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 얘기했더라. 그 몽마르뜨 언덕에서 만난 ‘팔찌 강매단’ 과의 이야기까지 했던 것 같은데, 그 다섯 명의 흑인과 한 판 붙게 될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현실에선 허무할 정도로 아무 일 없이 마무리되고 말았다.
파리에 가기 전
“몽마르뜨에 가면 팔찌단이 있어요. 선물이라면서 팔에 팔찌를 채운 후, 가려고 하면 돈을 받아요. 여러 명이 둘러 싼 뒤에, 돈 주기 전까지는 절대 안 보내줘요.”
라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난
‘난 안 피할 것임. 만약 내 팔에 억지로 팔찌를 채우면, 그땐 내 여행의 장르가 멜로에서 액션으로 바뀌는 것임.’
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뛰어가라든지, 눈도 마주치지 말라든지 하는 조언은 다 미뤄두고, 상대가 먼저 시비를 걸면 닭싸움이라도 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다가왔던 그 흑인 청년들의 눈을 보는 순간, 피부색과의 대비 때문에 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여하튼
‘사람 눈이 이렇게 하얗고 맑을 수가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내 팔에 팔찌를 채워주고 싶어 간절히 부탁하듯 다가왔으며, 난 하마터면 그 선한 표정과 순수하게 보이는 하얀 눈동자에 홀려 몇 유로라도 그냥 줄 뻔 했다. 내가 생각했던 건 동대문이나 이태원에서 호객행위를 하는 모습이었는데, 몽마르뜨 언덕의 팔찌단은 훨씬 순박하고 겁먹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쨌든 난 화장실이 급했던 관계로 금방 정신을 차렸고, ‘농 메흐시(노 땡큐)’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대장으로 보이는 청년이 내 팔을 접으며 ‘정말 이건 선물입니다 제발 가져가주세요’라는 눈빛으로 팔찌를 걸려 했는데, 난 고등학교 2학년 때 합기도 도장에 다니던 성복이가 알려준 ‘잡힌 빨 빼내는 법’을 떠올리며 팔을 빼냈다.(상대 손가락이 열리는 쪽으로, 순간적으로 빼낸다는 생각으로 팔을 던지듯 빼면 쉽게 뺄 수 있다.) 내가 손을 빼자 팔찌단의 대장은 ‘난 정말 선물로 주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 대체 왜 그러는 거냐’는 제스쳐를 취하며 날 바라봤고, 난 다시 한 번 ‘농 메흐시’를 말하곤 자리를 떴다.
그렇게 몽마르뜨를 떠나, 시테섬으로 왔다. 노트르담 성당과 생트 샤펠 성당, 그리고 콩시에르쥬리 등을 보기 위해서였다.
파리엔 보행자들을 위한 표지판이 잘 갖춰져 있기에 길을 찾기가 쉽다. <La Conciergerie> 라고 쓰인 방향을 따라 걸어갔다.
생트 샤펠 성당 앞쪽의 모습. 원래 계획은 세 곳을 다 보는 것이었는데, 생트 샤펠 성당에는 뮤지엄 패스 줄까지도 길어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생각보다 많이 지체되어 이미 해가 지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콩시에르쥬리만 보곤 노트르담 성당에 가기로 했다.(성당은 뭐 비슷비슷하니 더 유명한 것 하나만 보면 된다는 생각에서였는데, 훗날 여행에서 돌아와 생트 샤펠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보고는 안 간 걸 땅을 치며 후회했다.)
콩시에르쥬리 내부의 모습. 뮤지엄 패스로 입장이 가능하다. 처음 보는 건축양식에 한 번 놀랐고, 그 다음으론 저게 전부라는 것에 두 번 놀랐다. 사진은 후보정을 하며 밝기를 좀 올린 거고, 실제로는 살짝 좀 침침하며 우중충하다.
콩시에르쥬리를 둘러보며 한 생각은
- 전기가 없을 때 여긴 어떻게 밝혔을까? 횃불로? 그럼 연기와 그을음은?
- 과거엔 여기서 재판도 열렸다던데, 판사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릴 때 위압감 엄청났을 듯.
- 나야 뮤지엄 패스가 있으니 온 거지만, 여길 왜 돈 주고 들어와서 봐야 하는가?
라는 것들이었다.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인을 데리고 서대문형무소 구경을 시켜줄 때 그 외국인이 느낄만한 반응, 딱 그 정도였던 것 같다.
게다가 내가 갔을 땐, 콩시에르쥬리를 찾는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수감되었던 방’이 리모델링 중이라 입장이 금지되어 있었다. 이건, 63빌딩 갔는데 전망대가 리모델링 중이라 못 가게 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인지 실망은 두 배가 되었고, 서둘러 콩시에르쥬리를 떠났다.
아, 마음에 든 것도 딱 하나 있다. 저건 예전에 쓰던 책상이라고 하던데, 책상에 저런 글자와 무늬를 넣는 것도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책상에 대한 로망이 있어서 나중에 단풍나무 책상을 하나 주문제작 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그때 좀 특별하게 꾸미는 것에 저 각인방법을 참고할 수 있을 것 같다.
퐁네프다리. 기대를 너무 많이 해서일까. 하긴, 다리가 그냥 다 다리지 특별하다고 해봐야 변신하는 것도 아닌데…. 여튼 저기까지 걸어가서 다리를 왕복해보려다가, 해가 다 져버릴까봐 얼른 노트르담부터 보러 가기로 했다.
안 돼! 노트르담 성당 꼭대기에서 파리 전체를 내려다보는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해가 지면 찍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제발 매직아워 전까지 전망대에 오르고자, 부랴부랴 걸었다.
왼쪽에 살짝 노트르담 성당이 보인다. 저 코너를 돌아 노을빛을 받고 있는 노트르담 성당이 나타났을 때, 실제로 ‘오오!’ 하며 감격했던 기억이 난다. 사진 속 자전거는 일산의 피프틴처럼 빌려탈 수 있는 자전거인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었다. 치마를 입고 자전거를 타는 여자들도 많아 좀 신기했다.
두둥. 노을빛으로 물든 노트르담 대성당의 모습. 저걸 보고 오기 전까지는 우리 동네 주변의 큰 성당들을 보며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저걸 보고 돌아와 주변의 성당들을 다시 보자, 그냥 좀 갑갑한 느낌이 들었다. 마찬가지로 난 우리 동네 엔틱샵의 인테리어와 거기서 파는 가구들을 보며 ‘유럽게 가면 저런 거 많이 보겠지?’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갔다가 돌아오자 동네 엔틱샵이 오징어처럼 보였다.
노트르담 성당 내부모습. 여유를 가지고 왔어야 좀 마음 놓고 둘러봤을 텐데, 머릿속에 ‘전망대’ 생각 밖에 없어서 그러질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초도 하나 켰고, 전망대를 찾느라 성당 한 바퀴를 다 돌았다.
한 바퀴를 다 돌아도 전망대로 올라가는 곳을 찾을 수 없었다. 마음이 급해서 눈에 보이는 신부님께라도 여쭤보려다가,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인터넷 검색을 했다. 충격과 공포였던 건, 노트르담 성당 전망대 입구가 외부에 있다는 것! 서둘러 성당 밖으로 나갔다.
전망대에 오르고자 그렇게 분주히 찾았건만, 전망대 입구는 잠겨 있었다. 오후 3시쯤엔 와야 올라갈 수 있다는 대답만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노트르담 성당 내부나 실컷 구경하는 건데….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는 내가 잠시 넋을 놓고 있을 때, 한국어로 대화하던 여자 둘이 다가가 전망대 경비에게 ‘올라갈 수 없느냐’고 물었다. 이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자 둘이었는데, 그들은 경비가 ‘오늘은 문을 닫았다. 내일 일찍 와라’라고 하자,
“리얼리? 오마갓~ 오우 노우~”
하며 격한 제스쳐를 취했다. 한국인의 정서와는 뭔가 다른 그 리액션에, 난 잠시 부끄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영어회화를 연습중인지, 그녀들은 더 묻지 않아도 되는 걸 열심히 물어가며 경비와 얼마쯤 더 대화를 했다. 나중에 나도 저 ‘오마갓~ 오우 노우~’하는 걸 한 번 써먹어 보려 했는데, 써먹을 기회가 없었다. 아, 혹시나 나처럼 헤매는 일을 막기 위해 적어두자면, 노르트담 성당 전망대는 성당을 정면으로 마주보고 섰을 때 좌측면에 있다.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 노을이 지고 있었다. 난 땅거미가 내리며 좀 먹먹해지는 듯한 이 순간을 좋아하기에, 서서히 어두워져가는 하늘을 말없이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고, 성당에도 조명이 켜졌다.
역시, 남자는 핑크. 저들은 핑크색 가방을 테마로 여행 중인 커플인지, 노트르담 성당 앞에 서서 가방이 나오는 뒷모습을 열심히 찍고 있었다.
매직아워. 이때 전망대에 올라가서 파리를 파노라마로 담는 게 계획이었는데….
이 사진을 찍을 때 우측 벤치엔 고교생?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현지 커플이 앉아 있었다.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은 커플인 것 같았는데, 그들은 막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저 많은 인파들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스킨십에 열중이었다. 쪽쪽 거리며 입을 맞추다가 나중엔 결국 키스까지 가던데, 키스하며 남자가 왼 팔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살짝 바들바들 떠는 게 재미있었다.
아, 파리 여행을 하며 곳곳에서 키스를 하는 커플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심지어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지도 중년의 여인과 신호등에서 키스를 하고 있었고, 그냥 거리를 걷다 상가 벽 쪽에 붙어 있는 커플을 보면 여지없이 키스를 하고 있었다. 난
‘이 정도로 키스를 해대면 충치까지 옮는 것 아닌가? B형, C형 간염의 문제도 있을 텐데…. 근데 그러고 보니 치과를 못 본 것 같은데 파리의 치과는 다 어디 숨어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찍을 때마다 느낌이 달라지는 노트르담 성당. 이쯤 되면 앞모습은 지겹도록 봤으니, 다음 번에 뒷모습을 보기로 하며 저녁을 먹으러!
노멀로그 파리여행 공지사항에 댓글로 달린, ‘라 자코벵’ 찾아가는 길. 사진 속 도로는 신호등이 없는 곳이긴 한데, 여하튼 파리 여행에서 충격적인 것 하나는 ‘신호를 지키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 나중에 돌아와서 찾아보니 ‘언제나 보행자 우선’이라서 그럴 거라는 의견이 있었다. 내 생각엔 널찍한 길들이 없이 대부분 일방통행이거나 왕복 2차선이기에, 자연스레 무단횡단이 습관화된 게 아닌가 싶다.
라 자코벵 도착. 구글지도로 찾으면 도로변에 있다고 안내가 되는데, 도로변이 아니라 골목 사이로 들어와야 찾을 수 있다. 이걸 몰라서 밖에서 한참 헤맸다. 간판에도 ‘라 자코벵’이라고 크게 쓰여있는 것이 아니라서, 매의 눈으로 저 모양의 간판을 찾아야 한다.
누군가가 설명하기로는 ‘아기자기하고 예쁜 인테리어를 좋아한다면 라 자코벵을 그냥 지나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는데, 난 두 번이나 그냥 지나쳤다. 내 미적 감각이 좀 떨어지든가, 아니면 저렇게 설명하신 분이 꽤 많은 의미를 부여했든가 둘 중 하나인 것 같다.
주문한 와인이 먼저 나왔다. 주인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가지고 와서는, 저렇게 라벨을 보여주곤 직접 따서 따라준다. 그러고는 내게 맛을 보라고 했는데, 난 일부러 공쥬님(여자친구)에게 시음을 양보했다. 아저씨가 살짝 당황하던데, 원래 남자가 맛을 본 뒤 엄지를 치켜들면 서비스 해주는 거라고 한다.
주인 아저씨는, 잠깐만. 생각해보니 내가 저 사람 보다 나이가 많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지금 불현 듯 드는데, 여하튼 그는 친절했다. 식당에 왔다는 느낌 보다는, 친구네 집에 왔는데 친구가 음식을 하나씩 가져다주는 느낌이었다. 그는 음식을 가져다 줄 때마다 “왈라~”라고 말하며, 음식이 어떤지를 묻기도 했다.
달팽이 요리 도전! 주인 아저씨가 달팽이를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시범을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뭐가 잘 안 되는지, 시범을 보여주다 말고 집게를 다른 것으로 바꿔왔다. 공쥬님은 두 개 정도 달팽이를 잘 빼내더니, 자신이 붙었는지 좀 속도를 내려다 집게로 쥔 달팽이를 튕겨내기도 했다.
뭐랑 같이 나온 건지, 아니면 그냥 원래 나오는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저렇게 바게트가 나온다. 그래서 우린 달팽이 국물(?)에도 찍어 먹고, 이후 주문한 야채스프에도 찍어 먹고 그랬다.
야채스프. 위에 올려있는 치즈를 걷어내면 국물이 나온다. 된장찌개에 양파즙을 좀 넣으면 비슷한 맛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생각한 것보다 맛있었다. 안에 있는 바게트를 다 먹곤, 위에서 말한 바게트를 더 넣어 먹었다. 맛있어서 마지막 국물 한 방울까지 그릇을 들고는 깨끗하게 비웠다.
양고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고기 맛보다 무화과가 들어 있었다는 게 더 내 인상에 남아 있는 걸 보니, 놀랄만한 맛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마도, 오리였던 것 같다. 의외로 아몬드와 잘 어울리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먹었는데, 그릇 1시 지점에 있는 포도인지 대추인지를 먹고 입맛이 확 떨어졌다. 등갈비를 막 먹다가 오렌지를 한 입 먹은 느낌이랄까. 그래도 남김없이 깨끗이 비웠다. 당근이랑 호박 같은 건 사실 먹기 싫었는데 ‘프랑스 당근이랑 프랑스 호박이니까, 먹어봐야지’하며 먹었다.
맛있게 먹고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길. 난 술을 마시면 술을 마시는 거고 밥을 먹으면 밥을 먹는 거지, 둘 다를 한꺼번에는 잘 못하는 타입이다. 그래서 빈속에 와인을 급하게 부어 넣은 까닭에 좀 취해 있었다. 공쥬님은 저런 아기자기 한 상점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곤 구경도 하고 사진도 찍고 했다. 그러다 내가 지하철역을 찾으러 간 사이 길이 엇갈리는 참사가 일어나기도 했는데…. 자세한 얘기는 생략하자.
지금 생각해보면, 들어가서 한 번 둘러보거나 구경해도 되는 걸, 왜 그냥 막 빨리 숙소로 돌아가려고 했던 건지 모르겠다. 변명을 하자면 화장실을 못 찾아 또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될까봐 그런 것도 있고, 두꺼운 패딩 입고 카메라 백팩에 삼각대까지 매달고 다닌 까닭에 어딜 들어가면 움직이기가 불편해서 그런 것도 있다. 너무 늦어지면 강도나 소매치기의 위험이 있다는 것 때문이기도 했고 말이다.
어쨌든 커플여행을 할 때엔 되도록 둘이 떨어지지 말라는 이야기를 적어두기로 하고, 본격적인 오랑주리, 오르셰, 루브르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이어가보자. 다들 힘찬 월요일 보내시길!
▼ 공감과 추천, 댓글은 다음 이야기를 부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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