵의 의미만 읽고 있으면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이 문자로 대화할 때에도 G양은 혹시나 자신의 마음을 들킬까봐 최대한 돌려 말하며 단답식으로 대답하는데, 그러지 말고 과감하고 즐겁게 그 대화에 임하길 바란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겠다며 세 달씩 두드리고 있으면, 손가락 관절 다 나간다.
G양은 현재 표정, 눈인사, 미소, 마음의 거리 뭐 그런 것만 보고 있는데, 그런 거 다 필요 없다. 그런 것들을 근거로 상대가 내게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를 확인하겠다며 관찰만하고 있다간, 할머니 된다. 할머니 되어서도 나중에 경로당에 가서 ‘김영감이 오늘은 내 근처에 안 앉고 문가에 앉았다’는 것 가지고도 고민하게 될 수 있으니, 먼저 밀크커피 뽑아 김영감에게 다가가는 마음으로 상대에게 다가가 보길 바란다.
둘의 대화에서 잠깐잠깐 보이는 G양의 센스를 보면 G양은 분명 보통 이상의 센스를 보유하고 있는 사람인데, 자체검열과 의식적인 물러섬으로 인해 그걸 3할 밖에 못 보여주고 있다. 노래방에 비유하자면, G양은 1절만 하고 끊는 것도 아닌, 첫 소절만 누르고 정지버튼을 누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내가 G양과 노래방에 가서
“하얗게 피어난 얼음 꽃 하나가(정지)”
하며 끊어버리면, 그냥 흐지부지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면서 내가 G양에게 ‘내게 노래 잘 한다는 얘기와 엄청난 호응 해주길’ 기대하고 있다면, 그건 좀 바보 같은 일일 수 있고 말이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작은 관심? 어장관리? 아무생각 없음? 그냥 회사 사람으로 생각하는 거라면, 개인적으로 문자나 메신저는 안 할 것 같은데…. 그리고 심지어 일 대 일로 술까지 마셨잖아요. 그것도 본인이 돈 더 쓰면서….”
그러니까 그걸 우리가 여기서 끝장토론 하며 ‘가능성 51.82%’ 같은 결론을 내려 봐야, G양이 그냥 지금처럼 계속 그렇게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며 물러서는 태도를 보이면 아무 의미 없는 거다. 상대가 이쪽에게 동료 이상의 관심이 없어도 사실 큰 문제없는 거고, 또 두 사람이 사귀지 않게 된다고 인생이나 회사생활이 끝나는 것도 아니니, 지금 이 순간에 찾아온 기회를 잡아본다고 생각하며 좀 더 들이대 봤으면 한다.
살짝 발만 담가 참방참방 하다 빼지 말고, 적어도 허리까지는 풍덩 빠져보자. 그랬다가 아니면 나오면 되는 건 마찬가지인데 뭐가 그리 걱정인가. 행여 너무 깊이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면 그땐 또 내가 다른 매뉴얼로 도와줄 테니, 믿고 빠져보길 권한다. 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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