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때였나, 알고 지내던 여자사람 하나가 자꾸 내게 음악을 권했다. 난 그냥 예의상
“이 사람 노래를 참 독특하게 하네. 일요일 낮 12시쯤 집에서 혼자 이 노래 들으면 뛰어내리고 싶겠는데?”
라고 받아줬을 뿐인데, 그녀는 내가 관심을 가졌다고 생각했는지 자꾸 그 가수의 이야기를 했다. 내가 만약 오디션 심사위원이었다면, 그 가수에게
“노래를 왜 이렇게 슬프게 불러? 너무 슬퍼서 몸서리가 쳐져.”
라는 이야기를 했을 텐데 말이다.
어느 날은 그녀가, 자신이 좋아하는 또 다른 가수의 내한공연이 있다며 같이 가자고도 했다. 역시나 내 취향과는 거리가 먼 음악을 하는 가수였다. 난 예의바르게 ‘사람 많은 곳에 가면 과민성 대장염 증세가 나타난다. 콘서트장에 기저귀를 차고 갈 순 없지 않느냐’며 거절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그녀는, 계속 다른 가수들의 앨범을 가지고 와 들어보라고 권했다. CD를 빌려주기도 했는데, 난 빌려준다고 하니 일단 받기는 했지만, 사실 그 CD를 가져갔다 가방에서 꺼내지도 않은 채 며칠 뒤 다시 돌려주기도 했다.
위와 같은 일이, K양과 K양 남친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다. K양의 남친이 내 지인과 비슷하고, K양은 나와 비슷하다. 지인과 나의 관계야 아는 사이로 지내던 중 ‘취향’이 달라 발생한 것이라 크게 문제될 건 없지만, K양과 K양 남친은 연인임에도 불구하고 취향은 물론 서로가 추구하는 ‘방향’까지 달라 발생한 것이라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K양의 사연을 결론을 내기가 어려우니, 대체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인지까지만 함께 살펴봤으면 한다. 출발해 보자.
1. K양의 방향은 연애, 남친의 방향은 결혼.
K양이 신청서에 적은 이야기들을 종합해 보면,
- 난 더 신나게, 화끈하게, 열정적으로 놀고(사귀고) 싶다.
라고 할 수 있다. 늘 설레고, 즐겁고, 깨가 쏟아지는 연애를 하고 싶어 하는 건데, 반면 남친은 이제 보다 현실적이 되어 참고, 생략하고, 상황에 따라 포기도 해가면서 하는 연애를 하려고 한다.
이래버리니 K양 남친 입장에서는 K양이 아직 철없어 보이고, K양 입장에서는 남친이 의욕 없는 유약한 남자로 보이고 마는 것이다. 또, 3년쯤 사귀었으니 이제 곧 결혼하게 될 거라 생각하는 남친과 달리, K양은 결혼에 대해
- 식장 들어가기 전까지 모르는 거 아님?
- 결혼해서도 이런 식이면 난 외롭고 심심할 듯.
- 지금 그냥 한 달에 한 번, 아니면 더 적게 봐도 될 것 같은 관계인데, 무슨 결혼?
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건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한 확신과 비전을 가져야 하는 부분이라,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주기가 참 난감한 지점이기도 하다.
만약 K양이 남친에 대해 애정은 가지고 있지만 어떤 부분 때문에 너무 걱정이라고 하면 나도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친에 대한 K양이 태도 자체가
- 그냥 싫어져서 헤어지자고 한 적 있음.
- 대화하거나 만나는 게 귀찮고 짜증남.
- 후줄근하게 입고 나오면 만나는 것도 창피하고 손도 억지로 잡음.
인 까닭에, 나 역시 두 사람이 계속 만나야 하는 이유를 찾기가 어렵다. K양은 남친과의 연애 초반에 대해서도
“저에게 무슨 가르침? 비슷한 이야기를 오빠가 좀 했는데, 생각은 잘 안 나네요.”
라는 이야기를 하던데, 이처럼 상대에 대한 이렇다 할 애정 없이 ‘그냥 일단 사귀고 본 관계’이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이렇게 사귀다가도 서로를 알아가고 서로에게 맞춰갈 수 있었겠지만, K양이
“오빠는 저와의 대화를 시도할 때가 많은데, 저는 솔직히 귀찮아서 알겠다고 하고 요구 같은 게 있으면 그냥 맞춰줘요.”
라는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역시나 ‘그냥 마찰 없이 넘어가는 것’에만 초점을 맞춰 만나온 까닭에 지금까지 조율된 부분도 별로 없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 놓인 채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물으면 난 뭐라고 대답을 해줘야 할까? 어렵다.
2. K양의 문제.
K양은 신청서에
“요즘엔 일과 관련된 사람들을 주로 만납니다. 오히려 그 사람들과 만나서 술 먹는 게 더 편한 것 같아요.”
라고 적었던데, 반면 가까운 사람들과 어떻게 지내는가를 보면
- 부모님과는 종종 부딪히며 고만고만 가끔 밥 먹는(?) 사이.
- 남친 아 싫어 짜증 귀찮아 스트레스.
인 상황인 걸 알 수 있다.
난 K양에게,
“날 잘 모르는 만 명에게 칭찬을 듣는 것보다, 날 잘 아는 사람의 인정이 더 값진 것 아닐까요?”
라는 질문을 하고 싶다. 가까운 사람들과의 자리보다 차라리 먼 사람들과의 자리가 편한 건, 그만큼 후자가 상대적으로 얕고 가벼운 관계인 까닭에 그런 것 아니겠냐는 이야기와 함께 말이다.
또, K양은 보통의 사람들보다 차분한 것, 진지한 것, 무거운 것을 유난히 더 싫어하는 것 같다. 신청서도 정말 짧게, 본인이 귀찮고 스트레스 받는 부분에 대해서만 급하게 작성한 뒤
“제가 지금 무슨 마음인지도 모르겠어요.”
“저 뭔가 문제가 있는 거 맞죠?”
“아무튼 도와주시고 살려주세요.”
라는 뉘앙스로 마무리해서 보냈던데, 난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닌 K양 본인의 이야기이니, 그것보다는 좀 더 집중해야 하지 않나 싶다. 대충 뭉뚱그리거나 자신의 마음도 들여다 볼 여유 없이 급하게 결정짓는 것에만 마음을 쓸 게 아니라 말이다.
‘타 이성과의 문제’를 적는 부분에서도, K양은 남친에 대해
“오빠는 타 이성하고 톡도 하고 그러는 것 같더라고요. 근데 별로 상관 안 해요. 그냥 그런가 보다, 알아서 하겠지 해요. ‘얘 누구야?’정도로 묻고 신경 안 써요.”
라고 적었는데, 이렇게까지 자신의 연애에 집중을 안 하는 사례도 흔치는 않다.
K양에 대한 내 느낌을 말하자면, 전반적으로 마음이 딴 데 가 있는 사람 같다. 어디 가 있는 건지는 K양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K양 남친도 모르는데, 여하튼 그렇다. ‘아 몰라 그냥 빨리빨리빨리 대충’의 느낌이랄까.
“저는 그냥 휴일에 하는 데이트가 ‘쉬는 거다’하고 생각하는데, 오빠가 대화하려고 할 때마다 너무 스트레스 받고 짜증나고 구속받는 것 같고 너무 답답해요.”
그럼 K양의 말대로 계속 그렇게 ‘쉬는 거다’만 할 경우, 대체 두 사람이 현재 무슨 고민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대화는 언제 나눌 수 있는 건지도, 곰곰이 생각해 봤으면 한다.
3. 남친이 현재 고시생이라는 것도 이 관계에는 문제.
안 그래도 K양은 좀 활발하며 생기 넘치는 연애를 추구하는 스타일인데, 이런 와중에 K양 남친이 고시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 역시 이 관계에는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남친이 준비한다는 고시는 어렵기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시인데, 그런 고시를 준비하는 사람이 어찌 2016 F/W 패션에 관심을 쏟겠으며 데이트 코스 계획에 들뜰 수 있겠는가. 때문에 그는 도를 닦는 기분으로 고시를 준비 중이며, K양은 그것에 대해
“데이트 할 때 보면, 오빠는 그냥 마실 나온 아저씨 같아요. 의욕도 없어 보이고, 약해 보이고, 힘도 없는 것 같고….”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며칠 전엔 TV보면서 술 한 잔 했는데, 오빠가 저더러 주량 넘게 마시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제 주량만큼 먹고 몇 잔 더 하겠다 했는데, 오빠는 저더러 눈 풀렸다고 취한 거 같다고…. 저 사실 오빠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피곤해서 눈 풀린 거거든요. 그리고 솔직히 오빠랑 있어도 할 게 없으니까, 그냥 술 한 잔 하면서 TV보는 거였어요.”
K양과 남친은, ‘만나면 만나는 거고, 아니면 말고’의 마음으로 너무 오랫동안 지내온 것 같다. 전에 K양이 이별을 말했을 때, 남친이 잡아서든 K양이 돌아가서든 ‘무기력한 연애’를 타파할 방법에 대해 협의를 하며 재회했어야 하는데, 그걸 안 한 채 그냥 다 덮어두고 일단은 유지하기로 한 것이 이 연애를 이렇게까지 만들게 된 것 같다.
“데이트가 끝나면 저는 버스 타고 집에 오잖아요. 그 순간에 저는 그냥 뭔가 해방된 느낌도 나면서, 오빠랑 만나고 있을 때보다 그 순간이 더 나은 것 같아요.”
난 K양이 남친과 만나느니 차라리 일과 관련된 사람을 만나는 게 더 나을 정도이며, 나아가 남친과의 의무적인 데이트를 끝내고 나면 해방감까지 느껴질 정도라면, 그리고 정말 손톱만큼도 남친에 대한 애정은 남아있지 않고 그저 헤어지려면 남친이 잡아 억지로 사귀고 있는 거라면, 그 연애는 둘 모두를 위해 내려놓는 게 맞지 않나 싶기도 하다.
사연 어디를 보든 K양이 바라는 지점은 ‘이별’인데, 어쩌면 K양은 헤어지고 싶지만 그 결정을 본인이 내리긴 힘들기에 내게 도움을 청한 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만약 정말 그런 거라면, 의무감 말고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이 관계를 정리해도 괜찮다는 대답을 해주고 싶다.
다만, K양이 현재 확실하게 자신의 뜻을 내비치며 이별을 말하지 못하는 것처럼, 연애 중 K양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남친과 상의했어야 하는 순간에도 그러지 못했다는 걸 잊지 말라고 적어두도록 하겠다. K양은 복잡하고, 귀찮고, 대립해야 하는 게 싫어서 그냥 “네네네네.” 했던 거고, 그러다보니 둘의 관계는 점점 더 K양이 바라지 않는 방향으로 흘렀으며, 때문에 K양 역시 그 관계에 더욱 애정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내가 한 자 한 자 눌러 쓴 일기장은 애정이 가득하기에 소중하게 보관하지만, 대충 갈겨 쓴 연습장은 버리든 말든 상관없어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건 좀 뜬금없는 얘기지만,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려고 해도 거기에 의무적으로 쏟아야 하는 시간과 관심은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얘기도 해주고 싶다. 친구네 집 강아지는 그냥 놀러갈 때 쓰다듬어주고 간식이나 주면 되니 귀엽기만 하겠지만, 직접 강아지를 키우면 배변부터 시작해 산책, 접종, 훈련 등 신경 쓸 게 많다.
하지만 그런 시간들이 모여 내 강아지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기도 하며, 그런 일들의 축적이 바로 ‘내 강아지와 나’의 의미가 되기도 한다. 비가 와서 나가기 싫은데 강아지가 나가자고 낑낑대면, 피곤함과 귀찮음을 이겨내고 같이 나가주는 것이 바로 관심과 사랑을 몸소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얘기는 다 했으니, 선택은 K양의 몫으로 남겨두도록 하겠다. 하룻밤만 자면 불금이다. 다들 조금만 더 힘내시길!
▼ 공감과 추천, 댓글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연애매뉴얼(연재중) > 커플생활매뉴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마보이라는 것만 빼면 다른 건 괜찮은 남친, 어쩌죠? (120) | 2016.11.11 |
---|---|
한 달에 겨우 두 번 보고 남친은 진지한 대화를 피해요. (61) | 2016.11.07 |
예비신랑 폰에서 데이팅 어플을 발견했습니다. 파혼해야 할까요? (51) | 2016.10.31 |
과거를 용납할 수 없다며 헤어지자는 남친 외 1편 (53) | 2016.10.26 |
데이트는 단조롭고, 남친은 피곤하다고만 합니다. (68) | 2016.10.2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