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간 내게 도착한 ‘구여친 얘기를 하는 남친’과 관련된 사연 중, S양의 이 사연이 가장 이상하고 찝찝한 사연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S양이 구여친 얘기 하지 말라고 한두 번 이야기한 것도 아닌데 상대는 ‘돌려 말하기’의 방법을 사용해서까지 구여친 얘기를 계속하고 있고, 구여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들 역시 단순한 동네 데이트나 여행 정도에 관한 게 아니라 높은 수위의 이야기들이나 ‘현 상황에서 다시 진단해보는 구여친에 대한 고찰’ 같은 것이기에 아무래도 괴상하다.
S양은 내게
“남친의 과거를 덮어도 되는 걸까요? 혹시 이런 사례가, ‘절대 만나선 안 되는 남자 유형’에 속한다거나, 아니면 이런 사람들이 나중에 꼭 어찌어찌하더라 하는 게 있나요?”
라고 물었는데, 나중은 둘째 치고 난 지금도 꽤 많이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철이 없거나 푼수기가 있는 사람들이 종종 그런 모습을 보이긴 하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결국 매번 사과하면서도 무슨 끊을 수 없는 중독처럼 계속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드물다. S양은 사연과 관련해 여러 질문을 내게 던졌는데, 오늘은 그 질문에 대답하며 매뉴얼을 진행해 보도록 하자. 출발.
1. 남친은 왜 제게 구여친 얘기를 한 걸까요?
그에겐 삶에서 구여친과의 연애가 가장 힘들었으며, 인상 깊었고, 또 ‘연애 때문에 내가 이런 짓까지 해봤다’고 말할 수 있는 관계였던 것 같다. 때문에 내가 만약 그에게
-살면서 타인을 위해 가장 열정적으로 노력해 본 경험은?
-살면서 가장 절박함을 느꼈던 순간은?
-살면서 누군가에게 가장 큰 치욕을 받았던 사건은?
라는 질문을 하면, 그는
-다크한 구여친을 품어보고 이해하려 노력한 것.
-구여친과 싸울 때 구여친이 죽겠다며 자해를 했을 때.
-구여친에게 배신당하고, 뒤통수 맞고, 무시까지 당한 것.
라고 대답할 것 같다. 보통의 경우 남자들에게 저런 얘기를 물으면 가족과 관련된 추억 하나, 군대와 관련된 추억 하나, 그리고 목숨이 위태로웠던 추억 하나 등을 말하기 마련인데, 그는 그냥 구여친, 구여친, 구여친이다.
더불어 그는, 자신이 구여친을 위해 얼마나 희생했으며 구여친이 얼마나 자신에게 함부로 했고, 나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구여친에게 최선을 다했다는 것 등을 ‘자랑’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보통의 남자가 “한 시간 산책? 야 나 군대에 있을 때 막 여섯 시간씩 걷고 그랬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한 시간 기다리는 거? 나 예전에 걔 만날 때 여섯 시간 기다린 적도 있어.”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랄까.
그의 ‘기-승-전-구여친’의 증상은 매우 심각해서, S양에 대한 칭찬마저도 ‘구여친과 비교해 칭찬하기’를 사용할 정도다. 그는 S양의 마음과 성격에 대한 칭찬을 구여친의 그것과 비교해 칭찬하며, 심지어 외모와 몸매에 대한 칭찬도 구여친의 그것과 비교해 칭찬한다. 덕분에 S양은 ‘남친의 구여친’에 대해 자기소개서를 대필해 줄 수 있을 정도로 알게 되었으며, 그녀의 생활패턴과 치아상태, 신체적 특징까지도 알게 되었다.
이렇듯 남친의 ‘기-승-전-구여친’ 패턴이 계속해서 등장한 건, 남친 자체의 문제인 게 8할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모태솔로에 가까웠던 그가 사회에 나와 첫 연애, 그것도 좀 긴 연애를 했고, 때문에 다음 번에 만나는 사람에겐 자꾸 그 이야기를 쏟아 놓거나 그 연애와 이번 연애를 비교하며 설명하려 했던 것 같다. 게다가 보통의 경우 남친에게서 그런 모습을 볼 경우 옐로카드를 든 후 다음 번에 레드카드를 들기 마련인데, S양의 경우는 복잡한 심정으로 잘못 대처한 까닭에 문제를 더 키우게 되었다. 요 부분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자세히 살펴보자.
2. 제가 어떤 노력을 해야 했나요?
노력이라기보다는, 남친이 자꾸 구여친 얘기를 꺼낼 때 더 캐내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 같다. 남친이 꺼낸 이야기가 궁금하니
“걔(남친의 구여친)는 어땠는데? 걔가 왜 그런 건데?”
“(남친의 구여친이)그렇다는 게 어떤 건데?”
“걔(남친의 구여친)가 그랬다는 걸 넌 어떻게 알았는데?”
라며 물을 순 있지만, 그러다 보니 판도라의 상자는 점점 더 열리게 되고, S양이 감당하지 못할 어마무시한 이야기들까지 다 튀어나오고 말았다.
또, 이것 역시 남친이 계속 ‘기-승-전-구여친’의 이야기를 하니 그것이 원인이 되어 나온 리액션이겠지만, 그것에 노이로제가 걸린 듯한 S양이
‘거긴 가지 말자고 한 건 구여친과 갔기 때문이겠지.’
‘구여친도 남친 가족 본 적 있다고 하던데, 가족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구여친과는 이런 쪽에서 취향이 비슷했겠지. 구여친은 이해해줬겠지.’
하며 역시나 대부분의 것들을 ‘남친의 구여친’과 연관 짓는 것도, 스스로 분노를 축적하거나 남친을 향해 복수의 칼날을 가는 이유가 되고 있다. 때문에 심술을 부리거나,
“걔랑 하던 짓거리 나한테 똑같이 하지 마. 진짜 기분 나빠.”
하며 폭발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고 말이다.
종종
“연인끼리는 솔직하게 다 오픈할 수 있어야 하니, 이전 연애나 연인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할 수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솔직한 건 좋은 거잖아요.”
라는 이야기를 하는 대원들이 있는데, 그게 그렇게 이론적으로 생각할 때와 달리, 현실에서는 상대의 이야기에 상상과 환상이 덧씌워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부 대원들은
“연인의 옛 애인이 저보다 낫다면 몰라도, 그게 아니라면 괜찮을 것 같은데요?”
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데, 이번 사연의 주인공인 S양이 바로 그런 케이스로, 그런 사람과 오래 사귄 남친을 더욱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그런 애랑 사귀었던 걸 보니, 얘는 나 만난 게 인생 최고의 행운이네. 근데 나에게도 행운이 맞을까?’라는 생각까지 하게 될 수 있으니, 과거 연애사는 묻지도 따지지도 건드리지도 말았으면 한다.
3. 지금까지 한 얘기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
S양은 남친에 대해 ‘사람은 좋다’고 하는데, 난 그 부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짜증 내거나 화내도 남친이 다 받아주며, 아무리 그렇게 싸워도 헤어지자는 얘기는 절대 안 하니, 남친은 착한 사람.
이라는 생각을 하는 대원들이 있는데, 그걸 그렇게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건 위험하다. 그건 상대가 그냥 이타적인 성향을 지닌 온순한 사람이라 그러는 걸 수도 있고, 당장은 을의 자리에 있어야 유지되니 일단 포지션을 그렇게 잡은 걸 수 있으며, 불화를 싫어하는 까닭에 일단 사과로 급하게 갈등을 진화하곤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을 때에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니 말이다.
내가 S양의 사연을 읽으며 염려한 두 가지는, ‘자꾸 남친이 구여친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남친이 S양에게 지적을 받고는 사과하는 대목에서 ‘잘해주는 것’이 발휘됨.
-둘의 연애가 좀 너무 감성의 영역으로 치우쳐 있으며, 막연한 화풀이가 많음.
라는 것이었다. 둘의 관계를 보면 S양이 불평을 할 경우 상대가 맹목적으로 사과하며 S양의 요구를 다 들어주려 하는데, 이건 분명 언젠가 상대가 지치는 날이 올 수 있는 일이며, S양은 불만족녀가 되어 늘 상대를 다그치거나 지적하는 문제를 만들 수 있는 일이다. 기분은 풀릴 수 있어도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기에, S양은 점점 전방위적으로 불만을 표출하는 일에만 골몰할 수 있고 말이다.
만약 S양이 남친에게, 담배를 끊어라, 술도 마시지 마라, 친구도 만나지 마라, 잠도 줄여라, 책을 읽어라, 늘 나를 데리러 와라, 뭐라도 배워라, 양치를 잘해라, 저축을 해라, 보험을 들어라, 병원을 가라, 여행계획도 짜라, 라는 이야기를 해도, 그는 그냥 사과부터 하며 S양이 시키는 일을 하겠다고 할 것 같다. 그래도 S양의 불만족이 다 해결되는 건 아니니 또 S양의 주문은 늘어갈 텐데, 거기에 버티고 버티던 상대가 결국은
“근데 왜 나만 그래야 해? 난 너에게 바라는 거 없는데? 넌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로는 만족을 못 하나 보네? 그냥 내 모든 부분이 싫은 것 같은데, 그럼 나 말고 네가 바라는 사람과 만나는 게 너에겐 나을 것 같아.”
라는 이야기를 하게 될 수 있다.
너무 ‘감성의 영역’에 치우쳐 있으며 ‘막연한 화풀이’가 많다는 얘기는, 예컨대
여자 – 그러니 앞으로 날 외롭게 하지 않도록 노력해 줬음 좋겠어.
남자 – 응응! 노력할게!
(며칠간 남자가 자주 연락하고 말 더 많이 하려 노력. 하지만 며칠 후)
여자 – 날 정말 사랑하는 거라면, 오늘같이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말하진 않았을 거야.
남자 – 진짜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자기도 예전에….
여자 – 됐어. 뭘 잘못한 건지 모르나 보네. 그냥 ‘많이 속상했어? 미안해. 앞으로 조심할게.’라고 했으면 난 풀렸을 거야. 그런데 지금 넌 부정하고만 있지. 이렇게 안 맞는데, 노력하며 관계를 끌고 나간다고 행복할까? 어떤 게 서로를 위한 건지 생각해 보자.
남자 – 미안해. 진짜 미안해.
라는 식으로 관계가 진행된다는 거다. 헤어지자는 말이 직접적으로 나오진 않았지만 S양은 ‘이런 식이면 계속 사귀긴 힘들다’는 식의 표현을 했고, 남친은 그 이야기에 겁을 먹고는 또 맹목적인 사과를 하며 위기를 모면하려 애썼다. 게다가 저런 식의 대화는 100번을 해도 그냥 늘 같은 패턴으로 마무리되는 까닭에, 아무것도 나아지는 게 없으며 좀 변한 것 같아도 그건 그저 ‘상대가 좀 더 겁쟁이가 된 것’에 가까울 수 있다는 걸 기억했으면 한다.
간만에, 모처럼 맑았던 날이었다. 요즘 왜 이렇게 매뉴얼 업로드가 느리냐는 항의를 많이 받는데,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들 예정이라 먼저 좀 해야 할 일들이 생겨서 그랬고, 금요일부터는 또다시 불꽃 포스팅을 할 테니 내일까지만 양해를 좀 해주시길 부탁드린다. 새로운 카테고리는 아마도 <결혼준비매뉴얼>이라는 이름을 달게 될 것 같은데, 자세한 얘기는 그 카테고리 새 글에서 하기로 하자. 자 그럼, 다들 편안한 저녁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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