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난 이 얘기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잘 모르겠는데, 병원 갔다 온 얘기를 할 때마다 지인들은 빵빵 터졌다. 그래서 혹 웃음코드가 내 지인들과 비슷한 사람이 있을 경우
‘운정신도시엔 잼난 의사들이 있구나 ㅎㅎㅎ’
하며 잠시나마 웃을 수도 있기에 이렇게 적게 되었다. 너무 깊이 알면 다칠 수 있으니, 왜 병원을 갔는지는 비밀로 하곤 그들의 특징만 짧게 적어두기로 한다.
1.의자왕 A정형외과 의사.
우리 동네에서 가장 잘 되는 병원을 꼽으라면 난 주저 없이 정형외과를 꼽겠다. 아무래도 부근에 거주하시는 노인 분들이 많아서 그런 것 같은데, 정형외과는 갈 때마다 만원이다. 물론 정기검진 시즌의 내과는 그 어느 병원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미어터지긴 하지만, 그걸 제외하면 정형외과가 1위, 이비인후과가 2위다.
그 중에서도 진료 잘 보기로 소문난 A정형외과의 경우, 아침 일찍 문 여는 시간에 가지 않을 경우 대기실 소파에도 앉기 힘들 정도다. 난 지인이 아파서 두 번, 내가 아파서 한 번 그 병원을 찾은 적 있는데, 그때마다 의자에 거의 눕듯이 앉아선 진료를 하는 의사가 인상 깊었다. 그건 내가 의자에 편하게 기대 영화를 볼 때의 자세와 같았는데, 난 그럴 때마다
“똑바로 앉아. 그렇게 앉아서 보면 허리 다 망가져.”
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 ‘허리 다 망가지는 자세’를 정형외과 의사가 취하고 있다는 게 의아해 ‘그렇게 앉으면 허리 망가지는 거 아닌지?’라는 질문을 던져봤다. 그러자 그는
“이게 바른 자세예요. 등받이가 왜 있어요? 기대라고 있는 거잖아요. 이게 오히려 등과 허리를 편하게 해주는 자세죠. 보세요. 이렇게 앉으면 이쪽이 힘을 다 받죠? 그런데 다시 이렇게 앉으면? 의자가 다 지탱해주니까 너무 편해요. 근데 왜 이걸 사용 안 하고 몸이 힘을 다 받게 해요?”
라며 기다렸다는 듯 ‘바른자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그 자세에 대해 지적하거나 물어봐 주길, 그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에 난 오만 원을 걸 수 있다. 저 얘기로 포문을 연 의사는, 밖에 수많은 환자가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자가 좋은 의자인가?
-의자, 직구로 사면 더 싸다.
-내가 쓰는 건 국내에 열 개도 없는 제품.
-이 의자는 내 몸에 최적화 되도록 세팅해 놨다.
-의자 관련 카페가 있다. 나 거기 회원이다.
-기백만 원짜리 의자가 있는데, 나도 그걸로 업글 할 거다.
-내 의자에 앉아봐라. 이 의자의 위엄을 느껴봐라.
-이 의자 전에 내가 쓰던 건(옆 방에서 가져옴), 이거.
라며 최소 15분 이상을 침 튀기며 의자얘길 했다. 직원이 빨리 끊으라는 눈치 주려는 건지 중간부터 들어와 있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난 처음엔 ‘이게 무슨 병원용으로 납품되는 의자라 팔려고 하는 건가?’라는 의심을 잠시 했는데, 듣다 보니 그건 절대 아니었으며 그냥 자기 의자를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덕분에 의사자리에도 앉아보고, 거기서 뒤로 발라당 제쳐 보기도 했으며, 의자에 푹 빠져 카페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는 ‘물어봐 주길 기다렸던 걸 이렇게 물어봐 준 사람’을 만나 들떴는지, 자신이 사용하는 키보드, 모니터(정확하게는 모니터 거치대)에 대한 설명도 이후 10분 동안 늘어놓기도 했다. 그것들에 대해서도 역시나 예전에 쓰던 것까지를 다 꺼내 보여주며 장단점을 말해주었으며, 키보드 체험을 권하면서는
“쳐보세요. 아무거나. 어때요? 다르죠? 처음엔 적응이 좀 안돼요. 근데 나중엔 괜찮아요.”
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모니터 거치대는 ‘저렇게 막 돌려서 보여주다가 부서지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휙휙 좀 무리하게 돌려가며 자랑하기도 했다.
2.네 몸은 네 몸. B비뇨기과 의사.
그러니까 이 분은 참 긍정적인 마인드를 지녔다고 할까, 아니면 진료와 처방을 귀찮아한다고 할까. 아무튼 그런데, 우리가 나눈 대화는 대략 아래와 같다.
의사 - A가 있네요.
무한 - 안 좋은 건가요?
의사 - 뭐, 괜찮아요. 있어도 큰 문제없어요.
무한 - 치료 안 해도 잘못되진 않나요?
의사 - 뭐, 문제가 될 수 있긴 하죠.
무한 - 그럼 치료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의사 - 그냥 뭐, 괜찮아요. 있어도 문제없어요.
무한 - 방금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하셨는데….
의사 - 최악의 경우 그렇다는 거고, 보통은 문제없어요.
무한 - 제가 최악이 될 수도 있는 거 아닐까요?
의사 - 원하시면 처방해드릴 순 있는데, 뭐 이건 괜찮아요.
무한 - 처방 받으면 해결 되는 건가요?
의사 - 네 먹는 약 드시면 돼요.
그 분야의 전문가인 의사 나름의 판단으로 그런 거긴 하겠지만, 약 먹으면 ‘만에 하나 잘못되면 일어날 수 있는 문제’를 예방할 수 있는데 처방을 꺼리는 게 살짝 의아했다.
‘자기 몸 아니라고, 그냥 기분에 따라 치료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어쨌든 열심히 설득해(응?) 처방전을 받을 수 있었다. 또 난 소변이 자주, 또 급하게 마려울 적이 종종 있어 그것에 대해서도 물어봤는데, 거기에 대해서도 역시나 아래와 같은 대화로 마무리가 되었다.
(대략 어느 정도 빈도로 가는지 등을 다 이야기 한 후)
무한 - 그래서 제가 장거리 가는 걸 좀 힘들어 해요. 화장실 마음대로 갈 수 없어서.
의사 - 커피 많이 드세요?
무한 - 네? 커피요?
의사 - 네. 하루에 몇 잔 드세요?
무한 - 거의 복용하고 살아요. 커피 메이커로 두 번 내려 마셔요.
의사 - 커필 줄이세요.
무한 - 아…. 그럼 화장실 자주 가는 게 커피 때문에…?
의사 - 네. 뭐, 일단 커피 줄여 보세요.
무한 - 네….
빈뇨의 원인을 커피 탓으로 쉽게 돌리는 게 못 미덥긴 했지만 그래도 전문의이니…. 여하튼 과잉진료를 하지 않아 좋긴 한데, 그래서 혹시 결핍진료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남긴 한다. 그나저나 커피를 줄여서 확인해봐야 하는데 줄이질 못하고 있으니….
3.씩씩이. C치과 의사.
이 치과에 내 지인들도 방문한 적 있는데, 우리가 하나 같이 입을 모아 했던 얘기는
“그 의사, 안경 엄청 닦아주고 싶어. 맞지? 안경 더러운 것밖에 안 보여.”
였다. 의사의 설명을 듣기 어려울 정도로 안경이 더러운데, 거기엔 막 지문과 함께 기름막 같은 게 덧씌워지거나 벗겨진 것처럼 얼룩이 져있다. 그를 마주하고 있으면, 거짓말 좀 보내
‘저 상태로 앞이 보이긴 할까? 내 입 안을 볼 수 있긴 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때문에 지퍼 열린 가방을 메고 가는 사람이나 손톱으로 살짝 투르면 톡 터질 것 같은 종기를 달고 있는 사람을 보고 있을 때의 기분이 되며, 저 안경을 닦아주기만 해도 저 사람은 얼마나 환하고 맑은 세상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휩싸이게 된다. 아주 가까이에서 그를 보조하는 직원들도 많은데, 왜 그 직원들은 그의 안경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가 하는 궁금증이 들 정도다.
안경도 안경이지만, 그의 치명적인 매력은 콧바람에 있다. 처음 진료를 받을 때 난
‘아, 이 의사가 지금 어딜 좀 갔다가 막 헐레벌떡 뛰어와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구나….’
했는데, 그게, 진료가 끝날 때까지 멈추질 않았다.
그의 콧바람은, 얼굴에 덮어 놓은 천이 들썩일 정도로 강하다. 세심함을 요하는 신경치료를 할 때에는 더 빠르고 강해지는데, 그땐 코로만 숨 쉬는 게 힘든지 입으로 공기를 들여 마신 뒤 코로 힘껏 내뿜는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래서 흐읍- 하는 입으로의 들숨과, 크흥- 하는 코로의 날숨을 경험할 수 있다.
내가 이 얘기를 지인들에게 했더니
“그 의사 마스크 안 써? 마스크 써서 콧바람이 그렇게까지 심하게 나오진 않을 텐데?”
라고 하던데, 그건 잘 기억나진 않지만 분명 내 얼굴에 덮어 놓은 천은 들썩였다. 잠깐만, 그럼 소리는 의사가 낸 거지만 그 거센 바람은 치위생사의?! 누군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범인은 그 안에 있다.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난 사실 이 에피소드들이 재미있는지는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위에서 말한 것보다 보건소에 있는 나이 지긋하신 의사쌤과의 에피소드가 더 재미있는데, 그 분은
-넌 환자고 난 의사다. 질문은 내가 한다.
-내가 방금 말한 걸 다시 말해봐라. 이해를 했나 못 했나 확인해야겠다.
-남자끼린 길게 대화하는 거 아니다. 그만 나가봐라.
라는 포스를 내뿜으며 진료를 보시는 분이다. 상대가 몇 살이든
“내가 방금 몇 월에 다시 오라고 했어? 이거 봐. 잘 안 들었지?”
라며 반말로 함정수사? 함정진료?를 하시기도 하며, ‘네가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한 답을 난 알지만 넌 모르지. 난 이 상태를 좀 더 유지하고 싶다’라는 듯 대답 안 하고 그저 만족감에 젖어 웃고 있는 걸 잘 하신다. 더 할 얘기가 많지만, 보건소는 너무 특정될 수 있으니 이쯤 하도록 하자.
어쩌다 보니 늦게 새해인사를 드리게 되었다. 지인들과 연락하다보니 이거 뭐 새해 초하루부터 꼬였다는 지인도 있던데, 그런 일 있다 하더라도 노트 앞장 찢듯 북- 찢어 버리고는 다시 또 새 마음으로 즐거운 일들 써나가셨으면 한다. 자 그럼 난 또 밀린 사연 읽으러….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좋아요와 공감, 댓글은 여러분의 새해복이 됩니다. 많이 받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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