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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글모음/군생활매뉴얼

군생활매뉴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빕니다.

by 무한 2009. 5. 23.
1968년 3월 8일 입대, 군번 '51053545' 노무현
강원도 원주 1군 사령부 부관부 행정병 복무,
1년 후 원통의 12사단 (을지부대) 52연대 2대대의 소총소대로 자원


























<국방일보 '추억의 내무반' 대통령 특별 기고문 전문>

어려운 일 잘하는 사람이 군생활 잘하는 사람

국방일보 ‘추억의 내무반’이 100회를 맞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100번째 필자로 기고하게 돼 매우 기쁩니다. 아울러 지금도 국토방위에 여념이 없는 국군 장병 여러분의 노고에 치하와 격려를 보냅니다.

이제 완연한 가을입니다. 청와대 주변에도 낙엽이 수북이 쌓였습니다. 가을 낙엽은 보기에는 멋지지만 장병들에게는 떨어지는 즉시 치워야 할 ‘애물단지’입니다. 낙엽과 한바탕 씨름을 하고 나면 곧 눈과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제가 근무하던 부대도 눈이 참 많이 내리는 곳이었습니다. 눈을 보기 힘들었던 김해와 부산에서만 살다가 입대한 저는 하얗고 소담스럽게 내리는 눈이 마냥 신기하고 좋아 보였습니다. 부대에 첫눈이 내렸을 때 무심코 “와, 눈 한번 멋지게 내린다”고 말했다가 선임병에게 눈물이 찔끔 나도록 혼쭐났습니다. 눈을 치우는 일이 그렇게 고달픈 일인 줄 눈이 온 다음에야 알게 됐습니다. 지금도 그때 눈 치우던 생각을 하면 정신이 다 아찔해집니다.

저는 병사 출신입니다. 일반 병사 출신이 대통령이 된 것은 제가 처음입니다. 1968년 3월에 군번 ‘51053545’를 받고 입대해 71년에 상병으로 만기 전역했습니다. 지금도 병장을 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당시에 베트남 참전 장병들이 많아 병장 정원이 크게 줄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원주 1군사령부 부관부에서 군생활을 시작했는데 신병 시절을 힘겹게 했던 것은 시도 때도 없는 ‘사역집합’이었습니다. 사역이라는 것이 일과가 없는 시간에 집중되다 보니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의 휴식을 고스란히 빼앗기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그래도 군기가 바짝 든 신병이었기에 '사역병 집합' 구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제일 먼저 뛰어나갔습니다.

당시 제일 편한 사역은 연병장에서 클로버를 뽑는 것이었습니다. 잔디밭에 앉아 클로버를 뽑는 일은 단순하고 쉽기도 했지만 슬글슬금 요령을 피울 수도 있는 꽤 괜찮은 사역이었습니다.

군생활을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유난히 센 군기와 잦은 기합이었습니다. 제가 근무하던 부관부가 당시에는 담뱃값 정도 챙길 수 있는 자리라 그랬던 것 같습니다. 1년을 그렇게 지내다가 전방 차출이 있다는 소식에 즉각 지원했고, 곧 12사단으로 옮겨 갔습니다. 지원할 때에는 호기롭게 했습니다만 막상 버스를 타고 가는 길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사방이 가파른 산으로 둘러싸여 하늘이 손바닥만하게 보이는 그야말로 첩첩산중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하던 그 원통이었습니다.

군사령부 부관부에서 고생한 탓에 이번에는 일반 보병중대로 배속되기를 바라며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대대 CP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 휴가 가는 선배들이 “중대에서는 근무 중에 졸면 목을 베어간다”고 어찌나 겁을 주던지 결국 저는 대대장 당번병으로 주저앉게 됐습니다. 그리고 건봉산 대대 상황실에서 몇 달 동안 생활했습니다.

비록 철책 근무를 서는 보직은 아니었지만 휴일도 없이 밤을 꼬박 새우고 낮에는 새우잠을 자야 하는 생활이 이어졌습니다. 더 힘들었던 것은 매일 물을 길어 올리는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전방 철책중대로 가서 중대 본부에서 근무하다가 마침내 소대에까지 내려가 철책근무하고 GP근무도 하다가 전역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방이든, 후방이든 쉬운 곳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의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이겨내지 못할 만큼의 환경은 아니었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합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할 때 보람도 얻고 군생활에 재미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이른바 적극적 사고라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자원하는 사람이야말로 군생활을 가장 잘하는 사람입니다.

군대 동기 중에 엄창호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항상 어려운 일, 궂은일을 도맡아 앞장섰던 친구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국군의 날 행사에 차출되면 몇 개월 동안 여름 땡볕에 고생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도 그 친구는 누구나 꺼릴 만한 제병지휘본부 차출을 자원했습니다. 국군의 날 행사에 참석해 사열하면서 그 친구 생각이 났습니다.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는지 모르지만 언제나 남을 편안하게 해주는 좋은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을 겁니다.

남자들은 셋만 모여도 밤을 새워 군생활의 무용담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힘들었지만 자랑스러운 경험이라고 여기기 때문일 겁니다.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군에서 어려움을 견디며 환경을 극복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야전삽 하나와 곡괭이 하나를 주고 벙커를 지어내라고 하면 전쟁 때 쳐놓았던 유자망을 철사 삼아 통나무를 엮어 귀틀집 같은 벙커를 지어냈습니다.

전역 후 제가 사법시험에 도전하고 또 어려움 속에서도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은 군에서 단련된 ‘하면 된다’는 강한 정신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집니다. 리더십을 키우고 협력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대통령이 된 지금도 군에서 터득한 이러한 교훈은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국군은 나라를 지탱해 주는 기둥이자 대들보와 같은 존재입니다. 지난 국군의 날 행사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우리 군의 위용을 보면서 말할 수 없이 뿌듯한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국가안보뿐 아니라 국민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그 존재감은 더욱 커져 보입니다. 지난 태풍 피해 복구에도 우리 장병들의 활약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힘들지만 조국을 위한 여러분의 헌신은 무엇보다 값지고 영광된 일입니다. 우리 국민은 한없는 믿음과 애정을 갖고 우리 군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군생활에 무운을 기원합니다.

2003년 11월 7일

노무현 대통령


아침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듣고, 이유를 알 수 없는 패배감이 들었다. 이 감정을 글로 옮길까 하다가, 결국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말' 때문에, 또 '글' 때문에 괴로워 하셨다는 생각이 들어, 정치적인 이야기나 사상, 이념, 이런 걸 다 떠나 한 사람 '노무현'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았다.




다 내려 놓으시고, 이제는 좋은 곳에서 편안히 쉬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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