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영은씨에게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보란 얘기를 할 건데, 이런 나 때문에 영은씨가 가장 큰 상처를 받는 건 아닐까 싶다. 부모님께서도 이젠 그저 ‘잘해봐라’라고 하시며, 상견례도 마쳤고, 영은씨만 오케이하면 일단 진행은 될 이 결혼을, 내가 왜 이 시점에서 ‘다시 생각해보길’ 권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함께 살펴보자.
나로서도 쉽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기에 이 사연을 두고 많은 고민을 했으며, 그 결과 아무리 봐도 기울기가 심한 비탈에 일단 집부터 짓겠다는 사연처럼 보여 이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음을 밝힌다. 비탈에 집을 지어 사는 내내 여러 문제를 떠안게 되는 것보다는, 평탄화를 먼저 하거나, 그게 안 될 경우 다른 곳에 집을 짓는 게 현명한 선택이라 생각한다. 출발해 보자.
1. 속물적인 이야기.
영은씨의 남친이 자신이 전문직인 것을 늘 강조하고, 또 자기와 같은 직업이 있으면 ‘집을 해오는 여자’와 만날 수도 있었다는 뉘앙스의 이야기를 하니, 그 시각에 맞춰서 이야기를 좀 해보자.
우선, 전문직이 된 것 하나만으로 탄탄대로의 인생이 보장된 것은 아니라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직업은 밥벌이의 수단인 거지, 전문직이 되었다고 해서 남들이 돈을 싸들고 와 안겨주는 것은 아니잖은가. 돈에 얽매이지 않는 삶, 자유로운 삶 뭐 다 좋은데, 전문직이 ‘불로소득’을 의미하거나 보장하는 건 아니라는, 아주 상식적인 부분을 꼭 생각해 봤으면 한다.
또, 전문직이라고 해서 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형편이 모두 같은 건 아니다. 같은 직업이라 하더라도 누구는 억대 연봉을 찍기도 하지만, 누구는 개업한 곳의 임대료도 내지 못해 쩔쩔매는 삶을 살기도 한다. 여기엔 운칠기삼의 법칙도 적용 되겠지만, 그 외에 ‘백업이 얼마나 든든한지’, ‘수완이 어느 정도 되는지’, ‘출신학교와 인맥은 어떤지’ 등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전문직’만을 절대적으로 강조하며, 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최고연봉을 자신의 보장된 미래연봉인 양 이야기하는 건 옳지 않다. 그의 최근 몇 년간의 삶과 현재의 삶은 어떤가? 큰 빚이 있고, 마이너스 통장을 쓰고 있으며, 매달 적자를 기록하고 있지 않은가. 이걸 두고 그는
- 내가 돈을 더 벌 수도 있다. 이러이러하면 금방 번다. 하지만 난 그렇게 하기는 싫다. 이 직업을 선택한 이유가 어디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기 때문인데, 그렇게 살면 내가 이 직업을 택한 이유가 없어진다.
라는 이야기를 할 뿐이고 말이다. 난 사실 그가 ‘이러이러하면 금방 번다’고 한 부분에 대해서도
“누가 그거 다 시켜준답디까?”
라고 되묻고 싶은데, 여하튼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까닭에 밥벌이에 열심을 내지 않으면, 통장이 비는 건 전문직이나 일용직이나 같다고 적어두도록 하겠다.
그리고 남친이 ‘집을 해오는 여자’에 대해 가진 시각이 너무 자기 편한 대로만 생각하는 것 같아서 하는 얘긴데, 속물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남친은 전문직이라는 간판 빼고는 뭐 다른 게 있는 것도 아니며 빚까지 있는 상황 아닌가. 그런 상황이라면 ‘집을 해오는 여자’나 그 집안에서도 남친 직업 덕을 보려 연을 잇는 게 아니라 ‘데릴사위’로 생각하며 거둬주었다 생각하기 마련이다. 예컨대 남친이 의사라면, ‘집을 해오는 여자’ 쪽 아버지는 ‘의사 장인’을 염두에 두고 연을 잇는 거지 그를 ‘의사선생님’으로 모시려고 그런 게 아니란 얘기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직업’하나만 두고는 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누리는 게 전부 자신의 몫인 양 이야기하는 게, 여기서 보기엔 과한 직업부심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2. 젊어 고생도 고생 나름이지.
둘의 속사정이 어떤지 자세히 모르시는 부모님들께서는
“다 갖추고 하려면 못한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니, 해봐라.”
라고 하시지만, 난 이 고생을 정말 ‘둘이’ 하는 건지가 의문스럽다. 여기서 보기엔 그 고생을 만든 것은 영은씨의 남친이며 이후 고생을 담당하는 건 8할이 영은씨의 몫이 될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것인가?
여기서 보기에 둘의 결혼은,
- 가정을 꾸린 후, 영은씨가 자신의 벌이로 가정을 이끌며 잘 가꿔 나가는 것.
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결혼 후 남친이 남편으로서 담당할 역할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전문직인 자신이 나중엔 돈을 많이 벌 것이니, 그런 날이 올 때까진 현재의 빚, 몇 년간 해야 할 고생, 그 기간 동안 책임지고 가정을 꾸려가야 하는 것에 대해선 영은씨가 이해하고 감당해야 할 것처럼 말한다.
난 그가 빚이 있는 상황에서 장거리 해외여행을 다닌다는 것까지는 뭐 그럴 수도 있는 거라 생각하며 넘어갔는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엔 그렇게 돈을 쓰면서
- 결혼반지 안 해도 되잖냐. 나중에 좋은 거 하면 되지.
- 출산 후 꼭 휴직 안 하고도 일할 수 있잖냐. 산후조리 안 하는 사람도 있다.
- 가구는 누구누구네 것 있으니 그거 받아서 쓰자.
라는 뉘앙스로 ‘영은씨의 양보와 이해’을 이야기할 때 그가 참 뻔뻔하다고 생각했다. 또, 미래에 돈 벌 것은 대비해서인지
- 사업하는 사람이 원래 지출이 많다. 돈 관리는 내가 하겠다. 용돈 얼마가 좋겠냐.
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에서는 참 염치없다고 생각했으며, 거의 무료에 가까운 결혼식장을 알아봐 진행하려 하고 많은 부분을 생략하면서도 ‘네가 우리 집에 해야 하는 건 생략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하는 지점에선 참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영은씨의 부모님께서 마지못해 이 결혼에 승낙하시기 전에
“이렇게까지 해서 결혼을 하려는 이유가 무엇이냐?”
라고 물으셨다고 하는데, 나도 똑같은 질문을 영은씨에게 하고 싶다. 모든 걸 다 인내하고 희생하며, 거기다 대출을 더 받아가면서까지 이 결혼을 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영은씨의 직업이야말로 안정적이고 탄탄한 까닭에 이 상태로 결혼해도 영은씨 벌이로 충분히 유지가 가능하다는 건 잘 알겠다. 알겠는데, 난 영은씨가 못미더운 게 아니라 남친이 못미덥다. 영은씨는 모든 걸 걸고 이 결혼을 진행하려는 반면, 남친은 ‘어디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싶어 돈을 더 벌 수 있지만 안 버는 거다’ 따위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스몰웨딩 좋고, 원투룸 좋고, 가구 물려받아 쓰는 거 좋고, 반지 나중에 하기로 하는 거 좋고 뭐 다 좋다고 하자. 좋은데, 집에서 돈을 빌려주겠다는데도 그건 우리 가족의 피 같은 돈이니 사양하기로 하고 여자친구가 대출 받는 건 오케이라는 게 과연 정상적인 태도일까? 데이트할 때 내가 돈 더 쓰는 일 없이 더치페이 한다고 커뮤니티에 글 올려 자랑질 하고 있는 모습엔 영은씨를 위하는 마음이 손톱만큼이라도 포함되어 있을까? 난 남친의 태도가,
- 우리의 사정이 이래서 시작은 미약하지만, 서로 노력해서 잘 갖춰 가보자.
라기 보다,
- 기대와 책임을 최소화하고, 터치 못하게 선 그어 놓겠다.
라는 것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푸대접하고 궁상맞게 살게 만들어도 찍소리 못하게 하면 그게 능력인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앞으로 몇 년간 갚아야 겨우 다 갚을 수 있는 빚이 있는 상황에서도 이정도인데, 상황이 좀 나아지면 대체 그가 어떻게 변할지 난 솔직히 무섭다.
3. 내가 뭐라고 하든 영은씨는 결혼을 진행할 텐데….
영은씨는 내게, 내가 오래 전 영은씨를 위해 발행했던 매뉴얼에서
- 자신이 세운 기준을 상대에게 강요하지 않는 게 좋겠다.
라는 이야기를 한 걸 기억하며 상황에 대처해왔다고 했는데, 내가 저 이야기를 한 건 연락의 빈도나 만남의 횟수, 애정표현 등 ‘내 연애관’만을 기준으로 상대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거였지, 저게 절대 모든 부분에서 양보와 희생, 이해를 하란 얘기는 아니었다.
저 쪽으로 가면 낭떠러지인 게 분명한 것 같은데 상대가 그쪽으로 차를 몬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아, 내가 세운 기준을 상대에게 강요하면 안 되는 거지. 상대가 가겠다고 하면 그 뜻을 존중해주자.’
라며 손 놓고 있으면, 사고는 필연적인 것 아니겠는가.
사랑하는 마음이 1순위고, 우리가 함께하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믿음이 2순위며, 그 외에 집이나 결혼식이나 기타 물질적인 것은 3순위라는 말은 좋다. 말은 참 좋은데, 현재 그가 나가서 쓰는 돈의 절반만 모아도 쩔쩔매지 않아도 되는 걸 ‘자유롭고 싶다’는 이유로 그래야 하고, 반지 생략하고 뭐 생략하자던 사람이 여행은 가고 싶으니 신혼여행은 자신이 가고 싶은 곳으로 여유롭게 가겠다는 걸 보면 대체 그 결혼에서 영은씨의 존재와 역할은 무엇인지가 갸우뚱해지는 것 아닌가.
난 영은씨의 사연을 읽는 내내
“영은씨가 이 결혼을 왜 해야 하는지를 물어! 남친이 저럴 것이며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영은씨의 행복과 자유와 즐거움은 대체 어디서 찾아야하는지를 물어!”
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영은씨가 자기 앞에 놓인 문제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해결해나가려는 것에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체계적이고 강인한 모습을 보이는 것과 별개로, ‘그래야 하는 이유’를 난 도무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를 그렇게 풀면 풀 수 있는 것이긴 한데, 거기서 그 문제를 풀고 있어야 할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었다. 남친이 스스로에 대해서는 평범한 사람들과 차원이 다른 ‘전문직’임을 강조하고, 자기가 잘 될 것을 못 믿는 거냐고 큰소리치니까?
둘의 결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이 상처받는 건, 남친이 직업부심을 부리고 자존심을 세우며, 결혼에 대한 의무는 생각하지 않은 채 살던 대로 살며 거기다 겨우 ‘결혼 한 스푼’ 추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결혼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며, 결혼 후 가정을 꾸리고 사는 것에 드는 책임과 노력을 가볍게 생각한다. 사귀는 게 나쁘지 않으니까, 당장 식 올리고 투룸 정도 구해서 집 꾸며 놓고 같이 살면 그게 결혼이 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면 되는 걸 영은씨가 필요 이상으로 진지하게 생각하며 앞날에 대한 걱정이나 하고 있는 거라 여기는 것 같고 말이다.
영은씨의 현재 마음가짐을 보면 누가 뭐라고 하든 꼭 이 사람과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꽉 찬 것 같은데, 정말 꼭 그럴 거라면 반드시 상대에게
- 내 입장에서는 이 결혼이 어떤 느낌인지. 그리고 상대가보기에 여자로서의, 여친으로서의, 아내로서의 영은씨 삶은 어떨 것 같은지.
에 대해 묻고 환기시키길 바란다. 결혼에 대해 남친이 느낄 압박감? 이 결혼이 무슨 결혼하기 싫다는 남친 억지로 결혼 시키는 것이며, 영은씨는 결혼의 당사자가 아니라 하객이라 아무 부담이나 압박감도 안 느끼는가? 왜 남친을 어르고 달래느라 상대 몫의 책임까지 다 떠안아가며 이 결혼을 진행해야 하는가?
누가 뭘 양보하고 희생해고 하는 세세한 부분만 짚지 말고, 저 큰 맥락을 짚어 말하길 권한다. 이대로라면 ‘결혼’은 진행되겠지만, 여자로서의, 여친으로서의, 아내로서의 영은씨 삶은 상대가 요구하는 이해와 양보와 희생을 감당하느라 녹슬고 구부러져 갈 것이 분명하다. 호강까진 아니더라도 행복하게는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상대에게 있어야 하는데, 상대는 ‘노터치’와 ‘자유’를 외치고 있지 않은가. 상대의 그런 주장 다 들어주는 걸로 결혼을 성사시키고 나면, 그땐 덩그러니 ‘고생’만 남아 있을 수 있으니, 반드시 이 부분을 짚어 ‘우리는 왜 결혼하려 하는가, 이 결혼이 행복할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구했으면 한다.
결혼하기로 했으니 연애에선 합격점 받아 졸업하고 ‘결혼준비’라는 전혀 다른 레벨로 올라선 것이 아니다. 지금도 두 사람은 연애중인 것이며, 지금 보이고 있는 상대의 태도도 상대의 모습 중 하나다. 영은씨를 보면
‘이건 결혼준비 때문에 감당해야 할 절차가 있으니 잠깐 이렇게 된 거고, 이것만 극복하면 나아지고 예전처럼 좋아지겠지.’
라고 마냥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지금 보이는 상대의 태도들까지 종합해서 상대라는 사람이라 생각해야지, 좋았던 연애시절의 모습만을 상대의 모습이라 생각하며 그것만을 근거삼아 이 결혼을 진행시켜선 안 된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끝으로 하나 더. 영은씨는 상대에 대한 확신이 있는가? 내가 영은씨의 입장에 있었으면 상대의 말과 행동을 보며 1g의 든든함도 못 느꼈을 것 같은데, 영은씨는 상대가 있어 든든한가? 영은씨 역시 상대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기에 그냥 주변에서라도 잘 될 거라고 응원해줬으면 든든하겠는데, 그게 아니기 때문에 주변에서 우려하는 목소리들에 더욱 크게 흔들리는 것 아닌가? 돈을 쓰는 일에 대한 가치관이 달라서가 아니라, 두 사람의 일에 돈을 쓰는 것에 상대가 인색하며 계산적이라는 것이 영은씨의 진짜 고민 아닌가? 여기다 다시 옮겨 적는 것만으로도 상처가 될 수 있는 그 말을 상대에게 듣곤, 그 말이 잊히지 않으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상대와의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는 미래의 갈등과 문제들이 불안해서 그런 것 아닌가?
이런 이야기들을 터놓고 할 수 없고, 거기다 상견례까지 마친 지금 여전히 ‘아직 말 못한 것’과 ‘일부러 숨기고 있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 결혼 생활은 ‘서로 눈치 보며 연극하기’의 한계를 못 넘을 수 있다는 걸 기억했으면 한다. 나도 좋은 얘기만 해주고 싶고, 축복해주고 싶으며, 그냥 응원해주는 걸로 다 잘된다면 그래주고 싶지만, 식 올린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며 영은씨의 반평생이 달린 일이잖은가. ‘결혼’이라는 목적 말고 ‘결혼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꼭 열 번 이상 생각해 본 후 답을 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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