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때에는 다 고만고만하게 지내다가, 취업의 문턱에 들어서며
- A는 대기업 입사.
- B는 공기업 입사.
- C는 아빠회사 취직.
- 나는? 중견기업 서류전형 탈락. 나 어떡하지?
라는 상황에 처하면 정신이 번쩍 들 수 있다. 친구나 동기들과 비슷비슷하게 취직해서 돈 벌고 결혼도 하고 그렇게 사는 건 줄 알았는데, 채용하겠다는 곳이 없으면 이대로 세 달이고 여섯 달이고 계속 취준생으로 지내야 할지도 모르는 불안감이 찾아오는 것이다.
저 상황에 놓인 사람에게
“너무 조급해 하지 마. 요즘 취업준비 기간이 평균 1년이 넘는대.”
라며 위로를 하는 건, 위로를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큰 힘이 될 거라 생각하겠지만, 받는 입장에서는 사실 별로 와 닿지가 않는다. ‘진짜 이제 어떡하지?’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꽉 차, 다른 고민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전공을 버리고 무슨 시험이라도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닌가, 다음 달에 지원할 곳에서도 떨어지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에 잔뜩 겁만 먹게 될 수 있다.
1. 난 이렇게 불안한데, 넌….
한규네 부모님이 남해에서 펜션을 하시는데, 요즘 비수기라 공짜로 방을 대여해 줄 테니 와서 놀라고 하셨다. 이 사실을 친구나 지인에게 이야기하며 함께 가자는 얘기를 하는 건 분명 ‘좋은 소식’이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듣게 될 사람이, 카쉐어링을 이용하다 방금 접촉사고를 내 이제 어떻게 처리해야하는지 정신이 없는 상황이라고 해보자. 그럼 그에게 ‘공짜 펜션에 놀러가자’는 제안은, 당장 지금 펜션이 문제가 아니니, 누가 고기를 준비하고 누구 차 타고 갈 거라는 건 귀에도 안 들어오는 말 아닐까?
연애 얘기로 돌아와 보자. 남자는 주변 친구들 다 취업하는데 자신만 취업이 안 되어 고민하는 중이다. 친한 친구 몇과 함께 지원한 곳에서도 자신만 떨어졌다. 때문에 자연히 위기에 빠졌다는 생각이 들며, 부모님과 대화를 해봐도 당장 이렇다 할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에 당황한다.
여자는 29박 30일짜리, 해외여행 중이다. 오늘 방문한 곳에서 본 예쁜 풍경을 찍어 남친에게 카톡을 보낸다. 남자는 풍경이 예쁘다고 대답해 준다. 그러자 여자가 ‘풍경만? 나는 안 예뻐? ㅎㅎ’라며 농담을 한다. 이것만 두고 보면 별 문제 없는 커플들의 대화 같지만, 남자는 자신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이제 이런 것까지가 부담스러우며, 이 관계를 정리해야 자신이 좀 더 집중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딱 저 일 하나 때문에 남자가 마음을 닫은 건 아니다. 그 이전에, 두 사람은 다른 상황에 놓인 채로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러다보니 연애에 집중하길 바라는 여자의 바람은 남자에게 부담으로, 지금은 연애보다 취업에 더 집중하려는 남자의 태도는 여자에게 무관심으로 느껴지고 말았다.
이런 일은 남녀가 바뀐 채로도 흔하게 일어난다. 난 반대의 상황에 놓인 한 여성대원이 했던,
“일보다 자신을 먼저 생각하라는, 남친의 징징거림을 다 받아주고 있다 보면 저까지 잘못될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게 더 중요한 걸 택하기로 했고, 짐이 되는 남친을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라는 말이 기억난다. 사연의 주인공인 H양의 경우, H양의 남친이 저런 마음으로 연애를 정리하려 한 것이라 생각하면 될 것 같다.
2. 숨 쉴 구멍은 열어 줬어야 하는데….
이쪽에서 생각하기에 99.9% 상대가 잘못한 거라고 해도, 그게 두 사람 관계의 기반을 부술 정도로 잘못한 게 아니라면, 최소한 숨 쉴 틈은 열어줘야 한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 놓였을 때, H양은 그러지 못했다. 대화를 보자.
H양 – 연락 엄청 안 되시네요. SNS는 하시면서.
남친 – 나 SNS 안 했어.
H양 – 접속 기록 뜨던데. 암튼 즐거운 시간 보내.
남친 – 오늘은 뭐해?
H양 – 안 궁금하잖아. 하루 종일 뭐 했어?
(중략)
H양 – 착잡한 사람한테 화내기도 그렇고…. 쉬어.
남친 – 쉬자.
다른 대화도 하나 더 보자.
H양 – 연락 안 하니. 넘 하시네요.
남친 – 미안해. ㅠㅠ 내가 자기 생각 안 한 거 아닌데, 넋이 나갔나봐. 정말 미안해.
H양 – 짜증나.
남친 – 진짜 미안. ㅠㅠ 진심을 다해 사과한다 진짜.
H양 – 자기는 할 거 다 하고 맨 나중이 나잖아.
남친 – 밥 맛있게 먹어.
H양 – 그게 다야?
남친 – 아니, 미안해 ㅠㅠ 화 풀어줘.
H양 – 싫어.
남친 – 왜 자기 ㅠㅠ
H양 – 지겨워.
(중략)
남친 – 미안해. 자기한테 먼저 연락할게. ㅠㅠ
H양 – 이미 늦었어. 그래도 난 너는 그런 사람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바쁘고 할 일 많다고 연락 미루고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고.
짜증이 난 상황에서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들이지만, 입장을 바꿔 저런 이야기를 하는 상대와 마주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이쪽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든 결국은 화풀이의 대상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것이고, 더불어 ‘짜증난다, 지겹다’라고 말하는 상대에게 이쪽은 채무자가 된 듯 눈치 보고 사과하며 지내야 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들 것이다.
“그런 일이 없도록 애초에 잘 하면 되는 거잖아요. 화 낼 일을 안 만들면 되잖아요.”
그렇게 말하면 뭐, 나도 할 말이 없긴 한다. 다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수를 하거나 딴 데 정신이 팔릴 수 있는 건데,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한다는 ‘연인’이, 당장이라도 죽일 듯이 쪼아버리면 필연적으로 그 연애는 피곤하게 느껴지고 만다. 아홉 번 잘했을 땐 그러려니 넘어가고 한 번 못한 걸 가지고 멱살을 잡으면, 차라리 헤어지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다고 여겨지거나 이 연애에서 해방되면 얼마나 편할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무슨 얘기를 꺼내든 결론은 네 잘못’이라는 분위기가 계속 되었을 때, H양의 남친이 뭐라고 했나 보자.
“내가 이 상태에서 뭘 어떻게 잘못했다고 더 말해봐야(사과해봐야), 자기 화만 더 돋울 것 같아.”
저런 말로 겨우 휴전을 한 뒤 서로 복구의 시간을 가지는 게 반복되는 동안, 남친은 이 연애에 대한 한계를 느끼며 서서히 마음을 접었던 것 같다.
3. 오래 걸려도 좋아요.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남친이 H양보다 연상임에도 불구하고, 이 연애에선 H양이 리드를 했던 것 같다. 사연을 읽는 내내 H양이 그를 정서적으로 보살펴왔던 것 같은 느낌이 강했다. 때문에 헤어지자는 그를 잡으려 할 때에도, H양은
“잠시 우리가 떨어져 있었지만, 이제는 내가 옆에 있으니 옆에서 힘을 주겠다, 용기를 주겠다, 자신감을 주겠다.”
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 전에 남친이 헤어지자는 말을 꺼냈을 때에는,
“아 그렇구나. 그런데 그걸 꼭 지금 말해야 했어?(중략)그리고 그렇게 돌려 말하지 말고, 끝내고 싶으면 끝내고 싶다, 아니면 내가 노력하고 좀 시간을 갖자인지 알고 싶어.”
라고 반응했고 말이다.
이렇듯 H양은 상대를 혼내고 상대는 H양의 눈치를 보는, 이런 관계로 둘은 이미 오랜 시간을 지내온 것 같다. 그러는 동안 H양은 점점 더 까칠해졌고, 남친은 점점 더 낮은 자세로 맹목적인 사과만 해야 하는 것에 지치게 되었다.
H양의 이 ‘논리정연하지만 아무래도 좀 독단적인’모습은, H양이 작성한 사연신청서에도 잘 나타난다. 신청서에 있는 A항목 B항목 등에 대한 판단은 이미 H양이 결론을 지어 놨으며,
“잡을 만큼 잡았다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아쉬움이 남습니다.”
“마지막 기억이 처절하게 잡는 여친이 되고 싶지는 않아서, 거기서 보냈습니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다른 방법으로 잡아보고 싶습니다.”
등의 문장에서는 자신의 감정까지도 이성적으로 단속하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H양은
“저는 남자친구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기다릴 자신이 있습니다. 오래 걸려도 좋습니다.”
라고 말했는데, 두 사람이 헤어진 표면적인 이유는 ‘남친의 불안정한 상황’이지만, 그 근본에는 위에서 이야기 한 문제들이 있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H양은 기분 좋을 땐 상대에게 힘도 주고, 용기도 주고, 자신감도 줬을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을 땐 상대에 대해 가장 잘 알기에 그가 꼼짝도 못할 정도로 압박했다.
지금도 상대에 대해 가장 알 안다고 생각하는 H양은, 그가 이별을 말하게 된 것에 대한 몇 가지 가설을 세워두었고, 또 마지막 만남에서 그가 이별을 원한다는 확실한 대답을 듣기는 했지만 고민하는 게 느껴졌기에 아직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H양이 기대한 대답을 줄 수 없어 미안한데, 난 이 관계엔 재회의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상대가 아직 전화 차단을 안 했든 SNS의 게시물을 안 지웠든 뭐든, 그는 단호하고 확실하게 여러 차례 자신의 생각과 결정을 H양에게 전했다. H양도 그걸 여러 번 들었으며 반복적으로 확인했는데, 그러고 난 이후에까지 이 관계를 H양의 예상과 짐작으로만 판단하진 않았으면 한다. 그 ‘예상과 짐작’이라는 색안경을 벗어야, 상대를, 그리고 이 관계를 그 자체로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H양의 신청서에는
“진지하게 ~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이야기 한 적 있습니다.”
“~에 대해선 항상 진지하게 이야기 했습니다.”
라는 문장이 중복해서 등장한 부분이 있는데, 그게 혹시 H양이 원하는 걸 상대에게 제시해 (상대는 거부하기 힘든) 동의를 받은 건 아닌지도 한 번 돌아봤으면 한다. H양이 하는 말들을 들어보면, 아직 이십대 중반인 두 사람에게 서른, 마흔까지의 계획이 잡혀있는 것 같다. 그게 나쁜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난 그게 H양의 희망사항을 상대에게 관철시킨 것이지, 상대도 절반의 지분을 가지고 자신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한 건 아닌 것 같다.
난 H양에게, 너무 이성적이지 않아도, 너무 논리적이지 않아도, 너무 어른스럽지 않아도 괜찮다는 얘기를 좀 해주고 싶다. 난 정말 네가 너무나 좋기에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중요한 거지, 주례 없는 미니 웨딩과 축의금 안 받는 결혼식이 중요한 게 아니다. 나 혼자 주인공 역할을 다 하려 들면 상대는 조연이나 들러리가 될 수 있으니, 이번 이별에서부터는 H양만 주인공이 되려 하는 모습을 내려놓고,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결정을 존중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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