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동생이 이 사연을 양고기 집에서 내게 털어놓았다면, 난
“지가 그러고 싶을 때만 그러는 구남친은, 제대로 된 연애 대상이 아니야 인마.”
라는 이야기와 함께 칭따오를 한 병 더 시키라고 했을 것 같다. 얼마 전 난 양고기를 처음 먹어봤는데, 양고기에 대해선 ‘이것보단 소고기가 더 낫군’이란 생각을 했지만 시원하게 목넘김과 함께 다음 날 근육통도 없는 칭따오에 대해선 큰 매력을 느꼈다. 아무튼 지금 칭따오가 중요한 게 아니고.
떨어져 있을 때에는 생사도 확실히 알 수 없다가, 몇 주 또는 한두 달 만에 연락해 만나면 세상 이런 남자 또 없을 것처럼 잘해주는 구남친에 대해서는 희망을 접자. 그런 구남친에 대해
‘사귀는 것 빼고는 정말 다 잘해주고 완벽하니, 이제 사귀기만 하면 되는 거야.’
라는 생각을 하는 대원들이 꽤 많은데, 그건 사실
-사귀지 않으면서 그렇게 만날 수 있으니까, 만났을 때 잘해주고 챙겨주는 것.
에 가깝다.
사연의 주인공인 T양은 상대가 겨울에 목도리도 사주고, 겉옷도 벗어주고, 밥 먹을 때 가시도 발라주고, 마실 물도 떠다 주고 했던 것들을 보며 여전히 그가 T양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이처럼 마음도 있고 사귀고 싶지만 다른 이유들로 사귈 수 없는 게 괴로워선 그냥 잘해주기만 하는 상황’인 거라 생각하는 것 같은데, 비슷한 상황에서 미련을 갖고 계속 좋아하게 만들려는 일부 구남친들의 노력은 그것보다 훨씬 치열한 경우가 많다.
구여친이 좋아한다고 했던 걸 사가지고 오는 경우부터 시작해 구여친 자취방에 찾아와 화장실청소까지 다 해놓는 사례, 나아가 구여친이 ‘이런 의미 없는 관계는 이제 그만 하고 싶어. 나도 제대로 된 연애 하고 싶어’라며 관계 정리를 요구하자 집 앞에 찾아와 하염없이 기다리거나 자신도 너무 힘들다며 오열하는 사례 등, 때문에 상대의 마음이 진짜 그런 것 같아서 다시 한번 희망을 걸어보는 되는 사례가 수두룩하다.
난 10년 넘게 연애사연을 받아오며 연애매뉴얼을 쓰는 중인데, 어떤 사연을 읽고 가장 깊은 고민을 하냐고 물으면 바로 저런 사연을 받고 그런다고 대답할 것 같다. 특히
-20대 중후반쯤에 만나 연애하다 헤어지곤, 지금은 둘 다 30대가 된 경우.
-새 사람과 새로운 연애를 하기보단 구남친을 달래 정착하려 하는 경우.
-구남친이 진심으로 걱정하는 척하거나 ‘우리가 진짜’라는 뉘앙스를 풍길 경우.
에 속한다면, 내가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며 말려 겨우 정상궤도에 올려놓아도, ‘잊을만 하면 찾아오는 구남친’의 3주만의 등장에 쉽게 넘어가 버리고 만다. 그렇게 서른 하나 보내고, 서른 둘 보내고, 서른 다섯까지 보내다
“무한님, 저도 이제 정말 그만 하고 싶어요. 이 관계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제 삼십 대의 절반은 그냥 가버렸어요. 진짜 정신 차릴 수 있게 도와주세요.”
라며 애원해 내가 다시 돕다 보면,
“근데 몇 년을 이러는 걸 보면, 얘도 아예 마음이 없거나 생각이 없는 건 아닐 거잖아요. 진짜 마지막으로 확인해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저 결혼도 이미 포기했어요. 얘랑 결혼 안 해도 돼요. 그냥 잘 지내고 싶어요.”
라는, 가슴이 먹먹하고 손발이 떨려오는 얘기를 또 하곤 한다.
이대로라면, 난 바로 저런 진행이 T양의 미래가 될 거라 생각한다. 상대가 외롭고 심심할 때 언제든 연락하면 T양이 반응하니 그땐 누구보다 T양을 위해주고 잘해주는 척하지만, 그렇지 않을 땐
-우리가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내가 왜 너에게 보고를 해야 하냐.
-너랑 나랑 여행 같이 갈 사이는 아니잖느냐.
-난 그냥 이 정도가 제일 편하다. 더 뭘 하려는 건 부담스럽다.
라는 이야기나 들어야 하는 관계. T양의 선배대원들 중엔, 찾아왔을 땐 그보다 더 달콤할 수 없을 정도로 다음에 뭐 같이 하고 뭐 같이 먹자는 얘기를 하지만, 그러고 돌아가선 약속한 날이 되어 연락하면
“담에 하자. 일이 있어서 같이 못 간다니까. 내가 너 이렇게 막무가내로 화내고 내 말은 듣지도 않는 것 때문에 못 만나는 거야. 연락하지 마라.”
라는 이야기를 하는 상대 때문에 엄마도 모르는 알코올중독에 걸린 대원들도 있으니, 제발 그 길만은 걷지 말았으면 한다.
저렇게 다신 안 볼 것처럼 차갑고 무책임하게 끊었다가도, 2~3주 지나면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나와. 치킨 먹게.” 등의 이야기를 앞에서 희망고문 하는 사례가 대부분이니, 대부분을 팽개쳐 두고 있다가 어느 날 잠깐 당겨보는 상대에게 넘어가 수 년을 고생하진 말았으면 한다.
또, 그런 사연을 모아 통계를 내보면 ‘사실 사귈 때 이렇다 할 무엇도 없었던, 그냥 지나가면 지나갔을 관계’인 사례가 8할 이상이니, 그게 ‘진짜 사랑’이어서가 아니라 이쪽의 외로움과 폐쇄성으로 인해 유지되고 있는 건 아닌지도 곰곰이 한 번 생각해 봤으면 한다. 자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다들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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