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웹에서, ‘1900년대 중반 경의선 기행’에 대한 글을 본 적 있다. 글을 쓴 사람이 특별한 곳을 간 것은 아니고 경의선을 타고 끝에서 끝까지 다녀온 이야기를 적어둔 글이었는데, 경의선을 타고 통학했던 나는 그 때의 열차이용객과 역사의 모습을 현재의 모습과 비교하며 참 재미있게 읽었다. 특히 내가 주로 이용하던 ‘운정’역엔 노란색의 커다란 물탱크 같은 게 있었는데, 그게 옛날 증기기관차 시절 급수를 위해 마련되어 있던 물탱크라는 것도 그 글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도, 마침 어제 연천 계곡을 다녀온 김에 ‘2016, 연천 계곡으로 피서 온 사람들의 모습’을 좀 남겨둘까 한다. 난 경의선 기행문을 쓴 사람처럼 지역의 역사와 여러 가지 것들의 유래를 설명하기엔 관련 지식이 부족하니, 하루 종일 관찰한 피서객들의 분류와 특징묘사에 중점을 둘까 한다. 시작해 보자.
1. <아빠 어디가>를 따라하고 싶은 ‘아빠족’ 그룹.
아직도 식지 않은 육아 예능의 열풍 때문인지, 가족단위로 온 피서객 중 아이가 ‘유치원생~초등학생’인 그룹에선 ‘아빠’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보트를 밀어주는 아빠, 튜브를 잡아주는 아빠, 아이에게 수영을 가르쳐주는 아빠, 다슬기를 함께 잡아주는 아빠 등을 볼 수 있었다.
안타까웠던 것 하나는, <아빠 어디가>류의 예능에선 ‘엄마’들이 잘 등장하지 않는 까닭에, 현실에서도 ‘아빠와 아이들’만 물속에 들어가 놀 뿐 엄마들은 방청객처럼 멍하니 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는 점이다. 물 차갑고 살 타기 싫어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여하튼 짐이 있는 평상을 아주머니 혼자 지키며 물속에서 노는 가족들을 지켜보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2. <아빠 어디가>를 따라하긴 너무 늦은 또 다른 ‘아빠족’ 그룹.
<아빠 어디가>류의 예능을 따라하긴 너무 늦은, 그러니까 큰 아이가 ‘고등학생’정도 된 가족 그룹에선
- 아빠가 도착과 동시에 술 마시고 곯아떨어지고, 엄마와 아이들이 방황하는 모습.
을 볼 수 있었다. 오후에 운전해서 돌아가려면 아빠가 빨리 술에서 깨야 하니 낮술을 하곤, 그대로 곯아떨어진 것이다. 또, 고등학생인 애는 또 애대로 질풍노도의 시기에 접어들어 있으니
‘이런 델 가족들과 함께 오다니 내가 뭐 하는 거냐. 무슨 재미냐. 아빤 잠만 자고 이건 또 뭐냐.’
하는 생각에 겉돌았다. 그래서 엄마와 작은 애가 계곡물에 발만 겨우 담그고 있고, 그걸 큰 애는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고, 뭐 그런 식이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다들 개인플레이를 하다가, 집에 가야 하는데 아빠 언제 깨는 거냐는 대화를 나눴다.
비슷한 그룹 중 아빠가 흥이 많아서, 가족들 놔두고 혼자 다이빙도 하고 수영도 하다가, 술기운을 이기지 못해 뭍으로 올라와 아무렇게나 곯아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가족들이 평상 쪽으로 와서 자라고 해도 그 아저씨는 거기가 좋다며 우겼는데, 돌밭에서 직사광선 받으며 2~3시간 정도 자고 일어난 뒤 피부가 다 익었다며 고통을 호소했다.
3. ‘계곡은 배경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노름꾼 그룹.
해 떠서부터 해 질 때까지, 물놀이와는 담을 쌓은 채 카드나 화투를 붙잡고 있는 그룹도 있었다. 물놀이를 핑계 삼아 계곡에 오긴 했지만, 사실 목적은 카드나 화투를 하고 노는 것이었던 사람들 같았다. 이들은 평상이 아닌 방갈로나 민박을 잡은 뒤, 방문 연 채 물놀이 하는 사람들을 보며 열심히 노름에 열중했다. 그 중 물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잠깐이라도 물에 들어가고 싶어 물에서 좀 놀다 오자고 하면, 누군가
“몇 판만 더 하고 들어가.”
라는 이야기를 했고, 그 ‘몇 판’이 계속 길어지는지 결국 물엔 들어가지 못했다. 해 지기 직전에야 목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다며 물가로 나온 그룹이 있기는 했는데, 물이 너무 차다며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4. 할아버지 할머니 모시고 3대가 온 대가족 그룹.
두세 집이 같이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와선, ‘삼촌과 아이’ 또는 ‘이모와 아이’들에게 물놀이를 하라고 하곤, 2대에 속하는 사람 중 남자는 고기 굽고, 여자는 상 차리거나 과일 등을 준비하는 그룹도 있었다. 그러다
“아버지 어머니, 보트 한 번 타실래요?”
하면,
“됐다. 너희들 타라.”
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식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또 알았다며 ‘너희들’끼리 보트를 탈 순 없으니, 그냥 조용히 옆에서 괜히 짐 한 번 더 뒤적이고 수박 잘라 내오거나 할 뿐이었다. 3대에 속하는 아이 중엔 또 젖먹이 아이가 있어서, 이모나 삼촌이 철없이 그 아이를 물가로 데려가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애기 거기 오래 있으면 감기 걸린다. 데리고 와.”
라는 이야기를 하는 식이었다. 물론 다 이런 건 아니고, 가족 중 누군가가 교통정리를 잘 해 할아버지 할머니 보트도 태워드리고, 자기들도 물에 들어가 노는 그룹도 있긴 했다.
5. 소음 담당, 친목회 그룹.
계곡의 ‘희로애락’을 모두 담당하고 있는 건, 친목회 그룹이었다. 중년의 남녀들만 모인 이 그룹은, 막걸리, 소주, 맥주 냄새를 혼합해서 풍기며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수박 하나를 자르면서도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화목한 그룹처럼 보이다가도, 얼마쯤 지나
“야, 내가 너보다 언니야. 어디서…, 어?”
라며 다투기도 했다. 그러다 또 누군가 삐쳐서 나가면 달래려고 사람들이 따라 나가기도 했고, 그 중 분위기 파악 못 하고 괜히 한 번 사람들 웃기려고 하던 남자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냉랭한 분위기도 잠시, 누가 또 노래를 부르면 다른 사람이 참견해가며 깔깔거렸고, 나중엔 언제 싸웠냐는 듯 같이 물에 들어가네 마네 하며 놀았다. 그 중 남자들의 관심을 받고 싶은 어떤 아주머니는 자신이 원래 겁이 없다며 다이빙도 시도했는데, 뛰어 내리기 전 괜히 시간을 끌고 다른 아주머니에게
“현숙아~ 사랑해~”
하는 소리까지 해가며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럼 또 이름이 현숙이인 듯한 아주머니는 “나도 사랑해~”하며 화답했고 말이다. 이 그룹이, 계곡을 가장 다양한 형태로 즐긴 그룹이 아닐까 싶다.
6. 못 노는 사람끼리 온 그룹.
평소 잘 어울려 다니거나 계곡 같은 곳에 함께 와 본 적은 없는데,
‘그래, 우리도 한 번 놀러 가보자.’
해서 온 듯한 삼십대 초중반 남녀그룹도 있었다. 평상을 빌리는 것까지는 어렵잖게 성공했지만, 이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서로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도 없고, 숯불을 피울 줄 아는 사람도 없고, 보트를 빌려 타도 노를 저을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그냥 가만히 있던 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다 빌리고 구입하긴 했는데, 그냥 방치해두고 있는 게 좀 안타까웠다. 누군가가 나서서 불을 피우겠다고 하긴 했는데, 토치로 붙여야 하는 물을 신문지 같은 걸 태워가며 붙이느라 연기만 자욱할 뿐이었다. 빌린 보트가 아까워서 누군가 타려고 시도하긴 했는데, 노를 한쪽으로만 저어 빙글빙글 돌기만 했다. 새벽같이 왔는지 자리는 제일 좋은 자리 맡았던데, 그냥 좀 다 안타까웠다.
7. 데이트 장소로 계곡을 찾은 커플들.
내 마음대로 불륜관계로 의심하긴 좀 그러니 ‘중년커플’정도로 정의해 두자. 사십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커플이, 이십대들이나 입을 것 같은 커플 남방을 입고 와서 어설프게 첨벙거리기도 했다. 둘 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으며, 여자는 얼굴이 타지 않게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바닥이 별로 미끄럽지도 않은데 여자는 미끄러운 척을 했고, 그러면 남자는 얼른 옆에 가서 손을 잡아 주었다. 사람들이 별로 없는, 물이 종아리 정도까지 밖에 안 오는 곳에서 얼굴에 미소를 띠운 채 놀다가, 이후 어딘가로 사라져서 행방은 모르겠다.
또, 사귄 지 얼마 되지 않는 듯한 커플도 세 커플 정도 있었다. 셋 모두 이십대 후반 정도인 것 같았는데, 여자가 튜브를 타고 남자가 그 튜브를 붙잡은 채 몸을 밀착시키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특이하게 여자들도
“오빠, 나 여기 발 안 닿아. 어떡해, 어떡해!”
하는 멘트를 공통으로 했다. 발이 안 닿으면 가질 말아야지 왜 거기 가서 그러고 있누? 물이 투명해서 튜브 밑으로 뭘 하는지가 다 보이는데, 과하게 하체를 밀착시키고 있는 게 좀 남우세스럽긴 했다. 남자가 장난을 친다며 튜브를 뒤집었다가, 여자가 바닥에 있는 바위에 발을 다쳐 조기 퇴장한 커플도 있었다.
아, 각자 따로 온 그룹 중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녀 둘이, 계속해서 눈을 마주치고 있는 장면도 목격할 수 있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 둘은 꽤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강렬한 눈빛 교환을 계속 했는데, 난 BGM으로 <Kissing You>를 틀어주고 싶었다.
8. 물고기 잡는 게 목적인 강태공 그룹.
물이 있는 곳에 왔으면, 당연히 물고기를 잡아야하는 것 아니냐며 낚시나 천렵에만 몰두하고 있는 그룹도 있었다. 우선 어항이나 새우망을 사람이 별로 없는 곳에 설치해 두고는, 여울에서 견지낚시를, 수초가 있는 곳에서 족대질을 하며 고기를 잡았다.
내가 한 어항을 살폈을 때, 거기엔 참갈겨니가 가득 담겨 있었다. 강태공들 답게 다슬기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족대질을 해 15리터짜리 양동이가 꽤 묵직해지도록 고기를 잡은 그룹도 있었다. 계곡에서 큰 녀석들을 잡으려면 돌을 뒤집는 게 빠른데, 그걸 잘 모르는지 수초 부근만 공략하고 있었다.
9. MT온 학생들 및 외국인 그룹.
MT온 학생들 그룹은, 누군가를 물에 집어 던져 넣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활기가 넘치며, 서로 살짝 낯선 것 같지만 그 중 ‘러브라인’이 형성되고 있다는 게 눈에 보인다. 안타깝게도 그 중 인기가 없는 인원도 있는데, 그들은 멀리서 혼자 뭘 하다가
“여기 와봐. 여기 뭐 있어!”
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별로 관심을 받지 못했다. 여울 쪽에서
“나 무서워. 도와줘~”
라고 했지만 역시 아무도 안 도와줘서 보는 내 마음이 다 짠했다.
비슷한 그룹으로는, 동남아쪽 사람들로 생각되는 외국인 그룹이 있었다. 물속에 둥글게 서서 공놀이를 하고 있었으며, 이후에는 능숙하게 수영도 하고 다이빙도 하며 재미있게 놀았다. 이들은 점심시간 때쯤 물고기를 잡기 시작했는데, 먹기 위해 물고기를 잡으려는 것인 듯 정말 열심히, 그리고 많이 잡았다.
10. ‘나 수영 좀 배웠어요’ 그룹.
‘주민 수영교실’이나 ‘스포츠센터 수영반’같은 곳을 열심히 다니시다가, 계곡에 와서 실력을 뽐내실 생각인 듯 보이는 그룹도 있었다. 킥판이라고 불리는 부력판을 들고 와서 수영을 하시는 분도 있었고, 모든 영법에 통달했다는 듯 연속동작으로 헤엄치며 계곡을 돌고 있는 분도 계셨다.
70대로 보이는 한 할머니께서 자유자재로 헤엄치시는 걸 보며 난 좀 깜짝 놀랐다. 손자손녀들도 수영을 못하는 듯 튜브를 타고 있었는데, 할머니께서는 물안경만 하나 끼신 채 잠수부터 배영까지 모든 영법을 보여주셨다. 그러다 중간에 물안경에 습기가 찼는지 물안경을 벗어 그 안에 혀를 넣고 돌리셨는데,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 더럽다기보다는 어떤 장인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백발의 수달’처럼 보여 난 그 할머니께 ‘백달’이란 별명을 붙여드렸다.
보통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계곡 물놀이’를 하며 즐겁게 지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위의 사람들은 그것과 조금 다른 특징이 있어서 관찰하게 된 것이라는 걸 밝힌다.
“무한님은 어떤 그룹에 속하시나요?”
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는데, 나야말로 그곳 사람들이 좀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는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짭프로’라는 이름이 붙은 액션캠을 산 까닭에
이렇게 간디가 수영하는 모습을 찍어주고 있었고, 이후에는 잠수팩에 DSLR을 담아
이렇게 물속 생물들 사진 촬영을 했다. 스노클 빨대를 입에 문 채 열심히 수중촬영을 하고 있던 사람이 바로 나였다.
계곡에 다녀왔다면서 왜 계곡 설명은 별로 없냐고 하실 수 있는데, 그건 다음 포스트에다 자세히 적도록 하겠다. 폭염주의보 내렸다던데, 다들 더위 조심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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