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파혼을 생각하며 해야 하는지 말아야하는지를 물을 땐, 이후 ‘탓’을 당하지 않으려면 파혼을 권하는 게 좋다. 어쨌든 결혼해서 살게 되면 이것 말고도 다른 여러 가지 문제로 부딪히게 될 수 있는데, 만약 이쪽이 파혼을 반대해 결혼했다면 훗날 그 ‘탓’을 고스란히 받게 될 수 있다. ‘결혼하지 말라고 할 때 하지 말 걸’ 하고 후회하는 사람은 많아도, ‘그때 그 말 듣고 헤어지는 게 아니었는데’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든 법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나 역시 훗날 ‘탓’을 당하지 않으려면, 지금 지나씨에게 파혼을 권해야 한다. 예비신랑인 지나씨 남친에게 내가 커피 한 잔 얻어 마신 적도 없는데 괜히 그를 변호해줄 필요 없고, 훗날 그가 막 살기로 결정한 후 선을 넘기 시작할 수 있는 걸 내가 지금 ‘그럴 가능성은 적을 것’이라고 보장할 필요도 없는 것이니 말이다.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본 당사자인 지나씨가 그를 신뢰하지 못하겠다는데, 내가 여기서 “에헤이, 그러지 말고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라며 말리는 건 잘 되어봐야 술이 석 잔, 안 되면 뺨이 세 대인 일일 것이다. 아니, 사실 술 석 잔을 얻어 마셔 본 일도 없다. 문제 다 해결되고 난 뒤 아이템 얻으려고 카톡 게임초대나 안 보내면 다행이지.
여하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씨가 ‘결혼 며칠 안 남은 노멀로그 애독자’라고 자신을 소개해주셨기에, 뺨 세 대를 각오하고 매뉴얼을 시작해 볼까 한다. 출발해 보자.
1. 예비신랑이 댄 핑계에 대한 이야기.
지나씨의 남친은
“이건 뉴스에도 나왔던, 모 야구선수가 사용했던 어플이라고 해서 깔아본 거다. 정말 단순한 호기심에 깔아본 거지, 이걸로 누구랑 대화를 하거나 이후 접속한 적 없다. 한 번 깔아본 뒤에 신경도 안 썼기에 지우지 않았던 거지, 절대 계속 사용했던 게 아니다.”
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난 그의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사연은 읽곤 그 어플이 궁금해져 깔아봤는데, 아무래도 그 어플은 외국에 최적화 되어 있는 것 같으며 원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만약 정말 지나씨의 남친이 ‘데이팅’을 목적으로 했다면, 보다 쉽고 한국인들도 많으며 별 제약이 없는 어플들을 설치했을 것이다.
“단순 호기심이었다면 받아서 들여다 본 뒤 지웠겠죠. 일단 여자친구가 있는 상태에선 그런 어플을 사용하지 않는 게 기본 아닌가요? 그에게 그 앱의 어느 매력적인 여자가 말을 걸어왔더라면, 대화가 이어졌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바람을 피울 준비단계였다는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듭니다.”
지나씨 말이 백 번 맞지만, 그러니까 이게 참 상대가 원인제공을 했으니 이제 어떤 형태로 가정하든 남친이 대역죄인이 되는 방식으로만 생각해버리면, 남친으로서는 뭘 더 어떻게 해줄 수 없으며 지나씨 역시 실수를 하는 모든 사람과의 관계를 끊는 것을 택하게 될 것이다.
그 어플이 어떤 어플인가를 떠나, 난 만약 지나씨 남친이 둘의 관계에 소홀한 모습을 보였다거나 지금까지의 태도가 부정적인 미래를 가리키고 있다면, 어플을 깔았든 안 깔았든 헤어지길 권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나씨의 남친은 저 ‘어플 설치’를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둘의 관계를 충실히 돌봐왔고, 지금도 어떻게든 해명하며 지나씨가 요구하는 걸 다 들어줄 기세로 사과하는 중이다. 이런 모습을 보며, 난 현 상황쯤이면 ‘해프닝’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왜 전 우리가 특별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우리의 결혼에 큰 흠이 생긴 것 같았고 저도 그냥 남들 다 찍는 통속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습니다. 이대로 파혼을 진행하면 제 취향으로 고른 집과 가구들은 고스란히 저와 상관없는 것이 되겠죠. 유독 남자친구를 아끼고 좋아하는 제 어머니는? 제 파혼은 친척들과 친구들의 입에 오르내리겠죠. 무엇보다 제 짧은 인생에 가장 큰 굴곡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두렵습니다.”
특별하지 않다고 해서 쓸모없는 것 아니며(특별한 연애라는 것도 사실 연애에 대한 환상의 일부이며), 상대가 실수를 했다고 해서 무조건 둘의 관계가 못 쓰게 되는 건 아니다. 전에 지나씨가 남친의 행동을 오해해 그에게 따지고 상처를 주었을 때, 그는 끝까지 설명하고 그게 아님을 증명하지 않았는가. 그는 지나씨의 그런 태도를 한계로 여기며 ‘얘랑은 더 만나도 계속 이럴 거야’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억울했을 것임이 분명함에도 차분히 지나씨가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할 수 있는 걸 다 했다.
지나씨가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인
- 결혼 후 배우자의 부정을 확인하게 되는 것.
과 직결된 문제라 큰 충격과 공포에 빠진 건 나도 충분히 이해하지만, 여기서 정말 객관적으로 봐도 남친이 별 생각 없이 설치했다가 신경을 끄고 있어 몰랐을 가능성이 높으니, 그간 남친이 보인 성실함과 다정함과 애정을 생각해서라도 이걸 남친의 한계로 여기진 않았으면 한다.
2. 용서하고 만난다고 해도, 계속 생각나지 않을까요?
자라 보고 놀라면 당연히 솥뚜껑 보고도 놀라게 된다. 때문에 남친이 폰만 집어 들어도 지나씨는 매의 눈으로 남친이 뭘 하려는 건지 보려 할 수 있는데, 이건 남친이 그간 지나씨를 안심시키고자 몇 번이나 보여줬고, 또 이런 일이 있고 난 후라면 남친 역시 오이 밭에서 신발끈 안 맬 것 같으니 크게 걱정되진 않는다.
내가 걱정되는 건, 오히려 남친의 ‘무분별한 다정함’이다. 그는 회사 여자 동료들에게 커피를 사주거나 그 중 몇 사람과는 친구처럼 연락하기도 하는데, 이건 지나씨가 그에게 지나씨의 심정을 토로해서 자제해주길 부탁해야 할 것 같다.
지금처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만 보다가 어느 날 폰 검사를 해 ‘걸리기만 해봐라’하지 말고, 그게 지나씨에게는 어떻게 느껴지는지, 만약 다른 남자가 아내 이외의 여자들과 그렇게 지낸다는 걸 듣는다면 남친은 어떻게 생각할지, 반대로 지나씨가 다른 남자들과 그렇게 밥도 마시고 차도 마시고 연락도 하는 걸 아무렇지 않게 한다면 남친 기분은 어떨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길 권한다.
준비성이 철저하고 다정하며 사람들을 잘 챙기는 건 분명 장점이지만, 그게 애먼 대상에게까지 그래버리면 ‘흘리고 다니는 것’이나 ‘여지를 남기는 것’, 나아가 ‘끼 부리는 것’이 될 수 있다. 밖에서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 듣고자 안에다 해야 할 헌신을 밖에서 하면, 그 둘은 같은 동력으로 유지되는 것이기에 자연히 소홀해질 수 있는 것 아닌가.
보통 다정하며 남들에게 좋은 평가를 듣고 싶은 사람들이 그런 모습을 보인다. 그런 사람들은 훗날 결혼해서도 집에 들어온 선물을 남에게 못 줘서 안달이 나거나, 자기 가족 먹을 것도 남에게 못 퍼줘 걱정인 경우가 많다. 밖에서 기분 내며 다른 사람들에게 술 사곤 집에 와서 돈 없다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여하튼 지나씨 남친에겐 이러한 선이 좀 불분명한 것 같으니, ‘가족이 먼저’라는 걸 좀 더 말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남친의 성실도는 높은 편입니다. 늘 데리러 오고 데려다 줍니다. 연락 잘 되고, 대화도 많이 합니다.”
그걸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남친의 외적 충성’에 대한 부분만 단속하려 하진 말고, 자연스레 남친이 ‘우리’에게 더 신경을 쓰도록 유도하는 게 좋다. 이 얘기는 길어질 것 같으니 아래에서 이어서 하자.
3. 지나씨와 남친에게 필요한 것은?
만약 지나씨가 내 여동생이었다면, 난 지나씨에게
“너희는 결혼이 끝이잖아.”
라는 이야기를 해줬을 것 같다. 결혼한다고 모든 것이 보장되며 앞으로의 일들이 저절로 해결되는 게 아닌데, 두 사람은 이제 결혼만 하면 힘든 일이나 걱정할 일들이 다 지나가는 거라 여기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만약
“3년 후에는 둘이 뭐 할 거예요? 5년 후에는?”
이라고 물으면, 지나씨는
“그냥 뭐, 부부로 살고 있겠죠.”
라고 대답할 것 같다.
결혼을 결심하기까지의 확신을 상대가 줬다고 해서, 또는 결혼까지 진행하는 걸 보니 정말 이제 평생 나와 함께하기로 약속한 거라고 해서 마음을 놓아도 되고, 아무 긴장 하지 않아도 되며, 연애할 때 ‘혹시 이렇게 사귀다가도 헤어지게 되는 것 아닌가?’하는 불안까지를 전부 내려놓아도 되는 거라면, 난 이런 매뉴얼을 쓰고 있을 게 아니라 나가서 커플부대에 입대한 사람들에게 빨리 혼인신고부터 하라는 얘기를 할 것 같다. 결혼이 그 관계에 대한 모든 고민을 해결해 주는 거라면 말이다.
지나씨와 남친의 연애는 서로에 대한 확신을 가진 채 결혼까지를 약속했기에 분명 안정되어 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정체되어 있다. 결혼은 종착지가 아닌데, 둘 다 이제 그냥 이 정도로만 쭉 계속 가면 문제없을 거라 생각하며 페달질을 멈춘 것 같다. 페달을 굴리지 않아도 그대로 쭉 갈 수 있는 길은 내리막뿐인데 말이다.
“저는 늘 쉽게 사랑에 빠졌지만, 상처받기가 누구보다 두려웠습니다. 버려지느니 버리는 연애가 낫다고 생각하며 지냈습니다. 결혼을 하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도 경제적으로 자리를 덜 잡기도 했지만, 연애와 달리 결혼이라는 관계는 뒤돌아 나오기가 어렵다는 점이 무서웠습니다.”
흘러가는 대로 지내며 무엇이 달라지고 어떤 점이 변하는지를 보며 상처 받지 말고, 늘 얘기하지만 ‘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 보자. 그저 즐거움만을 위한 일이라도 좋으니 두 사람이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안 해봤던 것을 같이 해보고, 둘이 계획한 것을 이뤄가 보자. 이게 둘 모두가 '우리'에 집중할 수 있는 방법이며, 지나씨 남친의 '외적 충성'을 줄이게 만드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지나씨가 스스로 뭔가를 잘 하고 남친의 기분도 금방 파악한다는 건 장점이지만, 그건 동시에 지나씨 혼자 다 알아서 해버리고 만다거나, 남친의 기분에 대해서도 멋대로 단정 지을 수 있다는 단점이 될 수 있다. 남친이 좋아할 만한 뭔가를 혼자 생각해 베푸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묻자. 묻고, 대화하고, 함께 결론을 내자.
그러지 않으면, 기대는 언젠가 실망으로 변할 수 있고, 훗날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상황이 벌어져 후회라는 값을 치르며 배우게 될 수 있다. 그냥 지금 여기서 두 사람의 머지않은 신혼생활만 그려보더라도, 공동의 목표가 없기에 지나씨는 남친의 생활을 단속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남친은 그냥 저절로 잘 될 줄 알았던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아 고민하게 될 수 있다.
이번 크리스마스를, 또는 12월 마지막 날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한 계획이라도 좋으니, 두 사람이 이룰 공동의 목표를 만들어 가는 것에 힘쓰길 권한다. 그 목표가 없거나 목표 사이의 공백이 너무 길면, 관계는 권태로워지고 허튼 곳에 마음을 쓰는 일이 생길 수 있으니 말이다.
자, 오늘 준비한 얘기는 여기까지다. 이제 내겐 뺨 세 대를 맞을 일만 남은 건가?(응?) 난 사실 사연을 보낸 지나씨보다, 지나씨 남친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더 많은데, 안타깝게도 지나씨가 사연을 보낸 까닭에 이 정도로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다. 아 맞다, 나도 얼른 어플 지워야지.
창가 근처의 오른손을 비벼야 할 정도가 된 걸 보니, 오늘부터 기대해도 좋을 추위가 시작된 것 같다. 아무도 관심 없겠지만 내가 11월 1일 군번이라 10월 31일만 되면 항상 입대 전날 생각이 나 마음이 아스트랄해지는데, 여하튼 10월의 마지막 하루 다들 잘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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