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연애는 원래 실수와 시행착오로 점철되는 법이니 너무 자책하진 말자. 이거 너무 골똘히 생각하며 거기에만 함몰되어 있으면 사람이 이상해질 수 있다. 팔에 상처가 났으면 치료할 생각을 해야지, 딱지가 앉을 때마다 뜯어내며 그 상처가 난 원인만 계속 곱씹어 후회하고 있으면 덧날 일만 남는 것 아니겠는가.
지금 치료가 다급한 사람은 ‘다른 남자친구가 생긴 구여친’이 아니라 J씨 자신이다. 그러니 구여친의 새남친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며 혼자 폭주하거나, 연애에 지친 것처럼 말한 그녀가 왜 얼마 지나지 않아 새 연애를 시작했는지를 파헤치려 하거나, 나중에라도 다시 사귈 기회가 있을지를 점치려고 하거나, 혹시 그녀가 새남친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J씨에게 돌아오면 받아줘야 하는 건지를 고민만 하고 있진 말자. 그래버리면 J씨의 신경들은 바싹 말라 푸석푸석해질 수 있으며, 그러는 동안 ‘J씨다운 모습’들도 사라져 ‘실연당한 남자’의 모습만 남게 될 수 있다.
무엇이 어찌되었든 지금 J씨 앞에 놓인 것이 현 상황이고, 우리는 이 상황을 헤쳐 나가야 한다.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보자. 잊고 못 잊고 재회하고 못하고는 나중 문제고, 지금은 ‘얼마 전까지의 J씨’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그녀는 왜 그런 J씨에게 이별을 말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돌아보는 게 좋겠다. 돌직구에 놀라 얼른 일어서 그 자리를 피하기라도 하라는 심정으로, 딱 네 번 공을 던지도록 하겠다. 출발해 보자.
1. 진심과 다른 이해와 인내는 화를 부를 수 있다.
‘내가 반대하면 여친이 싫어할까봐’라는 이유로 ‘일단 무조건 허용’이란 태도를 취해선 안 된다. 상대가 동의를 구하는 것에 대한 J씨의 솔직한 심정을 얘기해야지, 앞에선 우선 다 동의한다고 말해놓곤 뒤에서 다른 마음을 품은 채 실망과 서운함을 쌓아가거나, 그것에 대한 얘기를 계속하며 터치하려 들어선 안 된다.
여친이 날 두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이 잦아 싫은 거라면, 그런 일이 잦을 때 J씨가 느끼는 기분을 이야기하자. 그렇게 J씨의 입장과 생각을 털어 놓은 뒤에 여친의 대답을 들으며 조율해봐야지, 그냥 다 그러라고 해놓곤
- 뭐 입고 나가냐, 어디쯤이냐, 누구 만났냐, 뭐 하냐, 왜 문자 확인 안 하냐, 언제 들어갈 거냐, 아직도 얘기 중이냐, 택시 탔냐, 누구랑 탔냐, 집 도착했냐
등의 이야기로 상대를 괴롭히면, 그게 오히려 상대에겐 ‘난 네가 날 두고 거기 간다고 했을 때 이러이러한 생각과 기분이 든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괴로운 일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몇 번 그렇게 맹목적으로 넘어가다가, 나중이 되어서야 굳은 표정으로 ‘내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들과 서운했던 것들’을 쏟아내며 상대를 완전히 가로막으려 들어선 안 된다. 그 태도는, J씨 입장에선 ‘참고 참다가 얘기한 것’일지 모르겠지만, 상대에겐 ‘집착하고 구속하기 시작한 것’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니 J씨 혼자 선을 정해놓곤 쭉 지켜보다가 상대가 그 선을 넘을 것 같을 때 단속하려 하지 말고, 애초부터 둘이 솔직한 마음을 털어 놓고는 협의해가며 선을 정하길 바란다.
2. 투정과 짜증은 완전히 다르다.
다른 건 다 잊어도 이거 하난 꼭 기억하자.
- 안 좋은 얘기를 안 좋을 때 꺼내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다.
J씨 여친의 신발을 신고 이 사연을 보면, J씨는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사람이며, 최악의 타이밍만 골라서 “내가 보기엔 너 이러이러해.”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우리끼리니까 아주 솔직하게 얘기를 해보자. J씨는 여친이 친구들과 여행을 가서 짜증이 났다. 간 것까지는 뭐 이해했는데, 가서 연락이 수월하게 되지 않으니 좀 짜증이 난 것이다. 그런데 그걸 J씨는 대화 중 돌려서 표현한다. 뭐하냐는 여친의 질문에
“답장 기다리다가 힘들어서 이제 쉬려구용”
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여하튼 그 말을 여친은 애교 섞인 상황설명을 하며 넘겼는데, J씨는 삐딱한 태도로 2절까지 해버리고 만다. 그러곤 여친이 그걸 안 받아주니 곧바로
“(내가 너에게)투정 부리는 거 받아주면 자존심 상해?”
라는 이야기도 이어서 한다. 진지모드로 돌입해 공격태세를 갖춘 것이다. 그 말까지도 여친은 ‘나름 받는다고 받은 건데 이상했나?’라는 뉘앙스로 받아주는데, 거기다 대고 J씨는
“가끔 느끼는 건데, 넌 정말 지기 싫어하는 것 같아.”
라는 이야기까지를 해버린다. 그 말에 여친이
“그런 건 아닌데, (넌)가끔 투정부리는 게 아니라 짜증내는 것처럼 느껴져.”
라고 말하자 ‘지금도 지기 싫어서 그런 말 하는 거냐’는 뉘앙스의 이야기까지도 꺼냈다.
이 정도면 짜증을 넘어, 거의 행패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차가운 머리로 생각해 보자. 여행 중인 사람 말꼬리 붙잡아 ‘그간 내가 느낀 너의 단점’을 구구절절 읊어대면, 세상은 좀 더 살기 좋은 곳이 되고 인생이 좀 더 행복해지며 사랑은 돈독해지겠는가? 이것과 관련된 또 다른 J씨의 문제도 있는데, 이건 아래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3. 백 번 이겨도, 상대가 관계를 포기하면 의미 없다.
사람을 진짜 짜증나게 만드는 대화법 중 하나가, 분명 짜증냈으면서 짜증낸 거 아니라고 하거나, 실망했다는 걸 목소리에 발라 전달했으면서 그렇게 들었다면 네가 그렇게 들은 게 문제라고 말하거나, ‘내가 그랬던 건 맞는데 그건 네가 먼저 잘못해서다’라며 핑계를 대는 거다.
J씨의 대화법이 저렇다. 저 위에서 말한 ‘투정과 짜증’ 이야기를 하며 J씨는 짜증낸 적 없다는 뉘앙스로 ‘내 어떤 부분을 그렇게 느낀 거냐’고 묻지 않았는가. 그 말에 여친이 하나하나 짚어주자, 그제야 J씨는 ‘그땐 내 마음이 좀 그렇긴 했다’며 인정했다. 그런데 그러고는 즉시 또,
“그럼 아까 내가 그랬기 때문에 너도 그런 거야?”
라며 날을 세웠다가, 여친 역시 날을 세우자 J씨는 또 ‘짜증이 아니라 투정이었다’고 말을 바꾼다.
이런 식의 대화만으로도 감정소모는 엄청나고 그만큼의 피로는 쌓이는데, J씨는 여기서 더 나아가 ‘숨겨왔던 솔직한 얘기’까지 꺼내버리고 만다. 게다가 그 얘기는
A.내가 지금까지 너를 쭉 지켜본 결과, 너는 이러이러한 것 같다.
B.예전에 그런 일 일었을 때 사실 내 마음은 이러이러했다.
C.(그 말에 대한 상대의 답을 듣고는 또)그래서 네가 그랬던 거네.
D.내가 지금까지 너를 쭉 지켜본 결과, 너는 이러이러한 것 같다.
라는 패턴으로 반복되고 말이다.
이런 대화로 과연 문제를 풀 수 있을까? 오히려 있던 정도 떨어지며, 겉과 속이 다르고, 이제 또 무얼 마음에 품고는 어떻게 하나 지켜보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을까? 승리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J씨의 대화법은 ‘절대 패배하지 않는, 져도 비기는’ 필살의 대화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대화법으로 100전 100승을 거두더라도, 연애가 끝나면 그 승리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기억해뒀으면 한다. 연인과의 대화는 토론배틀이 아니다. 인정할 건 인정하고 사과할 건 사과하자.
4. 상대가 한 마디 했다고 땅굴 파고 들어가선 안 된다.
J씨는 모든 것이 안정적이며 J씨가 바라는 대로만 돌아갈 땐 애교도 부리고 귀여움도 떨고 하는데, 그게 아닐 땐 순식간에 불안에 휩싸여 부정적인 질문을 해대거나 기가 죽어선 교과서 읽듯이 딱딱하게 대응을 한다. 마치
‘나 지금 선생님께 혼나는 어린아이의 마음이 되었다. 내 상태가 지금 이러니, 얼른 다시 기운을 북돋아 주거나 우쭈쭈쭈를 해줘라.’
라는 시위를 하듯 딱딱한 태도를 보인다.
그런 태도로 시무룩함이나 서운함을 표현하는 사람을 다시 본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상대가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쏟아내야 하는지 아는가? 특히 뭐가 어떻다고 말도 안 하며 그냥 계속 “아냐, 괜찮아. 난 지금 평소와 같이 널 대하는 건데?”식으로 나오는 사람을 본 궤도에 올리기는 더더욱 힘들다. 왜 그러는 건지 몇 번을 다시 물어야 겨우 진심을 말하고, 또 뭐가 서운했던 건지를 물으면 생각지도 못했던 이유들까지 줄줄이 나오는데 어찌 지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분명 상대도 이쪽의 그런 태도로 인해 피해를 입었는데, 그것까지를 전부 물어 밝혀내고 다시 우쭈쭈쭈 해가며 웃어줘야 하는 건 ‘감정노동’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J씨의 여친이 지적했던 지점이 바로 그거다.
“그럼 난 이럴 때 어떻게 해? 내가 뭐라고 말하면 넌 기가 죽으니까, 난 말하지 말고 혼자 힘들어 해? 그리고 내가 이럴 땐 선생님한테 혼나는 기분이 든다면, 난 내가 혼낸 학생을 또 내가 달래야 해? 내가 화나고 서운한 건 어쩌고?”
연애 중이라고 해서 항상 기쁘고 좋기만 해야 하는 것 아니고, 늘 좋은 얘기하고 긍정적인 답을 구한다고 그게 행복인 것 아니며, 같이 먹고 마시고 놀 얘기로 가득하다고 해서 그게 ‘잘하고 있는 연애’인 건 아니다.
그런데 J씨는 그것만을 연애라고 생각했고, 때문에 기대했던 것과 다른 상황이 찾아오면 주저앉아서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낙서만 하고 있었다. 이처럼 작은 갈등에도 시무룩해지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만 보였기에, 상대는 J씨에게 전혀 의지하거나 기댈 수 없는 관계로 굳어지기도 했고 말이다.
J씨는 여친이 ‘중요한 일’에 대해 남친인 자신보다 친구에게 더 먼저 말하거나 친구에게 묻고 의견을 들은 것에 대해 서운해 했는데, 그녀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J씨가 그녀에게 ‘어린아이’같은 모습을 너무 많이 보여줬기 때문이다. J씨만 하더라도 연애에 대한 고민이 있을 때 당당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친구에게 털어 놓지, 매번 J씨가 달래줘야 할 정도로 감정변화와 어리광이 심한 친구에게 털어 놓진 않을 것 아닌가.
연인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J씨가 생각하는 걸 상대가 J씨에게 하지 않는다고 불평하기 전에, J씨가 상대에게 ‘그럴 수 있는 남친’으로 여겨졌을지도 꼭 한 번 돌아보길 권한다. 좀 다른 얘기긴 하지만, 내가 아는 어느 가족 중엔 남편이 “가장이 뭘 한다고 하면 가족들이 응원해줘야지, 응원을 못할망정 초를 치냐.”라는 이야기를 한 사례가 있는데, 그 집을 보면 남편이 매번 일을 벌이고는 수습도 못하며 그 피해를 고스란히 가족들이 받았기에 그렇게 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상대에게 믿음과 응원을 기대하고 요구하기 전에, 먼저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이며 확신을 줄 수도 있는 건 아닌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으면 한다.
끝으로 하나 더 이야기 해주고 싶은 건, 연애 중엔 연인이 하는 말을 지금보다 10배는 무겁게 여기며 경청하라는 것이다. 당시엔 연인이 하는 말을 반박하거나 자기변호를 하기 바빠서 놓칠 수 있고, 이쪽이 생각하고 있는 연애 판타지를 현실로 옮기기에 바빠 가볍게 여길 수 있으며, 얼른 기분 풀고 다시 러브러브모드로 갔으면 좋겠는데 상대가 화난 것 같아 무조건적인 사과만 하다 그냥 지나갈 수 있다.
그런데 헤어지고 다시 보면, 연인이 당시에 했던 바로 그 말에 모든 힌트가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 J씨의 여친만 하더라도, J씨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해줬으면 좋겠어. 화나고 답답한 것만 표현하지 말고.”
라는 이야기를 한 적 있지 않은가. 저때 저 말을 J씨가 귀담아듣기만 했어도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건지를 금방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까닭에 계속 떠보고, 서운해 하고, 실망했다는 걸 눈치 채라는 듯이 드러내다 결국 마지막을 맞고 말았다.
사귀는 사이니까 좋다거나, 예쁘다거나, 고맙다거나, 사랑한다는 말은 안 해도 알 것이라며 다 생략해 버리면, 남는 건 혀 짧은 소리로 나누는 일상대화와 잔소리, 불평불만 밖에 없을 것이다. 다음 연애에선, 이 부분을 늘 염두에 둔 채 J씨의 애정을 한 번 더 표현하고 한 번 더 말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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