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양이 하고 있는 건 연애라기보다는, 사귀기로 한 적 있는 두 사람이 연애는 이미 끝났는데 그냥 질질 끌어오고 있는 관계에 가깝다. 헤어지지 못해서, 또는 당장 헤어진다고 해도 대안이 없으니까, 혹은 손톱만큼의 관심만 보여줘도 유지가 되니 계속 만나는 거지, 둘 사이엔 애정, 존중, 관심, 책임감 뭐 이런 게 아무 것도 없다.
“남친 힘들까봐 제가 알아서 마사지샵 예약도 하고, 또 남친 차 기름 넣으라고 저 역시 없는 형편에 주유권도 선물했거든요.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차라리 돈으로 주지!’였어요. 어제 만났을 땐 제가 주유권 주니까, 고맙다는 말 한 마디도 안 하더라고요.”
난 그게-그저 돈이나 생기면 좋은 거라는 게- 남친의 진심이라 생각한다. 그의 입장에선 연인이라는 간판을 내리지 않으면 A양이 알아서 만나러 오고, 때 되면 선물을 건네며, 평소엔 그냥 내팽개쳐두어도 A양이 알아서 그 무관심과 외로움을 다 극복해 나가기에 굳이 간판을 내릴 이유가 없다. 위에서 말한 ‘주유권 받은 후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었던 일’만 하더라도, 이후 두 사람은 아래와 같은 대화만 나눴을 뿐 아니었는가.
A양 – 어쩜 고맙다고 한 마디도 안 할 수가 있어? 기분 나빠.
남친 – 아하 고마워고마워.
이래도 계속 유지되는 관계라면, 난 친구로라도 한 열댓 명 곁에 두고 싶다. 오늘은 주유권 받고, 내일은 식사권 받고, 모레는 마사지권 받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도와달라면 도와주고…. A양과 상대에겐 아직까지 분명 ‘연인’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지만, 내부는 폐허이며 그 폐허를 A양 혼자 지키고 있을 뿐이다.
1. 남친에게 다른 여자가 있는 걸까요?
사연을 주시는 분들 중엔 이런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꽤 있는데, 이런 건 내가 대답해 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며, 심증이 있다 하더라도 매뉴얼을 통해 이야기하기 어려운 부분이니, 점쟁이에게 묻듯 ‘바람을 피우는 것 같냐, 아닌 것 같냐’는 질문 같은 건 자제해 주셨으면 한다.
‘다른 여자가 있는지 없는지’ 보다 중요한 건, 두 사람의 관계가 현재 어떠냐는 거다. 저 질문을 하는 대원들은
“다른 건 지금까지 제가 다 참고 있는데, 다른 여자가 있는 건 못 참거든요. 그래서 다른 여자가 있는 것 같다고 하면 저도 그냥 접으려고요. 양다리 걸치고 있는 것까지 제가 이해하며 노력할 필요 없는 거잖아요. 다른 여자가 있는 것 같은지, 아닌지 말해주세요.”
라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 관계들은 ‘다른 여자 문제’를 논외로 하더라도 당장 헤어지는 게 맞는 사례가 8할 이상이다. A양과 남친의 대화를 보자.
A양 – 자기는 애정표현을 전혀 안 해서, 날 안 좋아하는 것 같아. 보고 싶다는 말도 없고.
남친 –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A양 – 내가 예시까지 들어줬잖아. 보고 싶다는 말.
남친 – 보고 싶다.
A양 – 엎드려 절 받기지. 자긴 왜 보고 싶다고 안 해? 왜 맨날 내가 만나자고 졸라야 해?
남친 – 내가 너무 바빠서 정신이 없어서. 그런 거 신경 쓸 여유가 없어.
둘의 관계에 대한 A양의 하소연도 들어보자.
“장거리 연애도 아닌데 한 달에 두 번 보는 게 저는 정말 못마땅합니다. 남친은 주말이면 온전히 자신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면서 만나지 말자네요. 제가 남친 집 앞까지 찾아가도, 남친은 반가워하지 않습니다. 만나기로 한 날에도 남친은 밥 먹고 나면, 그때부터 다음 날 출근해야 하니 일찍 집에 가서 쉬고 싶다고 하고요.”
A양은 남친에게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면 꼭 연락해 달라’는 부탁도 해두었는데, 남친이 A양에게 보내는 톡이라고는
“나 집 도착. 빠이.”
라는 게 전부다. 보통 권태에 찌들거나 둘 다 마음이 뜬 연애를 봐도 이 정도는 아닌데, A양 연애의 경우 A양이 전부 도맡아 뒤치다꺼리를 하며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길 애걸하니, 남친은 더 성의 없이 툭 던지고는 ‘이 정도 베풀었으면 일주일 버티겠지’하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기쁨이나 즐거움은커녕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는 연애다. A양이 일부러 하루종일 연락을 안 해도, 남친은 아무 신경도 쓰질 않는다. 그것에 대해 A양이 따지면, 남친은
“배터리가 다 되었거나, 바빴겠지. 그래서 연락 안 한 거겠지. 또 네가 알아서 처신 잘 할 거고.”
라는 이야기를 할 뿐이다. A양이 오늘 당장 쓰러져 며칠간 연락을 못 해도, 남친은 다음 주나 되어야 A양에게 연락할 것 같다. 연락이 닿았을 때 큰 병이 발견된 거라 말하면, “에고…. 힘내.” 정도의 반응만 보일 것 같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양은 이 남친을 놓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고 하는데, 그 이유와 그것이 불러온 문제에 대해선 아래에서 이야기해보자.
2. 우린 왜 이렇게 된 걸까요?
A양이 말한 ‘남친과 헤어질 수 없는 이유’를 먼저 보자.
“남친이랑 유머코드가 너무 잘 맞는 거. 제 가장 친한 친구보다도 잘 맞아요.”
A양은 남친이 농담과 장난에 뛰어나다는 것에 반해 사귄 것 같다. 같이 있으면 재미있고, 그래서 그걸 호감과 사랑이라 생각해서 사귄 건데, 여기서 보기에 A양의 남친은 진지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이 그저 ‘드립’에만 열중하는 사람인 것 같다. 둘의 대화를 보자.
(1)
A양 – 화장실 갈 시간이라도 연락할 수 있는 거잖아. 넌 화장실도 안 가?
남친 – 응. 안 갔어.
(2)
A양 – 우리 이번 주말에 보나?
남친 – 그러나?
(3)
A양 – 애정표현이 전혀 없잖아.
남친 - (이모티콘)
A양 – 그게 무슨 뜻이야?
남친 –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고 ㅋㅋ
(4)
A양 – 언제까지 고민하고 나서 결정할 건데?
남친 – 그건 며느리도 몰라.
그냥 둘 다 신나서 장난치며 놀 때만 저러는 게 아니라, 모든 대화가 저런 식이다. 이건 ‘진지한 대화가 불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일반적인 대화가 불가능’이라고 보는 게 맞다. 하지만 A양은 또 남친의 저런 장난과 드립이 싫지 않으니 웃다가 혼자 알아서 감정정리하고, 다음번에 말을 걸면 또 저런 식의 대화만 반복되는 패턴이다.
이렇게 너무 오래,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냥 이런 식으로만 만나왔기에, 이젠 뭘 어떻게 조율하는 게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A양이 무슨 말을 하든 남친은 장난만 치려하고, 그 장난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입을 닫아버린다. 그런 일이 반복되며 남친은 이제 A양을 한 달에 두 번, 나아가 한 달에 한 번이나 두 달에 한 번 정도 만나기만을 원하는 것이고 말이다.
충격과 공포의 얘기가 될 수 있겠지만, 난 두 사람의 관계를 ‘개그콤비’정도로 생각한다. 그래서 어쩔 수없이 같은 공간에서 거의 매일 봐야 할 때에는 드립을 치며 놀다가, 상황이 바뀌어 만나는 것마저 애써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니 상대는 시들해진 것이고 말이다. A양이 그의 연인이 아니었더라도, 또는 A양 자리에 A양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있었더라도 그는 그냥 드립을 치며 놀았을 수 있는데, 그걸 A양이 호감이나 사랑으로 착각해 지금까지 끌고 온 것 같다.
3. 헤어지면 저만 힘들 것 같아요.
그러니까
- 남친이 내게 애정이 없는 게 뻔히 보이기에, 지금 내가 헤어지자고 하면 남친은 오히려 홀가분해지고 나만 힘들 것 같다.
라는 이유로 연애를 지속하는 건, 카지노에 들어가 수천만 원을 잃고도 ‘지금 내가 나가면 나만 잃는 것이기에, 난 게임을 더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도박중독에 대해선 그 문제의 심각성이 널리 알려져 있고 치유프로그램들도 있지만, 연애에서의 그것에 대해선 잘 알려지지 않은 까닭에,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모든 걸 탕진해가면서도 관계를 놓지 못하고 있다.
A양의 말을 좀 더 들어보자.
“차라리 남친이 저한테 마음이 떴다면, 먼저 헤어지자고 정리해줬음 좋겠어요. 차이는 입장이면 제가 뭐 손 쓸 수도 없게 되어버릴 테니까, 후련하게 차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위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상대 입장에선 특별히 A양이 어떤 위해를 가하지 않는 이상 일부러 A양과의 관계를 끊을 이유가 없다. 그냥 이렇게만 지내도, 아니 이것보다 더 무성의하고 더 무관심하게 A양을 대해도 관계는 계속 유지되고 A양이 알아서 다 감당하며 때 되면 알아서 챙겨주기까지 할 테니 말이다.
A양이 정말 어떤 형태로든 차라리 이 관계가 정리되길 원하는 거라면, 지금 혼자 다 하고 있는 모든 걸 즉시 멈추길 권한다. 상대가 장난으로 한두 마디를 던질 뿐 대화 할 의지가 없어 보이면 A양도 더는 이야기를 하지 말고, 연락도 없고 만나자는 말도 없으면 A양도 A양의 삶을 먼저 챙기며 살자. 지금처럼 전화 통화 시 일부러 시큰둥하게 반응해 놓고는
“이게 다 네가 나한테 그래서 그러는 거다.”
라는 이야기를 하지 말고, 아예 연락 자체를 줄이길 권한다.
또, A양은 ‘답정너’의 형태로
“넌 내 생각은 아예 안 해?”
“애정표현 좀 해.”
“내 말 무시하는 거야?”
“내 부탁을 들어줘. 그럼 우린 싸울 일이 없어.”
“프사에 연애 중인 거 티나게 해줘.”
라는 이야기만을 하고 있는데, 저런 말을 해서라도 연애를 유지하려 하지 말고, 또 저 말에 겨우 “얼른 자.” 정도의 대답만 듣고도 꿋꿋하게 버티지 말자. A양이 아무리
“내 말 무시하는 거 기분 나빠.”
라고 말해도 상대는 눈 한 번 깜빡 안 하지 않는가. 남친이 무슨 제갈공명도 아닌데 A양이 세 번 찾아가 데이트 좀 하자고 빌어야 겨우 얼굴 한 번 볼 수 있는 연애는, 이쯤에서 그만 두길 권하고 싶다.
“제가 봐도 저 스스가 너무 등신 같은 거 아는데, 지금 헤어져봤자 저만 더 힘들 것 같아요.”
이렇게 1년, 2년 더 만나다 헤어지면, 그땐 이별 때문에 힘든 게 문제가 아니라, 나이는 나이대로 들고 혼자 헌신하는 연애에 길들여져 누굴 다시 만나기조차 쉽지 않은 상황에 처할 수 있다. A양의 이십대는 이제 두 달도 채 안 남지 않았는가. 이미 많은 세월을 이 관계에 소진하며 차고 남을 정도로 상대를 겪어 봤으니, A양 자신을 위해서라도 지금 즉시 벗어나길 권한다.
끝으로 하나 더. A양은 이미 여러 사람들에게 자신의 연애 이야기를 해 많은 조언까지 받은 것 같은데, 그렇게 타인들을 ‘내 편’으로 만들어 승리하는 것에 중독되지 말라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그게 연인에게 못 받는 관심과 애정과 보살핌을 남들을 통해 받는 것 같아 당장이야 위로가 되겠지만, 길게 보면 본인 연애가 망가지고 있다는 걸 남들에게 생중계하며 시청률과 댓글에 만족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남들이 이런저런 조언을 하면 A양은 그 조언을 참고해 A양의 진로를 어디로 돌릴지를 결정해야지, 계속 그 자리에 표류하며 ‘전에 말한 것보다 더 황당한 일이 벌어짐’ 같은 이야기만 하고 있으면 답이 없는 것 아닌가.
전에 일상적인 이야기를 올리는 어떤 블로거가
“딸애의 따귀를 때렸습니다.”
라는 제목으로 포스팅을 했다가 문제가 된 적 있다. 그런 일들을 벌여 글을 올리면 당장 사람들의 관심이야 끌 수 있겠지만, 딸에겐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되거나 가정의 근본이 흔들릴 수 있는 것 아닌가. 누가 더 잘못한 건지, 남친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A양이 그 관계를 위해 어떤 희생까지 했는지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건 A양의 행복이니, ‘내 편 모집’을 위한 증거를 모으거나 더 이해하기 힘든 일들을 벌이는 건 그만두고, 아프고 힘들고 괴롭기만 한 건 즉시 그만두길 바란다.
자, 오늘 준비한 얘기는 여기까지다. 난 다음 달 이맘때쯤 한 주 동안 파리에 다녀오게 될 것 같다. 이 얘기를 지인들에게 하니 다들 장난치는 줄로만 알던데, 진짜 간다. 항공권과 숙소 예약도 이미 끝났다.
이게 사실 노멀로그 어느 독자 분께서 ‘뮤지엄 산’이라고 하는 강원도 원주에 있는 미술관을 추천해주셔서 시작된 일인데, 거길 가느니 캄보디아를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캄보디아를 가느니 파리를 가는 게 낫지 않을까, 하다가 진짜 파리에 가게 되었다. 파리에 대해선 아직 아무 개념도 잡히지 않아 가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혹 경험자 분이 계시면 댓글로 조언을 좀 부탁드린다. 콜로세움 정도를 가보면 어떨까 싶은데…, 아 그건 로마에 있나? 로마랑 이탈리아랑 가깝나? 내가 대략 이 정도 수준이니, 많은 가르침 부탁드린다. 자 그럼, 다들 즐거운 월요일 보내시길!
▼ 공감과 추천, 댓글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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