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도 한 번 얘기했듯, 짝사랑 중이라면 구애에만 집중할 게 아니라 ‘상대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가’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만약 상대가 접촉사고를 당해 경황이 없는 와중에 이쪽에서 전화를 걸어 ‘만날 약속’을 잡으려 한다면, 결코 좋은 말을 들을 순 없는 것 아니겠는가.
상대가 하루 예닐곱 시간 밖에 못 자며 공부에 매달리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런 와중에’ 낼 수 있는 아주 작은 여유에 좀 스며들 생각을 해야지, 일반적인 상황에서처럼 연락할 거 다 하고 만날 거 다 만나는 걸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래버리면, 상대가 어렵게 낸 ‘1시간’도 이쪽은 ‘겨우 1시간’으로 여기며 실망하게 되고, 상대가 꾸준히 답장을 보내주고 있음에도 이쪽은 ‘더 길게 얘기할 생각은 없나? 선톡을 할 생각은 없는 건가?’하며 서운해 하게 된다.
난 첫 사연의 주인공인 L군에게, 그녀의 상황을 좀 더 ‘내 상황’ 인 것처럼 여기며 생각해 보길 권하고 싶다. 그녀는 곧 서른인데 아직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전이고, 지금 재학 중인 곳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야 어느 정도 미래가 보장되게 된다. 그녀의 이력을 보면 누가 시켜서 하는 공부나 그저 스펙을 위해서 하는 공부가 아닌, 정말 ‘전공’을 하기 위해 외국까지 가서 그렇게 공부하고 있는 거라는 걸 알 수 있는데, 그런 상황이라면 의식적으로라도 많은 것들 일단 접거나 포기해둔 채 학업에 매달리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런 특수성에 대해 그저 머리로만 ‘그렇겠지’하고 넘긴 채 실질적으로는 상대가 얼른 내게 마음을 열고 연애까지 시작하게 되길 바랄 게 아니라, 이런 상황에선 상대에게 저녁 같이 먹고 드라이브 하는 일도 버거울 수 있다는 걸 진짜로 공감해야 한다. 그게 안 된다면, ‘바쁜 여자에게 다가가는 방법’같은 것에 대해서만 고민하는 건 의미가 없는 일일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 먼저 곰곰이 생각해 보길 바라며, 매뉴얼 시작해 보자.
1. 너무 바쁘고 반응 없는 사람한텐 어떻게 다가가죠?
L군은 L군도 모르는 사이 지인이 그냥 아무렇게나 촬영한 L군의 사진이 마음에 드는가? 난 내가 웃을 때 공쥬님(여자친구)이 날 찍은 사진을 보고 기겁한 적 있다. 난 만약 다른 사람이 그렇게 웃는 걸 봤다면
‘저 사람은 안 웃는 게 나을 것 같다. 웃으니까 뭔가 덜떨어져 보이네. 활짝 웃는 것도 아니고, 뭔가 기괴하게 터져 나오는 웃음을 흘리는 것 같아.’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난 그간 분명 내 웃음이 ‘다정하고 유쾌한 표정’일 거라 생각했는데, 얼굴이 구겨지며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는 듯한 기괴한 웃음이었던 것이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웃지 않기 시작한 것이.(응?)
웃자고 한 소리고, 여하튼 위의 내 ‘웃음’에 대한 이야기처럼, L군 역시 L군이 생각하는 L군 자신과 남들이 보는 L군 자신에겐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걸 한번쯤 생각해 봤으면 한다. L군은
- 상대가 날 가르치려 할 때가 있으며, 어린애로 보는 것 같다.
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놓고 보면 실제로 그래 보이기도 한다. L군이 상대를 챙긴다며 한 질문들은 “누나, 뭐해요?”라고 묻는 듯이 느껴지고, 대화의 주제를 상대가 잘 아는 것으로 잡는다며 “누나, 그건 어떻게 하는 거예요?”라고 묻는 것들은 자꾸 조언을 구하려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니 말이다. L군에겐 그게
- 다가가기 위해 보였던 모습. 내 진짜 모습은 아님.
일 수 있겠지만, 그런 것들을 보며 L군의 이미지를 만들 수밖에 없는 상대는, 당연히 그게 L군의 모습일 거라 생각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았으면 한다.
그리고 또 L군은
“그 누나가 호주에 여행 다녀온 적 있어서 호주 어땠는지 물었더니, 그냥 좋았다고 하고 별다른 얘기도 안 하더라고요. 저한테 되묻지도 않고, 또 제 얘기 하면 ‘아 그래.’하고 뚝뚝 끊기고. 지금 하고 있는 전공 말고 다른 걸 선택했으면 어땠을지도 물었는데, 거기에 대한 대답도 그다지 성의 있진 않았던 것 같아요.”
라고 했는데, 그런 막연한 질문이나 사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데 묻는 질문 같은 건 좀 하지 않았으면 한다. 호주에 갔다 온 것에 대해 질문 할 거면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물가가 어땠는지를 묻거나 숙박이 만족스러웠는지 등을 물어야 하는 거다. L군이 ‘호주 어땠어요?’라고 물었다고 해서 그녀가 수다쟁이가 되어 전부 다 브리핑하듯 재잘재잘 할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으면 한다.
또, L군의 ‘질문을 위한 질문’을 하는 태도에 대해 상대 역시
“너 그거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왜 물어?”
라고 말한 적도 있잖은가. 이런 부분은 L군이 상대를 그저 ‘공략의 대상’으로 생각하며 대화 역시 ‘좀 더 가까워지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기만 해서 벌어지는 일일 수 있으니, 자꾸 혼자 판을 짜가며 상대를 어떻게 움직이도록 만들려고 하지 말고, 그냥 진짜 L군이 좋아하고 있는 것들을 상대에게 소개하거나 상대에 대해 정말 궁금한 것들을 묻길 바란다.
더불어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상대가 내게 더 관심을 갖고 되물어주는 것’만을 바라고만 있지도 말았으면 한다. 한꺼번에 이 모든 걸 다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상대를 무대 위에 올려둔 채 관찰하거나 기대만 하니, 그 자리가 L군에겐 상처가 되는 거고 상대에겐 지루함만 가득해 지는 거다. 그런 모습은 무슨 영화를 찍을 건지도 아직 계획을 세우지 못한 와중에 여배우 오디션만 보는 것과 같으니, 괜찮은 여배우를 캐스팅할 생각만 할 게 아니라 대체 뭘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를 L군 스스로 먼저 확실하게 짚어보길 바란다.
난 L군이 지금 정말 운 좋게 상대와 연애를 시작한다 해도, 그때부터는 ‘상대가 날 100% 사랑해주는 게 아닌 것 같다’며 또 그 지점에 함몰 될 거라 예상한다. 지금까지의 모습을 근거로 미래를 그려보면 이런 예측만이 가능할 뿐이니, 이 지점에 대해서도 꼭 곰곰이 생각해 봤으면 한다.
2. 군대 간 연하남, 포기해야 할까요?
그러니까
“지금은 누나가 30~40% 여자로 보인다.”
따위의 이야기는
“멍멍멍멍.”
이라는 이야기와 별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자. 필요 없을 때에는 내팽개쳐두고 대답도 안 하며 찾아가도 집착하지 말라며 쫓아내다가, 아쉬울 때에만 저런 이야기를 해가며 스킨십 진도를 나가는 건, 그냥 Y양을 딱 그 정도로만 생각한다는 의미일 뿐이다.
Y양은 이 관계를 정말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난 Y양에게 ‘상대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도 해주고 싶다. 그도 Y양과 똑같은 처지에서 비슷한 마음으로 이 관계를 대할 거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그에겐 Y양과 같은 ‘누나들’, 또는 ‘여자들’이 많을 수 있다는 것도 좀 생각해봤으면 한다. 그의 태도를 보면 ‘아는 여자 중 하나’로 Y양을 대할 뿐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는데, Y양에겐 현재 ‘아는 남자’가 상대 하나인 관계로 그도 그럴 거란 전제하에 모든 걸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건 내가 늘 하는 얘기지만, ‘상대가 어느 순간 내게 어떠한 일을 해준 적 있다’는 것 하나만 볼 게 아니라, 그 행동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지, 또 그때 했던 말들이 지금까지 유효한지를 꼭 살펴봐야 한다. Y양은
“이전 남친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다정함을 봤어요.”
“제가 퇴근할 때 회사 앞으로 데리러 왔던 모습 같은 거….”
“처음 만났을 때 제게 또 보자고 말해줬던 게 기억에 남아요.”
등의 이야기를 신청서에 적었는데, 그것 중 지금까지 유지되거나 유효한 건 하나도 없지 않은가.
내가 Y양의 썸남이라면, 나 역시 Y양 퇴근시간에 맞춰 꽃다발까지 사가지고는 Y양에게 갈 수 있다. 하지만 그래놓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관계를 내팽개쳐두거나 “왜 집착이야? 연락하지 마.” 따위의 이야기를 할 뿐이라면, 그러면서 또 “나 웨돔에서 술 좀 마셨는데, 지금 올 수 있어?” 따위의 얘기만 할 뿐이라면, Y양은 나라는 인간을 충분히 겪어 본 것이니 스스로 판단을 해야 한다. 그저 또 연락이 오면 기회가 주어진 거라 착각하며 나가서는
“난 너에게 누나야, 아니면 여자야?”
라는 질문만 할 게 아니라 말이다. Y양의 사연에는
“너무 괘씸하고 자존심도 상해서 진짜 다시는 연락 안 하려고 했습니다.”
“엄청 냉정하게 굴더군요. 진짜 상처 받을 정도로요.”
“정말 그날 자존심이 바닥을 치는 기분이더군요.”
라는 문장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 정도의 관계라면 ‘못 쓰는 관계’가 분명하다는 얘기도 해주고 싶다. Y양이 스물일곱 정도만 되어도 난 “그래도 포기 못하겠다면 바닥까지 경험하고 올라와야 할 것 같습니다.” 정도로 이야기를 해주겠지만, 이제 하룻밤만 더 자면 Y양도 더는 이십대가 아니잖은가. 그래서 난 Y양에게, 더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이쯤에서 그냥 이 관계는 정리하길 권해주고 싶다. 딱히 정리할 노력을 할 것도 없이 그냥 Y양이 연락만 더 안 해도 저절로 정리될 관계이니, 이 관계에 대한 기대는 작별하는 2016년에 실어 보내버렸으면 한다.
자, 이렇게 2016년의 마지막 매뉴얼이 끝났다. 개인적으로는 언젠가부터 한 해가 가고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것에 큰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데, 어쨌든 내일부터는 날짜를 쓸 때 2017년이라고 써야 하는 새 해가 시작되는 것이니, 다들 새 노트의 첫 페이지를 써내려가는 기분으로 시작하시길 바란다.
근데 진짜 2006년에서 2007년이 될 때에는 엄청나게 집약된 꾸러미를 내려놓는 기분이 확실히 들었는데, 2016년에서 2017년으로 넘어가는 건 계산기의 ‘C’ 버튼을 눌러 ‘0’으로 만드는 것 정도의 느낌밖에 들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나만 이러는 건지, 아니면 다른 분들도 이런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몇 주 전부터 ‘불꽃놀이 사진’을 찍고 싶어서 일산 호수공원 불꽃놀이를 보러 가려 했는데, 공교롭게도 마침 딱 불꽃놀이가 있는 토요일마다 일이 생겨서 가질 못했다. 오늘 하는 불꽃놀이가 마지막 불꽃놀이인 걸로 알고 있는데, 역시나 오늘도 저녁에 약속이 생겨 사진 찍으러는 못 갈 것 같다. 그래서 불꽃놀이는 포기하더라도 일몰을 좀 담아볼까 하고 있는데, 구름을 보니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아 이것도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 내일 새벽에나, 해돋이 축제장에 들러 일출을 좀 찍어볼까 한다. 그럼 다들 따뜻한 2016년의 마지막 밤 보내시고, 2017년 새해도 행복하게 맞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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