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후 1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그 관계에 함몰되어있는 대원들의 사연을, 난 사실 좀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별 후 이쪽의 이야기는 사실 상대와 아무 관련이 없음.
-기억의 왜곡으로 인해 완전히 다른 얘기가 된 경우가 많음.
-상대가 정말 밉다면서도 미안하다는 얘기를 하곤 함.
-조언을 구한다면서, 조언을 해주면 날 증오하거나 미워함.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저 마지막 부분이 나를 참 힘들게 하는데, 그건 내가 “이 사연은 이러이러한 부분이 문제였으며, 그러니 이러이러한 선택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할 경우,
“내가 1년간 한 마음 고생을 고작 ‘미련’이라는 말 같은 걸로 표현하는 거냐.”
“다른 사람과 잘 될 거라 말하지 마라. 난 이 사람 아니면 아무도 필요 없다.”
“네가 우리에 대해 뭘 아냐. 우린 결코 네가 말하는 것 같은 관계가 아니었다.”
등의 반응이 돌아오는 걸 말한다. 그 관계가 자신에겐 엄청나게 큰 의미이며 그만큼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으니 1년 넘게 못 잊고 있는 것이긴 하겠지만, 집에 가득 찬 쓰레기 때문에 발 디딜 곳이 없다는 사람에게 내가 분리수거를 권하자, 전부 다 의미 있는 물건이라 버릴 것이 없다고 하며 왜 함부로 남의 물건에 손을 대냐고 하니 나는 머쓱해져 버리고 만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그간 피해왔던 사연들이 또 한 가득 쌓인 까닭에, 오늘은 그 사연들 중 빈번하게 보이는 유형을 묶어 정리할까 한다. 출발해 보자.
1.외롭고 심심할 때면 여지를 남기는 상대
그래도 한 때 연인이었던 사이가 이렇게 변할 수 있다는 게 참 안타깝긴 하지만, 이젠 이렇다 할 호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외로움이나 심심함을 달래는 존재로 이용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대개 여성대원들이 구남친에게 당하는 사례가 많은데, 그들은 자신이 외롭고 심심할 때 이쪽이 좋아할 법한 것들을 내밀어 다가오게 한 뒤 잠깐 동안의 연인감정을 즐기고는, 금방 또 남남처럼 살던 때로 돌아가곤 한다. 어젯밤 술과 식재료를 사들고 와 요리까지 해준 뒤 하룻밤 자고는, 다음 날 집에 돌아간 이후부터는 찬바람 쌩쌩 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그 둘의 테두리 바깥에서 보면야 한두 번만 봐도 그의 행동에 진정성이 없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지만, 테두리 내에서 ‘사랑했던 옛 사람’이 이전으로 돌아간 듯한 모습을 보이는 걸 직접 경험하면 판단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특히 상대가 아주 작정하고는
-다시 만나보자.
-이번엔 결혼을 전제로 만나보자.
-네가 나 아니면, 내가 너 아니면 누굴 만나겠냐.
라는 떡밥까지 풀며 다가올 경우, 진짜 이번엔 뭐라도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세 번 속고도 또 속으며, 네 번 속고도 또 속는다.
특히 저런 태도를 보이는 사람 중에는 무책임한 태도로 살아오며 책임회피와 뒤집어씌우기 기술이 발달한 사람이 많기에, 뒤통수 몇 번 맞은 여성대원이 항의를 하면
“이래서 내가 널 못 만난다는 거야. 봐봐. 너 또 지금 나한테 그러고 있지?”
라는 식으로 ‘네가 이상한 여자’라는 세뇌를 시키곤 한다. 하지만 그래 놓고도 몇 주 뒤 다시 아쉬워 질 때면 다른 걸 구실로 연락하거나, 찾아올 때 늘 보이는 그 다정한 눈빛과 서비스를 펼치기에, 이런 남자에게 3년 이상 시달리며 ‘이번엔 진짜 마지막’이라며 열 번 넘게 뒤통수를 맞은 대원도 있다.
여자 쪽이 다른 남자와 썸을 타기 시작하면, 상대는 더 적극적으로 들이대며 ‘걔는 별로다. 나랑 다시 만나자.’는 얘기를 하기도 하는데, 역시나 그렇게 해서 판을 엎어버리고 난 뒤에는 여러 핑계를 대며 방치해두거나 무성의한 태도로 대꾸하다가 잠수를 타기도 한다.
2.말끔히 잘라지지 않은 상대와의 마지막
이건 주로 남성대원들이 경험하는 사례가 많은데, ‘헤어질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무언가에 대해 과격하게 따지다가, 상대가 그만 하자고 말해서 홧김에 그러자고 답한 뒤 이후부터 ‘이전으로 돌릴 수 없는 관계’ 때문에 마음고생 하는 경우라 할 수 있겠다.
이렇게 가정해 보자. 여친이 바람을 피웠다. 그걸 우연히 남자가 알게 되었고, 그것에 대해 분노하며 따졌다. 예상했던 시나리오는 여친이 울며 사과하는 것이었는데, 예상과는 달리 여친이 순순히 수긍하며 이제 우린 헤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고 말한다. 남자는 화도 내보고 애원도 해보지만, 여친은
“아냐. 이렇게 된 거면 끝이야. 다시 돌릴 수 없어.”
라면서 이별통보를 한다.
남자는 분명 이게 지금 자신이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인 것 같은데, 화를 내자니 손톱만큼의 재회 가능성도 없어질 것 같고, 그래서 붙잡아 봤는데도 여친은 저럴 뿐이니 뭘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일단 헤어지자는 여친의 말대로 헤어지긴 했는데, 미련과 분노도 가라앉지 않을뿐더러 대체 이건 무엇이었을까 하는 생각과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는 궁금함, 그리고 다시 한 번이라도 만나 말끔하게 뭔가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에 계속해서 그 관계를 놓지 못한다. 그러면서 내게
“그녀와 저는 이렇게 되고 말았지만, 지금부터라도 더 이상 아니고 싶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해 내가 “네? 뭘요? 뭐가 더 이상 아닌 거여야 하는 거죠?”라는 질문을 하게 만드는 것이고 말이다.
내게 얘기를 하면 내가 ‘그런 사람과는 안 만나는 게 좋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할 거라는 걸 알고 또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면서, 헤어진 지 일 년이 지나도록 그 관계를 놓지 못한 채 폐허에서 숙식하고 있는 그들을 생각하면 나도 안타깝다. 상대가 다른 사람의 연락을 기다리는 여자가 되었을 거란 생각에 괴로워 하다가, 둘이 좋았을 때 그녀가 했던 표현들을 생각했다가, 다시 또 나와 사귀며 다른 남자와 데이트를 하고 거짓말을 했던 것에 분노했다가, 지금이라도 정말로 사랑했다는 걸 고백하면 어찌되었든 다시 시작해 볼 수 있는 건 아닐까 또 다시 희망하는….
3.끝난 연애를 해부하는 사람들.
이건 주로 ‘첫 연애’와 관련이 있는 경우가 많으며, 일주일 사귀고는 일 년 동안 이별의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든가, 아니면 한 달 사귀고는 2년 씩 힘들어 한다든가 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사귀다 보면 딱히 결정적인 문제가 없더라도 헤어질 수 있는 게 연애이며, 이쪽이 아무 잘못을 안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마음이 바뀌어 헤어질 수 있는 게 연애다. 쇼핑에서, ‘상품이상’으로 인한 반품이 아닌 ‘단순변심’에 의한 반품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쪽이 원래 그런 사람인 건 아닌데, 상대가 이쪽의 어떤 모습만을 보고는 겁을 먹어 사귀자고 했던 걸 물릴 수도 있다. 예컨대 내가 가상의 인물인 A양과 사귀기로 한 지 일주일이 되었을 때, 전날 내가 밤낚시를 한 것을 두고 A양이 삐쳐 일부러 전화도 받지 않고 오늘도 밤낚시나 가라는 식의 메시지를 보내면, 난 A양과의 관계엔 비전이 없으며 A양이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진짜 오늘도 밤낚시나 갈 수 있다. 그러면 우리 갈등의 골은 깊어질 것이고, A양이 내게 헤어지자고 말한 뒤 내가 수긍할 수도 있고 말이다.
이렇듯 사귀다 보면 여러 사정으로 인해 이별이 찾아올 수 있는 건데, 그 연애가 너무 강렬했으며 이쪽에서 정말 큰 의미를 부여했던 관계였다면, 또는 이쪽에서 약간의 완벽주의자적 기질을 가지고 있는 까닭에 이별 역시 이성적으로, 감성적으로 완벽하게 ‘누가 봐도 헤어져야 하는 사이’가 된 이후에나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할 경우, 오래 전 끝난 관계를 계속 해부하며 시간을 보내게 될 수 있다.
난 이런 사연들을 매뉴얼로 발행했다가 귓방망이를 몇 번 맞은 적이 있는데, 그들은 이미 답을 가지고 있다. 그 ‘답’이라는 게 ‘무엇이 어찌되어 그렇게 되었다’는 답이 아니라, ‘누가 이걸 두고 뭐라고 하든 그건 아니다’라는 답이다. 여기서 봤을 땐 분명 아까 답은 나왔고 그게 문제라서 헤어진 건데, 그걸 부정하며 ‘장담하는데 그 사람은 그것 때문에 헤어지자고 할 사람은 아니다’라는 식으로 나오고 만다.
솔직히 난, 그렇게 이미 나온 답을 부정한 채 계속 해부를 하고 있으니, 그 기간만 자꾸 길어지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몇몇 경우는 연애할 때에도 그렇게 ‘내가 생각하는 연애’,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모습’, ‘내가 생각하는 연인상’만 고집하니 상대가 좀 그런 척 해보려 노력하다 떠난 경우도 있다고 생각하고 말이다. 여하튼
“우린 정말 좋았었는데 헤어졌어요. 왜 헤어진 거죠?”
라는 말에,
“좋기만 한 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이러한 부분들은 좋아서 그랬던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라고 답할 경우,
“좋았다니까요? 뭘 안다고 안 좋았다고 하는 거죠? 내 얘긴데 내가 잘 알아요, 당신이 잘 알아요?”
라는 대답이 돌아오면, 난 엄마한테 이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뭐 그렇다.
이런 대원들에게 공통적으로 해주고 싶은 얘기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 담글 수 없다잖는가.
-그 시절 그 사람 말고, 지금 이 순간에 있는 상대를 보자.
-혼자 과거에 살고 있으면서 현재와 미래가 바뀌길 바라는 건 기대일 뿐이다.
라고 할 수 있겠다. 참 진부한 얘기들이긴 한데, 저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왜 헤어졌는지’에 대한 800페이지짜리 보고서를 작성한다고 해도 거기엔 아무 의미가 없다. 폐허가 된 곳에 혼자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세상은 점점 나를 빼고 돌아가는 것 같고, 나는 이미 틀려버린 것 같고, 이제 기억 속 상대가 날 찾아와 구해주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으니, 일단 거기서 일어나 큰 길로 좀 나오길 권한다.
그래야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새로운 일도 생기고, 새로운 기쁨도 맞이할 수 있다. 오늘이 금요일인데 불금을 보낼 준비는 되어 있는가? 이번 주말에 주어질 자유가 기대되는가? 그런 게 전혀 없다면 그대는 그저 옛 추억에 함몰된 채 우중충한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뿐일 수 있다. 내가 2015년도의 이야기를 지금까지 반복해서 하며 우는 소리만 하고 있으면, 그대도 내가 하는 말을 더는 듣고 싶지 않을 것 아닌가.
추억은 마음 속 상자에 담아 쌓아두었다가 나중에 시간 날 때 꺼내보면 되니, 지금은 분별할 것 없이 다 담아두고 일단 새로운 나날들을 맞이해보자. 그거 좀 그렇게 내 인생부터 살아가면서 시간 날 때 정리도 하고 분석도 하고 해야 하는 거지, 그러느라 주저앉아 있으면 이월도 안 되는 아까운 청춘 다 지나가 버리고 만다. 이미 국가대표급 5년차, 7년차 장기 미련 전문가 선배대원들이 있으니, 그 자리를 넘보지 말고 오늘 이 순간에 털고 가자. 내일도 늦다. 오늘 털고 가자.
▼지난 달과 오늘이 같아선, 지난 주와 오늘이 같아선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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