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밀린 사연이 많아, 오늘은 간단히 답이 나오는 사연들을 묶어 소개할까 한다. 매번 얘기하지만, 사연을 막연히 적어주시면 나도 막연한 대답밖에 해드릴 게 없다.
“연애 초반에 다툼이 있어서 일주일 정도 시간을 가진 적 있어요.”
“자잘하게 자주 싸우긴 했습니다. 싸우다 헤어지자고 한 적은 없고요.”
“금전적인 부분에 대한 문제로 제가 화를 낸 적이 있습니다.”
라고만 적어주시면, 당사자야 자신이 겪은 일이니 무슨 일이 왜,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있지만 난 알 방법이 없다. 이런 대원들의 경우 연애 중에도
“우리가 가깝고 친하다고 해서 내가 매번 양해하고 이해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난 똑같은 경우일 때 당연히 친구한테 양해를 구하지 오빠한테 양해를 구하진 않는데, 오빠가 매번 이러는 걸 보면 그러지 않는 내가 이상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어떻게 하는 게 맞는 거야?”
라고 물어야 하는 상황일 때,
“오빤 매번 이러지. 나 먼저 잘게.”
하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고 나선 또 상대가 화를 풀어주러 왔네 안 왔네 하는 얘기만 하곤 하는데, 여하튼 저런 경우에도 함께 답을 구해보겠다는 마음으로 명확하게 문제를 짚어 말해야지, 짜증났다는 결론만 툭 던져 놓고는 팔짱끼고 있어선 안 된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사연모음, 출발해 보자.
1. 구남친과 다시 만나던 중, 그가 소개팅을 했어요.
이건 L양이 구남친에게
- 난 그렇겐 결혼 못 한다. 우린 안 되겠다. 헤어져야겠다.
라는 이야기를 해서 끝내기로 합의 되었던 거다. 하지만 그렇게 끝난 이후 L양이 다시 연락해선 그냥 ‘놀자’는 식으로 만나왔던 것이기에, 둘은 재회를 한 게 아니라 엔조이의 관계로 지내왔던 거다.
“저는 그런 거 아니었는데요? 다시 만나자는 말만 안 한 거지, 예전처럼 지내는 거라 생각했는데요? 지금 제가 바라는 것도 재회고요.”
L양은 상대의 현 조건이라면 결혼할 수 없다며 이별을 말하지 않았는가. 상대의 조건은 바뀐 게 없고, 때문에 둘 사이엔 ‘어차피 결혼까지 갈 사이는 아님’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게다가 소개팅을 한다는 그에게 L양이 따졌을 때, 그는 ‘우린 헤어진 사이’라는 걸 확실하게 말했으며 L양이 매달렸을 때에도 ‘전엔 네가 아니었으면, 이젠 내가 아닌 것 같다’라며 명확하게 이별을 못 박았다. L양도 거기에 동의했으며, 이후 연락두절한 채로 지냈고 말이다.
그러고 나서 벌어진 일이라곤, L양이 계속 연락하고 그의 집에 찾아가 다시 만나자고 매달린 것뿐이다. 그럴 때면 그는 ‘노력해보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함께 시간을 보낸 뒤에는 먼저 연락하는 일 없으며 L양의 카톡에 의무적인 답장을 하거나 읽씹으로 응대할 뿐이었다. L양이 계속 졸라 겨우 약속을 잡아도, 약속 전날 그가 취소를 했고 말이다.
이 정도면 ‘못쓰게 된 관계’라고 봐도 무방하며, L양이 현재 하고 있는 ‘소개팅녀와 잘될까봐 불안해서 계속 들이대고 찾아가 매달리기’는 상대로 하여금 L양을 더욱 쉽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L양은 그걸 노력이라 생각하며 ‘재회의 가능성을 높이는 일’이라고 여기는 것 같은데, 재회의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목적이든 정리하는 것이 목적이든 지금 L양이 해야 할 건 그에게 더 이상 연락하거나 매달리지 않는 것이다. 그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L양이 찾아가서 빌고 모시는 상황에서 먼저 벗어나길 권한다.
2. 싸우다가 아내가 집을 나갑니다.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잡아야죠. 나가지 못하게 붙잡고 얘기를 해야죠. 이쪽이 그렇게까지 잘못한 거 아닌데 아내가 침소봉대해 화를 내는 것 같아도, 그러다 아내가 자신도 어쩌지 못할 것 같은 감정에 집을 나가려고 하는 거라면 일단 잡아야죠.
부부생활이라는 게, 누가 뭘 더 잘못했고 무슨 일까지를 저질렀다는 걸 어디다 들고 가 평가를 받아 승패를 나누는 게 아니잖습니까? 거기서 더 나아가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문제가 커질 수 있다는 게 뻔히 보이는데, 자신도 열 받았다며 그저
- 할 테면 해봐라. 나갈 테면 나가라.
하고 있으면, 막장까지 가보자는 얘기밖에는 안 되는 겁니다.
그리고 김형의 아내는 발악하는 게 아니라, 비명을 지르는 겁니다. 너무 힘들기에 김형에게 비명을 지르는 건데, 그걸 김형의 잣대로 평가해 ‘겨우 그것 가지고 뭘….’이라고 평가절하 하거나, ‘너는 짖어라 나는 TV를 볼 테니’하고 있으면, 아내로서는 그 못 견딜 것 같은 상황에서 일단 도망치는 것밖에 할 게 없지 않겠습니까?
김형이 훈련소 조교이며 아내가 훈련병인 거 아니고, 김형이 사수이며 아내가 부사수인 것 아니며, 김형이 강사이며 아내가 수강생인 게 아닙니다. 백 번 양보해 그것과 비슷한 사이인 거라 하더라도, 보살피며 가르쳐줘야지 갈구며 팽개치면 되겠습니까?
김형이 아주 나쁜 남자는 아니라는 걸 저도 압니다. 제가 그간 보고 듣고 겪어본 바에 의하면, 진짜 그냥 개차반인 것 같은 남자의 아내는 오히려 포기로 점철된 삶을 살아온 까닭에 우울해 할 수 있을 틈도 없이 새카맣게 탄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우울해하는 사람들은, 남편이 모든 걸 다 해줘오다가 그걸 멈췄다든가, 전과 달리 이제는 스스로 배우고 경험하고 극복하라며 일순간에 등을 떠민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아내가 하고 싶다는 것을 맹목적으로 다 해줘 온 까닭에 정신적, 물질적으로 완전히 의존하는 사람을 만들어 ‘더더더더’만을 외치게 만든 사례도 많고 말입니다.
지금 김형의 입장에서는 아내가 고장 난 사람처럼 보이며, 아내에게 충격요법이든 뭐든 ‘스스로 깨달을 계기’가 마련되어 저절로 좀 고쳐졌으면 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은데, 그건 참 무책임하고 잔인한 짓입니다. 상대가 자전거를 못 타면 뒤에서 잡아주거나 일단 보조바퀴라도 달아줘야지, ‘넘어지면서 알아서 배우겠지’ 하며 놔두면 차도로 나갔다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김형이 해야 할 건 ‘이해를 하겠다, 못 하겠다’의 대답이 아니라, 이해하려 노력하는 겁니다. 아내에게 선물 하나 사줘서 얼마간 입 막을 생각할 게 아니라, 무슨 얘기를 하고 있나 들어봐야 하는 겁니다. 예컨대 아내가 다리 근력이 약해 스스로 걷지 못하며 그걸 비관해 괴로워한다면, 조금이라도 걸을 수 있게 옆에서 잡아주며 재활을 도와야지, 그 괴로움 일단 술 먹고 자는 걸로 해결하라며 술만 사주거나 우울해하지 말라며 신경안정제 같은 것만 먹이며 순간을 모면하려 들면 되겠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가 남도 아닌 김형의 아내인데,
“내가 의사가 아닌데 나더러 어쩌라는 거냐. 그리고 집에만 있지 말고 나가서 걸어야 다리 근력이 생기는 거지, 매일 누워있으면서 왜 불평만 하냐. 네가 누워있는 동안 내가 대부분의 것들을 다 하고 있는데, 그것에 감사할 줄은 모르고 불평만 하는 걸 나도 더는 못 견디겠다.”
라는 뉘앙스로 밀쳐내면, 그녀는 이 세상에서 이제 누굴 믿고, 누구에게 기대며, 누구를 바라보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무섭고 차가운 표정으로 따져가며 위협이라도 해서 아내를 움직이려 들지 마시고, 손 꼭 붙잡은 채 옆에서 같이 걸어보시길 권합니다. 같이 걷다가 아내가 지쳐서 주저앉으면, 그땐 우선 아내 옆에 같이 앉으면 되는 겁니다. 뭐가 그렇게 힘드냐며 빨리 일어나라고 재촉만 할 게 아니라 말입니다.
3. 4년 사귄 남친, 너무 다혈질이며 막말을 합니다.
이건 연애가 아니라, 학대다. 남친이 여친에게
- 개돌대가리
- 개또라이
- 사람 존나 짜증나게 하네
- 지랄이지 또
- 피해의식 사로잡혀 개지랄하네
- 애새끼 존나 까칠하네
- 개고집 디진다
라는 이야기를 하는 연애 같은 건 없다.
난 H양의 사연을 받곤, 이런 관계를 어떻게 4년씩이나 이어올 수 있었는지가 참 놀라웠다. 만나서 돈 쓰는 것도 전적으로 H양이 하고, 상대가 저런 식으로 화풀이와 짜증을 부리고 나면 다시 연락하는 것도 H양이고, 욕은 제발 하지 말라고 부탁하다가 결국 ‘미안해’로 사과하는 것도 H양이다.
그래서 나는 하나하나 확인을 해봤다. 무슨 약점 같은 걸 잡힌 게 있나? 전혀 없다. 남친이 대단한 사람이라 H양이 을의 입장을 견디면서도 만나는 것인가? 전혀 아니다. H양이 남친 아니면 만날 사람이나 남자가 없는가? 아니다. 싸울 땐 저렇지만 평소엔 잘해주는가? 그것도 아니다.
H양은 그냥 오랜 기간 상대에게 세뇌되어, ‘난 그런 취급을 당해도 싼 사람’으로 반쯤은 여기고 있는 것 같다. 상대가 잘해줬던 연애 초반의 기억을 혼자 계속 꺼내어 보며 을의 자리를 견디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상대가 지금은 ‘개돌대가리’라는 이야기를 하지만, 과거엔 ‘나중에 다 갚아줄게’라는 이야기를 한 적 있으니 그거 하나 믿고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 같다.
사귀는 사이라고 간판은 걸려 있으니 그래도 계속 이어가보려 노력한다거나, 아니면 저런 학대를 당하는 것에도 길들여져 원래 연애라는 게 이런 노예생활인가보다 싶어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해하긴 어렵지만, 상대가 막대해줘야 비로소 열정적인 연애를 하고 있는 거라 착각하거나, 막말과 폭언하는 모습을 카리스마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고 말이다.
놀랍게도 이렇듯 완벽한 갑을 관계가 형성된 관계는 오래 가는 경우가 많다. 헤어진 후에도 상대는 계속 이쪽을 조롱하고 희롱하는데 이쪽은 그걸 ‘가능성’이라 생각하기도 하고,
- 이렇게 서로 막장까지 다 본 사이니, 더 내려갈 곳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다시 만나 아예 같이 살게 되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
- 표현은 저렇게 하지만, 나에 대한 마음은 분명 있을 것이다. 마음도 없는 거라면 무시하고 차단하고 떠나버렸겠지.
- 다른 남자를 만나보면 밋밋하다. 이 사람과의 관계는 격동적이고 열정적인데, 다른 남자와는 가까워지는 느낌도 들지 않고 뭔가 숨긴 채 만나는 것 같다.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나중엔 결국 폭력까지 등장해 경찰 오고, 서로 부모욕 하고, 저주의 말들을 하다가 죽이네 살리네 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이런 자극적인 관계에 중독되어 계속 질질 끌어가다보면 앞으로도 3년, 5년, 7년 훌쩍 지난다는 걸 잊지 말았으면 한다. 스물일곱에 저런 남자를 만나 서른넷이 되어서야 ‘이건 진짜 안 되겠다. 답이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선배대원의 사례가 있다. H양이 그 선배대원의 전철을 밟진 말았으면 한다.
사연 읽고 매뉴얼 작성하다보니 끼니도 거르고 말았다. 밥 먹으러 가야지. 다들 편안한 화요일 저녁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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