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롤플레잉 게임처럼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유명한 작가들이 털어놓는 <문학소년 시절 이야기>를 배 깔고 누워 읽으며 그들의 발자국을 따라 밟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전국 각지에서 시행하는 백일장을 돌고, 문예공모전 등에 글을 보내며 '경험치'를 쌓았다. 운이 좋았는지 크고 작은 대회에서 상도 좀 받았는데, 수상자 명단을 확인하면 항상 빠짐없이 이름을 올리는 두 학교가 있었다.
옥천고
안양예고야 '문예창작과'가 있는 곳이니 당연하다 생각했지만, 옥천고는 일반 고등학교 일 텐데 글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는 녀석들이 왜 이리 많은지 궁금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지용 시인이 <향수>에서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고 아련하게 부르던 곳이 바로 '옥천'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때부터 '옥천'은 내게 '작가를 품는 동네'라는 인식이 생겼다. <임꺽정>에서 '황봉출'이 백두산에서 나고 자라 험한 산길에 익숙하며 자연스레 발이 빨라진 것처럼, 옥천에서 살다보면 그 자연환경이 사람을 작가로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옥천에 대한 마음을 교복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지, 교복을 벗고 난 뒤에는 잔디밭에서 선배들이 따라주는 막걸리를 마시고, 오른쪽 어깨에 총을 맨 채 경계근무를 서고, 구둣발로 정강이를 맞아가며 배웠다는 어느 멍청이의 영웅담을 들어주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그리고 자전거로 동네를 정복하며 돌아다니다 보니, 좀 먼 곳까지 다녀오고 싶어졌다. 그래서 검색을 하다 보니,
'어? 옥천? 향수 100리길?'
옷장을 정리하다 예전에 입던 옷의 주머니에서 급박하게 적어놓은 쪽지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옥천에 대한 그 마음은 유효기간이 지났을지 모르지만, 언제나, 끌리면 간다.
▲ 가는 길, 점심을 먹으러 들른 음성휴게소. 비가 쏟아지고 있다.
일산에서 옥천까지 가는 방법에는 자전거, 자동차, 고속버스, 기차 이렇게 네 가지 방법이 있다. 우선, 짐승 같은 다리 근육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자전거를 타고 가는 방법은 제외했다. 기차에는 원칙적으로 접히거나 분해 가능한 자전거만 실을 수 있다고 해서 기차도 제외했다. 몇몇 사람들이 기차에 자전거를 싣고 떠난 경험담을 들려주었지만, 이상한 책임감을 가진 -융통성 없는- 담당자를 만나게 되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길 수 있기에 문제를 만들지 않기로 했다. '에코레일'이라는 자전거여행 전용 열차도 알아봤지만, 가뭄에 콩 나듯 운행하는데다 일정도 맞지 않았다.
화정터미널에서 대전까지 고속버스를 타고 간 뒤, 대전에서부터는 자전거를 타고 옥천까지 이동할까 했지만 솔직히 귀찮다. 그래서 친구(이하 홍박사) 차에 자전거를 싣고 가기로 했다. 이 얼마나 쿨한 결정인가. 역시, 차가 편하다.
▲ 오랜만에 휴게소 우동 한 그릇. 다양하게 먹은 건 자랑. 맛이 다 똑같은 건 안자랑.
점심은 휴게소 우동을 먹었지만, 저녁식사는 옥천의 맛집을 찾아갈 생각으로 휴게소 앞 휴지통 근처에서 차렷 자세로 담배를 피우는 군인에게 말을 걸었다.
군인 - 이병...아...네
무한 - 혹시 옥천에 유명한 맛집 같은 거 있나요?
군인 - 옥천... 음... 옥천.. 포도?
무한 - 네... 감사합니다.
군대와 사회의 시차적응이 아직 안된 군인을 휴게소에 두고 다시 길을 떠났다. 군복무시절 분대 과자회식 하기 위해 분대활동비를 줘 PX에 보냈더니, 칸쵸만 2만원어치 사 왔던 어느 후임이 생각났다. 칸쵸가 제일 맛있어서 칸쵸만 사왔다던 그 녀석은 잘 살고 있을까.
▲ 드디어 옥천! 다행히 옥천엔 비가 안 오고 있었다.
다행히 옥천엔 비가 내리지 않았다. 사실, 비가 오면 우중라이딩 할 생각을 나 혼자 몰래 품고, 같이 간 홍박사와 공쥬님에게는 "옥천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이라며 훼이크를 써 떠난 여행이었다. 박민규식으로 얘기하자면, 다행입니까? 다행입니다, 정도의 느낌.
▲ 자전거 펑크로 인해 튜브 교체후 옥천의 바람을 타이어에 주입중인 홍박사.
홍박사 자전거의 펑크를 해결하기 위해, 옥천의 '자전거샵' 이라기 보단 '자전거포'라는 느낌이 강한 가게에 들러 펌프를 샀다. 자전거 상태를 본 주인아저씨가 튜브교체를 권했지만, 자전거 펑크 때우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라며 펌프만 사서 나왔다. 가게 옆에서 바퀴를 분해한 후 튜브의 구멍을 확인하고, 샌드페이퍼로 밀고, 본드를 칠한 후, 패치를 붙였다. 그리고 바람을 넣었더니, 피슈슈슈숙. 다시 가게에 들어가 튜브를 교체했다. 주인아저씨는 묘한 미소를 지은 채 아무 말 없이 튜브 교체작업을 하셨다.
▲ 장계관광지 주차장에 있는 조형물. 이런 거 참 좋다.
소설가가 흙탕물에서 수초를 허리로 휘감고 먹이를 한 입에 삼키는 '가물치'라면, 시인은 1급수의 찬 계곡물에서 급류를 몸으로 느끼는 '금강모치'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과 시 둘 다 쓰시는 분들도 있던데, 그럼 그 분들은 뭔가요?"
어려운 질문이다. '황쏘가리' 정도로 해 두자.
▲ 장계관광지 입구 담에도 <향수>의 구절이 옮겨져 있다.
일산에도 이처럼 잠시 눈을 둘 수 있는 문장이나 그림 등이 있었으면 좋겠다. '꽃의 도시 일산'이라는 테마로 여기저기 꽃 그림이 있고, 가로등에 '고양시의 꽃, 고양시의 새, 고양시의 나무' 등에 대한 인쇄물이 붙어있긴 하지만 그것보다 고양시에 현재 거주하고 있거나 고양시에 생가가 있는 예술가들을 테마로 마을을 꾸미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 그리고 윗 사진의 '석근 별'에 대해서는,
- 김지수, <향수>의 올바른 계승을 위하여, 지용회보 제2호 중에서
라고 설명하는 글이 있으니, "석근 별이 뭐지?"라며 궁금증이 드는 분들은 참고하면 되겠다. '성근 별'은 별들이 촘촘히 모여 있지 않고,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모양이라고 한다.
▲ 일반 가정집으로 보이는 곳의 벽면도 그림과 문자로 장식되어 있다.
시 <향수>에 나오는 '해설피'에 대해 조금 더 얘기를 하자면, 그 뜻이 '해가 질 무렵'이라는 주장과 '구슬프게'라는 주장이 있는데, 옥천에서 '해설피'가 '해가 질 때 빛이 약해진 모양'의 뜻으로 쓰이는 까닭에 '해가 질 무렵 빛이 약해진 모양'이라는 주장이 맞는 듯하다.
언젠가 정지용에 대해 '인지'되는 시가 아닌 '감지'되는 시를 쓰는 시인으로 설명한 글을 봤다. 그 말처럼, 하나하나 따지며 해석하는 것 보다 마음에 울려오는 대로 시를 감상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좀 다른 얘기지만, 난 종종 노랫말을 잘못 알아들어 더 매료되었던 경험이 있기에 해석의 8할은 내 몫으로 하고 싶다.
▲ 소나기를 피하려 버스정류장에 잠시 머물렀다. 내 자전거와 공쥬님 자전거.
"자전거 (색)깔맞춤 하신 건가요?"라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그러니까, 그게, 소소한 재미다. 커플이니까 꼭 똑같이 뭘 해야 한다는 강박만 아니라면, 같은 물건을 소유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 생각한다.
▲ 마을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잠시 쉬다가 한 컷. 버스가 늘 보던 그것과 달라 낯설다.
위에서 자꾸 잡설만 풀었으니, 다시 옥천얘기로 돌아와 보자. 위의 저 사진을 찍을 때 까지만 해도 '옥천'과 '향수 100리길'에 대해 실망을 하고 있었다. 향수 100리길은 지역 자전거 동호회인들이 발굴했고, TV예능프로그램의 테마로 등장하며 인기를 얻었으며, 이와 연계된 철도상품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향수 100리'를 알리는 표지판이 없었다. 바닥에 파란 락카스프레이로 표시된 화살표와 '향수 100' 또는 '100'이라는 글씨에 의존해 길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장계관광지에서 마을까지 가는 길이 너무 위험했다. 갓길이 없기에 수시로 차를 살펴야 했고, 두 차로에 모두 차가 올 때에는 바짝 긴장해야 했다. 이런 길을 달릴 거면, 굳이 옥천까지 올 필요 없이 일산 바로 옆의 파주만 가도 충분히 달릴 수 있기에 실망이 컸다. '여기 사람들이 자전거도로를 경험해 본 적 없어서 이 길을 좋다고 추천한 것 아닐까?'하는 추측까지 했을 정도였다.
▲ 축사라고 하긴 좀 그렇고, 집들 사이에 소가 있었다. 말 그대로 집들 사이에!
옥천에 대한 실망은 마을에 들어서며 사르르 녹기 시작했다. 닭들이 마을 아무데서나 놀고 있고, 집과 집 사이에 소들이 살고 있었다. 일산이었으면 당장 분뇨 냄새와 소 울음소리로 인한 민원이 폭주했을 텐데, 옥천에는 소들이 주차장에 있는 당연히 자동차가 세워져 있는 것처럼 집과 집 사이에 살고 있었다.
무엇보다 마을을 지나며 만난 어르신들이 모두 웃으며 반겨주셨다. "향수 100리 왔나부네."라거나 "어디서 왔어?"라며 인사를 해 주셨다. 말없이 자전거만 타다 돌아오는 일산에서의 라이딩과 다른 점이었다. 목마르면 마을회관에서 물마시고 가라는 친절을 보여주셨다. 예전 광주 여행을 갔을 때 기름 넣으러 주유소에 들렀더니, 밥 안 먹었으면 먹고 가라시던 어느 아저씨가 떠올랐다. 당시엔 주유소에서 캔커피는 받아봤어도 식사초대를 받은 적 없기에 '서..설마.. 납치?'라며 사양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정'인 듯하다.
▲ 금강 줄기에 접어들며 한 컷, '국가하천'은 나에게 큰 의미다.
금강에 접어들면서는 옥천에 대한 실망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강 자전거도로는 "바로 옆이 한강입니다."라고 말하는 듯하지만, 금강의 비포장도로는 "야! 금강이다!"라고 느끼게 된다.
한창 낚시에 열광하고 있을 때, 내가 다니던 곳들은 '지방 2급 하천'이거나 '지방 3급 하천'정도의 물줄기였다. 그러다 양수리쪽을 지나며 '국가하천 북한강'이라는 표지판을 봤을 때의 기분이란! 마치 동네에서 꼬꼬마들과 농구만 하다, 어느 날 마이클 조던을 만난 느낌이었다. 그 이후로 '국가하천'이라는 표지판을 볼 때마다 나만 아는 두근거림이 생겼다.
▲ 금강변 빛 내림이 있는 곳에서 '청록파(현재 회원 2명인 초록 자전거 동호회)' 기념촬영.
아 좋다. 강물에는 오리들도 놀고 있고, 해오라기와 백로도 보인다. 길 앞쪽에는 한 농부가 밭에서 나온 잔가지들과 푸석푸석한 풀들을 걷어내 태우고 있다. '아! 이것은 시골에서만 맡을 수 있는 푸근한 냄새!' 라고 생각했지만,
'응? 이건 비닐 태우는 냄샌데?'
뭐, 옥천이라고 왜 비닐이 없겠는가.(응?) 아무튼 금강의 비포장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미 향수 100리길을 달리고 간 많은 라이더들이 "MTB를 타고 가셔야 합니다. 로드차나 미니벨로는 어렵습니다."라고 말한 이유를 알았다. 좀 과장하자면, 금강변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건 자전거로 산타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덕분에 공쥬님 자전거의 안장 나사가 풀렸다. 육각렌치가 없기에 당장 손 볼 수 없고, 근처에 슈퍼도 없는데 자전거샵을 기대하긴 더 어려운 일이고, 손으로 돌릴 수 있는 데 까지만 나사를 조이곤 다시 라이딩을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안가 다시 안장은 코를 높이 쳐들었다.
"자전거 샵에서 제대로 정비를 안 해줬나 보죠?" 라고 묻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안장은 내가 따로 교체했다. 역시, 비전문가의 치부는 이런 곳에서 드러난다. 생각해보니, 안장을 교체하던 날 수평을 맞춘 뒤 확실히 조일 생각으로 "타 봐봐. 각도 맞아?" 따위의 얘기만 하곤 더 조이지 않았다. 앞으로 자전거여행을 갈 때에는 펑크패치세트, 펌프, 예비튜브, 육각렌치, 드라이버를 꼭 챙겨야겠다.
▲ 금강휴게소로 향하는 길, 해가 지는 금강 풍경 한 컷.
공쥬님의 자전거 안장이 계속 신경 쓰였다. 그리고 향수 100리길은 생각보다 길었다. 하지만 이런 순간일수록 유머는 깨끗하게 닦아야 한다.
무한 - 집에서요.
동네아저씨 - ......
간혹 하이개그가 먹히지 않긴 하지만, 나중에 잠자리에 들 때 다시 생각해보면 이불에 하이킥을 하며 빵 터질 수 있다. 아래처럼 말이다.
아저씨부인 - 뭔 일이래? 왜 그렇게 웃어? 뭔데?
동네아저씨 - 앜ㅋ 잠깐만ㅋㅋㅋ 집에서 왔댘ㅋㅋㅋㅋ앜ㅋ 내 배꼽ㅋㅋㅋ
▲ 금강휴게소 도착! 여기, 정말 괜찮은 휴게소다.
금강휴게소에 들어서니 사람들이 '응? 휴게소에 왠 자전거?'라는 눈길로 우리를 바라봤다. 궁금해 하는듯한 사람들이 더 궁금해 하라고 난 옆에 있던 홍박사에게 "부산까지 얼마나 남았지?"라며 떡밥을 뿌렸다. 그 떡밥을 문 몇 사람들이 자전거와 우리에게 번갈아 눈길을 주었다. 자전거를 묶어두고 휴게소에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 여러 메뉴 중에 고민하다 결국 치즈돈가스로 결정.
돈가스는 괜찮았지만, 홍박사와 공쥬님이 주문한 불고기덮밥과 제육덮밥은 소금이 좀 많이 들어간 듯 했다. 다들 배고팠기에 엄청난 집중력으로 식사를 했다. 밥이 좀 적어 공쥬님이 접시를 들고 가 리필을 부탁하자 처음 나온 밥 양의 두 배 가까운 밥을 주셨다. 자, 이제 충전을 했으니 열심히 페달을 밟을 시간이다.
▲ 정지용 생가 도착. 표지판의 화살표 때문에 더 갈뻔 했음.
그러니까 1930년대 우리 문학을 이야기 할 때, "시는 지용, 소설은 상허(이태준)."라는 문장이 문학소년의 가슴팍에 무협지에 나오는 '동사서독' 마냥 꽂혔었다.
▲ 정지용 생가 대문 옆에 놓여있는 <향수> 시비.
이 얘기는 꺼낼까 말까 많이 고민했는데, 정지용 시인의 <향수>는 외국시의 모작이라는 주장이 강하다. 이미 알고 계신 분들도 있겠지만, <향수>는 Trumbull Stickney의 <Mnemosyne>라는 시와 상당부분 일치한다. 개인적으로 난 정지용 시인이 <Mnemosyne>를 읽은 뒤 그 시에서 뼈대와 영감을 주는 시어를 가져와 자신의 색을 입혔다고 생각한다. 내용이 궁금하신 분은 '시의 모작에 대한 논고'라는 검색어를 이용해 살펴보시길 바란다.
▲ 너무 늦은 시간이라 생가의 대문은 잠겨 있었다.
모작 이야기를 해서 갑자기 좀 뻘쭘하게 되었는데, <향수>가 외국 시에서 뼈대와 시어를 가지고 왔다고 해서 그 시 자체를 접어 둘 필요는 없다. 위에서 소개한 글에 나오는 <Mnemosyne>가 미국식의 커다란 '후라이드 치킨' 이라면, <향수>는 한국 입맛에 맛도록 바뀐 '양념통닭'이다. "황소는 초장에서 여린 풀 뜯고 있었지"와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정리하자면, '모작'이나 '표절'에 대해 '받아들이는 사람 나름'이라며 어깨동무하고 넘어가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밑그림을 가져다가 색칠만 했으면 색칠만 했다고 밝혀야 하고, 훗날 부끄러워질 일이라면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양심이 다 같은 척도를 가진 것이 아니기에 그 선을 앞으로 뒀다 뒤로 뒀다 할 수 있겠지만, 너무 멀리 가 버리면 그 차이가 나중에라도 분명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 <향수>의 구절이 들어가 있는 한 가게의 간판. 구읍마을.
정지용 생가 옆으로 정지용 시인의 시에서 딴 시어들로 간판 이름을 하거나 간판에 시를 옮겨 적은 가게들이 보이는데 여기가 '구읍마을'이다. 장계관광지까지 가는 길 대부분이 오르막이라 길래 쉬어 갈 생각으로 근처 슈퍼에 자리를 잡았다. 맥주를 사 슈퍼 앞 평상에서 목을 축이는데, 슈퍼 아저씨가 심심했던지 나와서 이것저것 묻는다. 어디서 왔냐, 향수 100리길 여행 중이냐, 집까지 자전거 타고 가냐, 등등 가벼운 문답이 오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연히 화제가 '정지용 생가'로 옮겨갔고, 아저씨는 현재 생가는 자신이 어릴 적 보았던 생가와 다르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의 생가는 터만 그대로이고 예전 집을 '복원'한 것이 아니라 주변에 아무 자문도 구하지 않고 뚝딱뚝딱 만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집이 남향인지 북향인지도 신경 쓰지 않고, 다섯 채의 집이 두 채로 바뀌었으며, 볏단을 쌓아두는 곳이나 소를 기르던 곳도 다 없어졌다고 했다. 우리가 헷갈려했던 '생가 표지판'에 대해서도 직접 나와서 확인하고 만들지 않았는지, 생가는 세 발짝만 걸어가면 되는데 표지판에 긴 화살표를 해 놨다며 아저씨가 고개를 저었다.
생소한 단어들이라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저씨가 어릴 적 보았던 예전 생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마치 자신이 살던 옛 집을 설명하듯 자세히 이야기를 해 주셨다. 대문 말고 부엌 쪽에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도 하나 있었고, 대문 옆에는 식량을 쌓아두던 곳이 있었으며, 집안의 잡일을 하던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고 한다. 생가 바깥으로는 큰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아저씨도 어린 시절 그 아래서 숨바꼭질도 하고 개천에 들어가 고기도 잡으며 놀았다고 한다.
정지용 시인을 지금 만난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옥천에서 정지용 시인은 사랑받고 있었다. 월북이냐 납북이냐의 논란이 있었고, 한 땐 이름을 말하는 것조차 금지된 작가였지만, 지금은 옥천 사람들이 집안의 장남 자랑하듯 정지용 시인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작가에게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이 어디 있을까? 작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의 시를 외우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기념한다는 것. 정지용은 행복한 작가다.
시어와 모작여부, 해방 이후의 행보에 논란이 있는 정지용 시인은 '죽음'에 대해서도 두 가지 주장이 있다. 현재 널리 알려진 대로, 탈북한 계광순 전 국회의원이 "1950년 7월 북한군에 의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으며 이후 평양교화소(교도소)로 이감돼 춘원 이광수와 같은 방을 썼다."라며 같은 해 9월 23일 유엔군의 폭격 때 자신은 평양 감옥을 탈출했지만 정지용 시인은 사망했다고 한 주장과 1950년 9월 21일 남쪽에서 문화공작대 임무를 하고 북으로 돌아가던 석인해 교수가 동두천에서 정지용 시인을 만나 산을 넘던 중 그 산 이름이 '소요산'이라는 말을 들은 정지용 시인이 이름이 매우 풍류적이라며 껄껄 웃었고, 강원도 태백산 줄기를 타기위해 동쪽으로 가던 중 미군 비행기의 기총소사에 가슴을 맞고 숨졌다는 주장이 있다.
이 많은 이야기들을 싹 지우고 나면, 이번 라이딩에선 옥천과 정지용 시인, 그리고 자전거가 남는다. 옥천이 정지용 시인을 키워낸 것은 맞지만, 그만큼 옥천의 품에 깊게 안긴 것도 정지용 시인이었다. 그 품에서 느낀 희노애락을 글로 적었고, 그것이 '정지용'을 만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정지용 시인을 품고 있는 옥천을 난 자전거 페달을 굴리며 돌았다. 이쯤에서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고 마무리를 짓기엔 내 솔직한 심정과 너무 거리가 멀기에, 향수 100리길 라이딩 후 마음에 와서 박힌 감정을 정지용 시인의 시 한 구절 인용해 적으며 마칠까 한다.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 정지용, <유리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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