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민씨, 저는 작법서를 좀 읽었는데, 그래서인지 소설을 보게 되면 자꾸 소설을 즐기지는 않고 작가가 지금 꺼낸 이야기를 나중에 어떻게 활용하려고 꺼낸 것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방금 등장한 소품이 나중에 또 나올 것이라는 것도 예측이 가능하기에, 대략 어느 방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갈 지도 금방 파악이 됩니다.
이러한 습관은, 드라마를 볼 때에도 드러납니다. 그래서 전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 대사 잘 알아맞히는 사람.
으로 통하기도 합니다. 잠시 후 누가 찾아올 거라든지, 저 사람이 배신하는 장면이 등장할 거라든지 등을 맞히기도 합니다.
주변에선 이런 걸 신기해하지만, 이게 결코 좋은 건 아닙니다. 다음 이야기를 손꼽아 기다릴 정도로 푹 빠져서 즐기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우와, 저 주인공은 어떻게 저럴 수 있냐.”하며 드라마를 만끽하고 싶은데, 드라마를 보면서도 머릿속으론 제가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관계로 그게 힘듭니다.
1. 상담가의 연애.
제가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를 보며 하고 있는 저런 행동을, 승민씨는 연애를 하며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승민씨는 상담일을 오래 하셨다고 했는데, 그래서인지 연애 중 여자친구를 내담자처럼 여겼습니다.
여친이 자신의 감정을 승민씨께 털어 놓을 때에도, 승민씨는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그리고 전에 어떤 사람들과 만났기에... 여자로써 자존감이 없는 저런 말을 하게 되었을까, 라는 걱정. 그리고 자신을 지키지 않고 남에게 맞추려는 느낌이 많이 들었네요. 그때 좀 아 좀 상처가 많은 아이고 내가 좀 더 다가가고 배려와 이해가 필요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구요.”
라는 생각을 하기 바쁘지 않았습니까? 여친은 ‘남자친구’인 승민씨에게 말한 건데, 승민씨는 ‘상담가’의 입장에서 여자친구의 말을 받았던 겁니다.
이별 직전 여자친구가 화를 낸 것에 대해서도, 승민씨는 제게
“그말 듣고 참 가슴이 아프더라구요. 도대체 어떤 일을 당했기에 자기를 버리면서까지 그런 생각을 하는지..”
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역시나 그 자리엔 ‘남자친구’가 없습니다. 멀리 떨어져서는 상대를 관찰하고 분석하는 승민씨가 있을 뿐입니다.
이런 식이라면, 상대는 남자친구와 연애를 한 게 아니라 상담가의 현미경 위에 올려진 채 관찰대상으로 있어야 했던 것일 텐데, 그러는 동안 얼마나 외롭고 답답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남자친구라는 사람은, 여친이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의 원인을 그녀의 가정환경이나 과거 연애가 남긴 상처 같은 것에서만 찾고 있으니 말입니다.
승민씨가 작성해 제게 보낸 사연신청서는, 이별을 한 남자가 보낸 연애사연이 아닌, ‘한 사람을 두 달간 관찰한 뒤 쓴 보고서’같습니다. 사연의 8할은 상대의 잘못에 대한 분석과 원인 찾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건 상대가 이상한 사람이며 상대만 잘못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라, 승민씨가 그 연애에 참여는 하지 않은 채 관찰만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승민씨는 제게 동의와 공감을 구하는 식의 이야기도 하셨는데, 그것에 대해선 아래에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2. 근자감과 공명심.
제가 승민씨의 사연신청서를 읽다가 계속 턱턱 걸렸던 부분은,
- 도움을 주려 했는데.
- 사랑을 주려 했는데.
- 제가 상담적인 부분을 통해서 이해시켜 나아지는가 싶더니.
라는 부분입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분이시길래, 자신이 상대에게 큰 사랑과 도움을 베풀고 있다고 여기며, 나아가 상대를 개조까지 시키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가장 놀란 부분은
“주위 사람들이 못하는 게 아니라, 저와 무한님 같은 사람이 특이한 거라고.”
인데, 무엇을 근거로 저를 승민씨와 같은 사람의 부류일 거라 생각하며 특이하다고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의 고민을 듣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누군가의 고민을 듣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건, 오지랖과 인내심 정도만 있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또, 그런 시간을 가졌다고 해서 이쪽이 상대에게 엄청나게 큰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니며, 상대가 이후 거듭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채 살아가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의 하소연을 수 만 번 들어줬다고 해도, 사실 그건 불이 없어서 담배를 못 피우고 있을 때 라이터 한 번 빌려준 것과 다를 바 없을 수도 있는 건데, 왜 이걸 가지고 혼자 자신이 보통의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거라 생각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전 상담이라는 게, 누군가가 너무 벽 가까이에서 액자를 걸며 수평을 못 맞춰 곤란해 하고 있을 때, 뒤에서 바라보며 어느 정도 되면 수평이 되겠다고 말해주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뒤에서 보면 당연히 수평인지 아닌지가 보이니까 말해줄 수 있는 거지, 벽에 액자를 걸고 있는 사람보다 월등히 뛰어나다거나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라 그게 가능한 게 아닙니다. 반대로 이쪽에서 가까이 벽에 붙은 채 액자를 걸게 되면, 이쪽 역시 헤매게 될 수 있는 거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걸 가지고 공명심을 드러내려 하는 건, 자동차 커뮤니티에서 하이패스 공구의 총대를 멘 뒤
‘내가 아니었으면 너희들은 하이패스도 못 단 차를 몰고 다녔을 거야. 내가 너희들을 구원한 거라고 할 수 있지. 다들 이런 나의 희생과 노력과 열정을 빨리 알아볼 수 있도록. 내가 이렇게까지 봉사하는데 입금 늦게 하는 사람 있으면 아이디 공개해서 아주 망신을 주겠어.’
라는 마음을 먹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남들은 저 사람이 공구하는 하이패스가 정말 너무나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냥 시중가보다 몇 만원 싸게 구해준다니까 공구 신청을 했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거 무서운 겁니다. 어느 커뮤니티를 보면, 자신이 코스트코 연회원에 가입해 있으니 회원권 없는 사람들의 부탁을 받아 물건을 사다 준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코스트코 구매대행’을 가지고 공명심을 가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코스트코 연회원 자부심 쩌네. 웃기지도 않아.’라고 생각하는데, 그 사람 혼자 정말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저는 더욱 무섭습니다.
짧게 쓰려고 했던 글이 점점 길어지는 것 같은데, 여하튼 승민씨가
“노멀로그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있습니다. 너무 잘 알고, 내가 원하는 걸 알고 배려해주고 이해해주고 캐치해준다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리고 싶고. 그걸 아는 사람은 이성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아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리고 싶네요. 또한 주위 사람들이 못 하는 게 아니라 저와 무한님 같은 사람이 특이한 거라고. 그리고 이걸 역이용하는 나쁜 사람들 또한 있고, 하지만 좋은 사람도 있기에 자신에 대한 가능성을 자극적인 걸로 인해 편협하게 바라보지 말고 가능성을 좁히는 일은 없길 바란다고 전해드리고 싶네요.”
라고 하신 걸, 몇 년 지나 다시 읽어보시면, 분명 자려고 누웠다가도 부끄러움을 참지 못해 이불에 하이킥을 날리게 될 수 있다는 얘기를 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부탁인데, 저는 매일 사연과 댓글을 통해 배우고, 또 현실에서의 경험과 지적을 통해 교정되고 있는 태음인일 뿐이니(응?), 저도 승민씨와 같을 거라고 여기진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전 오늘 저녁 귀뚜라미 소리를 녹음하려 휴대용 콘덴서 마이크를 구입한, 아주 평범한 사람일 뿐입니다. 오죽하면 블로그 이름이 ‘NORMAL’ 로그겠습니까.
3. 그 외의 이야기들.
승민씨가 만약 제 아는 동생이었다면, 저는 승민씨에게
“너 말고 다른 사람들은 다 바보인 것 같지? 그치? 그거 네가 아파트 15층에서 아래 내려다보듯 구경하고 있으니까 그래 보이는 거지, 거기서 내려와 1층에 발 디디면 너도 똑같아. 넌 더 바보 같을 수도 있어. 왠 줄 알아? 너 나한테 신청서 보낼 때 카톡대화 첨부한다고 신청서에 써놓곤 누락했어. 넌 자신이 완벽하다고 착각하는데, 사실 메일 하나도 제대로 못 보내잖아.”
라는 이야기를 했을 겁니다. 실제로 승민씨는 사연신청서에 ‘카톡대화를 참고해 주세요’라고 적으시곤 메일에 카톡대화 첨부를 안 하셨고, 자신이 그간 타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줘왔다고 하시면서 자신의 일에서는 곤란을 겪으셨으니 말입니다.
전 헤밍웨이가 입으로 총구를 문 채 방아쇠를 당긴 것에, 그를 지독하게 추적하며 사생활을 캐내려 한 평론가들의 책임도 있다고 봅니다. 당시 평론가들은 유명 작가의 사생활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작가의 사생활을 캐서 그의 작품과 연관 지어 말하는 일에 열을 올렸는데, 헤밍웨이는 거의 울다시피 부탁을 하며 그런 짓을 제발 그만해 달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짓이 계속 되자 필연적으로 다음 작품을 쓰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 되었고 말입니다.
승민씨가 여자친구에게 한 행동도 다시 한 번 돌아보시길 권합니다.
“제 소견으로는 (여자친구가)가정환경에서 온 억누름을 표출 하지 못하고 진정한 나를 위한 삶이 아닌, 타인을 위한 삶을 살다가 그게 자신의 모습이 되어버린거 같습니다. 그러다가 그 부분을 숨겨두고 있었는데, 그걸 제가 발견하고 꺼내려하니 아프고 부끄러운 모습에 오히려 더 화를 내고 지키려는 듯한..”
소견이라니요. 그리고 저건, 고문입니다. 둘 사이에 발생한 문제를 두고 여자친구가 이야기를 해도 승민씨는 그녀가 그런 얘기를 꺼낸 이유를 그녀의 과거에서나 찾으려 하고 있으니, 그녀로서는 미치고 팔짝 뛰게 되는 게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녀는 표현이 서투른 까닭에 이걸 두고 ‘승민씨가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라고만 표현했는데, 사실 그녀가 하고 싶었던 말은 왜 자신이 하는 얘기를 제대로 듣진 않고 그걸로 진단을 하려 드냐는 뜻일 겁니다.
아주 진부한 말입니다만, 남에게 손가락질을 할 때 나머지 손가락은 자신을 가리킨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승민씨께서 노멀로그 독자 분들에게 충고 겸 조언이라며 해주신,
“편협하게 바라보지 말고 가능성을 좁히는 일은 없길 바란다.”
라는 말은, 그냥 승민씨께서 도로 가져가시는 게 가장 나을 것 같습니다. 노멀로그 독자분 중 8할 이상은 그냥 오랜 기간 제 글을 읽은 애정으로, 그리고 가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 제 재롱을 보러 오시는 거지, 심각한 결함을 가진 환자들이 절대 아니니 말입니다.
승민씨는
“제 사연이 단 한 사람에게라도 도움이 된다면 전 그걸로 만족할 것 같습니다.”
라고 하셨는데, 승민씨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게 제 바람이고, 또 제가 미흡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더러도 저 한 사람은 도움을 받았으니 만족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승민씨의 사연을 읽으며 저는 어제부터 많은 고민을 했는데, 제가 혹시 승민씨처럼 말하거나 행동하고 있진 않았는지 정말 여러 번 돌아보는 귀중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여자친구에 대해서는 가정환경과 이전의 연애까지를 모두 파헤쳐 진단을 하려 했으면서, 정작 승민씨는
“핸드폰은 제 사생활이라서 절대 보여주지는 않았습니다.”
라고 말하는 거, 정말 말도 안 되는 겁니다. 전 승민씨가 다음 번 연애에서는, 상대와 동등한 위치에서 남자친구의 역할을 하실 수 있었으면 합니다. 남자친구로서 여자친구에게 할 수 있는 건 ‘기대’까지입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요구’, ‘지적’, ‘개조’를 시작하면, 그 끝엔 ‘내 구미에 맞도록 완성된 여친’이 아닌 ‘여친과의 이별’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걸 잊지 마셨으면 합니다.
▼ 공감과 추천, 댓글은 제게 엄청난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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