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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매뉴얼(연재완료)/솔로부대탈출매뉴얼(시즌5)

하루아침에 냉랭해진 소개팅녀, 그 이유는?

by 무한 2016. 12. 28.

‘개기일식’에 대한 강의라면, 그 강의를 들어보기도 전에 벌써 졸린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다. 그 강의에 ‘월식’에 대한 이야기와 ‘밤하늘 스케치’에 대한 실습과정이 뒤따른다면, 별자리에 관심이 없거나 미술에 흥미가 없는 사람들은 아마 그 강의를 들을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다만 자격증을 따기 위해 수료를 해야 하는 과정이니 어쩔 수 없이 들었는데, 강의는 상상 이상으로 재미있었으며 난 그 강의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실제로 그 강의를 듣고 난 이후, 서른이 넘은 나이지만 이제라도 취미로 그림을 그려볼까 하는 생각까지를 진지하게 하기도 했다.

 

강사는 회사원이면서 동시에 취미로 천체관측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90년대에 있었던 사자자리 유성우를 보고 처음 천체관측에 흥미를 느꼈던 이야기, 일식을 보겠다는 열정 하나로 휴가를 내 미국에 다녀온 이야기, 자신이 본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서른 넘은 나이에 ‘미술과외’를 선택해 퇴근 후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이야기 등을 풀어 놓았다.

 

다른 강사들은 대부분 ‘수업’의 느낌으로 강의를 진행한 반면, 이 강사는 일반인의 입장에서 자신이 그것에 빠져들게 된 이야기로 시작해 지금까지 무엇을 해왔는지를 풀어 놓았다. 그랬기에 그 강의를 들었던 모든 사람들이 더 흥미진진하게 강의를 들었던 것 같다. 그 강의를 함께 들었던 오십 넘은 아저씨들마저도 별자리나 달의 모양을 그리는 실습시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정도로 말이다.

 

 

1. 미션 깨기가 아니다. 중요한 건, 내용이다.

 

파스칼의 말을 잠시 빌려다 좀 바꿔 말하자면, 내가 저 강사에게 매력을 느낀 건

 

- 재미있는 강사 정도를 기대하며 강의를 들었는데, 그 강사에게서 하나의 인간을 봤기 때문.

 

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밤하늘에 관심을 두고 별을 보러 다닌 이후 느낀 곤란한 지점들을 그도 전부 겪었다며 경험담을 풀어 놓았고, 내가 이 나이에 그림을 배우긴 너무 늦은 것 같다고 생각했던 걸 그도 생각했었으며, 그가 열정적으로 달려들어 이루어낸 것들은 나 역시 이루어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생각은 했지만 그걸 행동으로 옮겼느냐, 안 옮겼느냐’의 차이일 뿐이었는데, 여하튼 그렇게 그 강의에서 그라는 한 사람이 느껴진 까닭에, 해당 분야의 권위자가 전문용어를 써가며 했던 강의보다 그의 강의가 훨씬 더 날 집중시켰으며 동시에 도전하고 싶은 충동을 불러 일으켰다.

 

연애사연을 다루면서 왜 자꾸 강의나 강사 얘기를 하냐고 할 수 있는데, 사연의 주인공인 Y씨가 바로 이 지점에서 저 강사와는 정 반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저 강사가 공적인 자리에서도 사적으로 흥미를 이끌어내는 타입이라면, Y씨는 단 둘이 있는 사적인 자리에서도 그 분위기를 공적인 자리처럼 만드는 타입이다.

 

어쩌면 이게, ‘문제해결’ 또는 ‘미션 완료’에 목숨을 거는 남자의 특성 때문일 수 있다. 나도 얼마 전 여행을 갔을 때 갑자기 이 프로세서가 작동해서 후회할 일을 저질렀다. 그 날의 일정은 <마레지구>를 둘러보고 난 뒤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 가서 전자책과 함께 인증샷을 찍는 거였는데, 한 구간에서 다른 구간으로 가는 동안 충분히 즐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빨리 다음 장소로 가야한다’는 이상한 강박 때문에 괜히 서둘렀다. 그러느라 길거리 악사들의 공연도 충분히 보지 못했고, 마레지구를 더 둘러보고 싶어 하던 공쥬님(여자친구)과도 좀 마찰을 빚었다.

 

내 입장에선 사진을 찍어야 했기에 얼른 매직아워(일출몰 전후 30분)시간에 다른 목적지에 도착해야 했던 건데,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사진 찍어서 어디 넘기기로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거기 집착하느라 여유를 못 가졌던 건지 후회가 된다. 괜히 마음만 급해서는, 정작 파리까지 들고 간 전자책도 찍지 못했으면서 말이다.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앞에서 헤밍웨이의 <파리는 날마다 축제> 표지를 띄워 놓고는 인증샷을 찍으려 했는데, 정말 바보 같게도 서점 앞에 도착해서는 그걸 까맣게 잊고는 서점 사진만 찍었다.

 

저런 ‘미션 완료’에 대한 강박이, Y씨에게서도 보인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Y씨는

 

“운동경기도 같이 봤고, 맛집 탐방도 했습니다. 또 고궁도 같이 갔고, 미술관 관람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땐 영화도 봤고, 다음 만남 때 어디에 가자고까지 말해두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만남 이후 갑자기 냉랭해졌네요.”

 

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렇게 ‘이번엔 어딜 가고, 다음번엔 뭘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진짜 중요한 건 ‘만남의 내용’이지, 둘이 만나서 어딜 다녀왔고 무슨 식당에서 뭘 먹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란 얘기다.

 

만약 농구를 봤다면, 농구장은 이제 다녀왔으니 농구장에 가위표 한 후 이제 다른 운동경기를 보러 가면 된다고 생각할 게 아니다. 만약 내가 나와 비슷한 또래의 이성과 농구장에 갔다면, 난 문경은, 우지원, 이상민 등의 이야기를 꺼내보기도 하고, NBA에 관심을 갖고 SBS에서 하던 중계를 비디오로 녹화했던 이야기를 꺼내보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서 비디오와 관련된 공감대가 발견되면 그쪽으로 넘어갈 수도 있는 거고, 대학교와 관련된 공감대가 발견되면 역시 그쪽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동네에선, 약국이 비디오가게를 겸하기도 했었다는 얘기를 꺼낼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런 ‘내용의 부재’가, 상대로 하여금 Y씨를 몇 번 만나 봐도 별로 가까워지지 않는 느낌을 갖게 했을 거라고 난 생각한다. 서로가 무엇을 경험하며 어떻게 살아온 사람인지에 대해 공유하며 히스토리를 알아갔어야 하는데, Y씨는 ‘현재의 상대’와 만나며 ‘상대와 사귀는 것’에 중점을 둔 채 ‘썸 탈 때 남들이 하는 것들 하나씩 해나가기’에 더 집중했던 것 같다.

 

 

2. 세 번 만나고 고백하는 건 아니더라도!

 

Y씨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진 알겠다. Y씨는 두세 번 만나보고 덜컥 고백을 하는 타입은 아니라 길게 만나며 신중하게 서로를 알아간 뒤 고백한다는 건데, Y씨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상대를 불러낸 뒤 밥 먹이고 어디 구경 좀 하다가 들여보내는 것만 반복하는 건 이기적인 행동일 수 있다.

 

Y씨는 아예 대놓고 상대에게

 

“전 이성을 만날 때 두세 번 만남만으로 고백은 잘 안 하는 타입입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는데, 그것에 대해 내게

 

“여성분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를 했습니다.”

 

라는 이야기만 할 게 아니다. 그건 일종의 ‘답정너’의 성격을 지닌 통보와도 같기에, 그 얘기를 듣고는 거기에

 

“어머, 전 세 번 만났으면 결론 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라는 대답을 할 여자는 없다.

 

이런 건 생각의 차이라 Y씨가 내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그럼 저런 건 일단 다 접어두고 사실관계만 놓고 보자. 무슨 사정이 있어서든, 소개팅 이후 지금까지 흐른 시간이 두 달 반이다. 이거, 인터넷 쇼핑몰만 해도 장바구니에 담아 놓고 구입은 하지 않으면 20일~30일 후에 장바구니는 비워지게 되는데, Y씨는 두 달 반 동안 상대를 장바구니에 담아 놓고 있었던 것 아닌가.

 

Y씨로부터 ‘두세 번 만남만으론 고백 안 한다’는 통보를 받았던 그녀 입장에서 보면,

 

‘나오라면 난 또 나가야 하니? 2주 지나면 세 달인데, 나 무슨 요즘 장기면접 보러 다니니?’

 

하는 생각까지를 충분히 하게 될 수 있다. 둘의 마지막 만남에서 그녀가

 

- 지인으로부터 다른 소개팅이 들어왔다.

 

라는 이야기를 한 걸 난 ‘오늘까지 결정 안 하면 난 장바구니에서 나간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는데, Y씨는 그녀에게 ‘그 소개팅 안 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만을 한 채 그저 ‘다음에 만나서는 어디어디 가자’라고 했을 뿐이라는 게 참 안타깝다. Y씨의 입장에서는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판단하고자 그랬을 수 있지만, 그게 상대에게서는 긍정일지 부정일지 알 수 없는 결과를 기약 없이 기다리는 일이었을 수 있다는 걸 돌아봤으면 한다.

 

 

3. 상대가 냉랭하니까 이대로 끝?

 

너무 약하다. 현재 Y씨가 경험한 건 상대의 냉랭해진 대꾸와 짧은 대답, 그리고 이번 주에 일이 생겨 못 만날 것 같다는 얘기인데, 이걸 두고 Y씨는 벌써 이 관계가 끝났다고 생각하며

 

-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혹시 내가 어장관리 당한 건지?

- 들어왔다던 소개팅을 한 후 마음이 변한 건지?

- 아니면 예민해질 수 있는 시기라 갑자기 태도가 바뀐 건지?

 

등에 대한 답을 구하려고만 하고 있다. Y씨는 내게

 

“다음에 만나면 선물을 주면서 고백을 하려고 했는데….”

 

라고 말했는데, 정말 그럴 마음인 거였다면 지금이라도 Y씨가 한 번 더 만나자는 말을 해 얼마든지 고백할 수 있는 거다. 다음에 만나면 고백하려 했는데 상대가 냉랭하게 대꾸하며 약속이 있어서 못 만난다는 이야기를 하니 곧바로 폐업할 게 아니라, 정말 상대를 붙잡을 생각이 있는 거라면 Y씨의 마음을 적극 표현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오로지 상대가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지를 찾으려 하고, 동시에 상대와 사귀겠다는 Y씨의 선택에 후회가 남지 않을지를 보기 위해 장바구니에 담아둔 채 평가만 하려 하면, 상대가 그 누구라도 결국 튕겨나갈 가능성만 높아질 뿐이다. 또, 그런 Y씨의 태도에 질려 상대가 마음을 접으려 하는 걸 두고, 그저

 

-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나?

- 다음에 고백하려했는데 결국 틀어졌네.

- 냉랭하게 대하는 걸 보니, 고백해도 안 받아주겠네.

 

라며 그냥 돌아서면, 역시 딱 그 지점에서 인연이 끊어지는 것 말고는 다른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전에 내가 ‘청계천 걷다가 5만원짜리 지폐 떨어뜨린 경우’를 예로 들어가며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누구나 자기 돈 5만원이 물에 떨어져 흘러가면 앞뒤 안 가리고 일단 그거 건지려 하지,

 

- 바보같이 5만원을 잃어버리고 말았네.

- 물가에서 돈을 꺼내는 게 아니었는데.

- 저 돈이 뭍으로 올라올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

 

하고 있진 않을 거라고. 그런데 Y씨는, 어쩌면 소중한 인연일 수도 있는 상대가 떠내려가는데, 그냥 바라보며 혼자 상심만 하고 있다.

 

보통 이런 상황을 만드는 대원들은 약속이나 한 듯

 

‘운명이라면, 인연이라면 다시 잘 되거나 또 만나겠지.’

 

하는 생각을 하곤 하는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안 한 채 그냥 구경만 하고 있으면서, 운명이나 인연이 뭔가를 대신 해주길 기대하진 말았으면 한다. Y씨 역시 현 상황에서 상대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며 당긴다면 상대와 만날 수 있겠지만, 그저 혼자 실망한 채 이미 다 끝난 일이라고 체념하면 이제 평생 남남으로 살 일 밖에 남지 않는 거다.

 

이런 태도는 훗날 연애하다 갈등이 생겼을 때에도 ‘화해할 수 있는 기회’를 ‘이별의 순간’으로 만들고 말 수 있으니, 자꾸 본인이 참여하고 있는 관계에서 이방인이 되려 하거나 수동적인 태도로 구경만 하고 있진 말았으면 한다.

 

 

Y씨는 현재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돌리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할 말이 있어야 한다. 그저

 

- 상대가 갑자기 냉랭하게 대하길래, 이제 끝인가보다 했다.

 

라는 생각으로 그 관계에서 너무 쉽게 손 떼진 말았으면 한다. 할 수 있는 것까지는 다 해보고 나서, 그런 다음에야 그걸 ‘결과’로 받아들이자. 다시 연락도 안 하면서 ‘다시 예전처럼 좋은 관계로 돌아갔으면 한다’고 말하는 건, 회사에 입사지원서도 안 내고는 합격통보 기다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보고만 있지 말고, 움직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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