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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밥을 먹다 죽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by 무한 2009. 4. 5.

(이 글은 이승환님의 입사첫날 포스팅 에서 시작하여, 에코님의 [직장일기]2월19일 저녁시간 과 [직장일기]2월26일 사다리시간 으로 이어지고, easysun님의 직장일기 - 사장은 외로워 까지 도달한, 나와는 별 관련 없는 타회사의 유행포스팅을 계기로 작성되었음을 밝힌다. 그분들의 직장만큼이나, 우리 회사도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회사에 입사를 할 때, 난 제품촬영과 홈페이지제작, 쇼핑몰 제작, 상세페이지 만들기가 주된 업무로 쉽게말해 '웹디자이너' 로 계약을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인형조립, 가끔배송, 거래처 업무상담, 명함제작, 간판시안, 연탄재깨기, 개밥주기, 쇼룸청소, 불만고객응대 등의 일이 늘어나고 있다.

뭐, 이런 일이야 이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이 겪는 일 아니겠는가. 뚜렷하게 나뉜 부서로 들어갔지만, 몇 년 일하다보면 결국 잡부가 되어가는 신세.

내가 사는 곳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산 -> 도시 로 출근하는 것과 달리, 나는 일산 -> 농촌 으로 출근하고 있다. 내가 면접볼 때 부터 조만간 사무실은 도심의 오피스텔로 옮길 예정이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입사를 하니 아무도 그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이 없다. 한마디로, 낚였다.

다 괜찮다. 슈퍼를 가려면 차타고 나가야 하지만 그것도 괜찮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군부대가 있어서 가끔 훈련이 있는 날이면 아침 출근길에 교통통제를 하지만 그것도 괜찮다. 사격장에서 울리는 총소리도 이제는 초월했다. 버스가 한시간에 한대밖에 없는 동네라 가끔 회사로 올라오는 오르막에서 낫을 드신 할머니가 카풀을 요구하며 낫을 치켜 드실 때는 좀 썸뜩하긴 하지만, 그것도 괜찮다. 아직까지 아무런 사고(?)도 없었으니 말이다.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은 하나. 우리 회사에서는 점심밥을 직접 주방아주머니가 만들어 주신 다는 것이다. 흔히들 이야기 하는 '주방아줌마'와는 좀 다른분이다. 회사와 많은 시간을 같이 하신 까닭에, 좀 연로하셨다. 다른 곳 같으면 이미 정년퇴임을 하셨을 나이가 훌쩍 지나셨지만, '욕쟁이할머니' 같은 포스로 사장님도 꽉 잡고 계시다.

공기좋고 밥도 직접 해 먹는 직장 좋지 않나요?

이렇게 물어올 사람들을 위해 직장일기를 공개하기로 했다.

2008년 4월 어느 날 

출근하자 목공실의 Y차장님이 호미와 장갑을 쥐어주신다. 

"쑥이랑 냉이 캐러 가야돼"

검은 비닐봉다리 세개를 채웠다. Y차장님은 일주일 넘게 먹겠다며 좋아하신다. 오전내내 컴퓨터 한 번 못 켜고 동네 논두렁 밭두렁 다 돌아 다니며 봄나물을 캤다. 허리가 아프고 옆구리가 땡긴다. 주방아줌마가 많이 캐왔다고 칭찬하신다. 내일 또 캐오랜다. 난 웹디자이너로 입사한건데 OTL

 

2008년 5월 어느 날

난 살면서 쑥과 냉이에 대해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봄이면 먹게되는 냉이는 상큼하다고 생각했고, 일부러 쑥개떡을 사 먹을 만큼 쑥 향도 좋아했다.

한달째 반찬으로 냉이가 나오고, 간식으로 쑥개떡이 나온다.

토할 것 같다.

주방아줌마가 점심에는 쌈을 준비하시며 아무거나 초록색은 다 캐오셨다. 난 처음 보는 풀들이 많길래 아줌마에게 여쭤봤다.

"이건 무슨 풀이에요?"

"몰라. 괜찮어. 지금 나는건 다 먹어도 돼. 안죽어."

산에서 독버섯을 따다 버섯볶음을 해 먹고 응급실에 실려갔다는 뉴스기사가 생각났다.


 

2008년 6월 어느 날

회사에서 가꾸는 밭에 고추 지지대를 세우는 작업을 했다. 친구에게 이야기 했더니,

"우와, 회사에 밭도 있어? 좋겠다. 아담하고 예쁘겠네."

라고 대답한다. 더이상 말을 안꺼냈다. 회사 근처 동네사람들은 우리회사가 고추농사를 짓는 곳인 줄 알 정도로 많은 고추를 재배한다. 외국에 돈 벌러 갔다가, 농장에서 착취당한 어느 한국인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회사에서 양봉을 하면 돈도 되고 꿀도 얻을 수 있다고 양봉도 하려는 모양인데, 양봉을 시작하게 되면 회사를 그만둘까 진지하게 고민중이다.



 

2008년 8월 어느 날

회사에서 키우던 개를 잡았다. 다행히 내가 출근하지 않은 날 벌어진 일이라 그 음식(?)을 먹진 않았지만, A팀장님의 말이 귀에 메아리친다.

"애완견이라 고기가 질겨"

집에서 키우기 힘들다며 거래처 사장님이 분양해줬다는 코카 스파니엘, 출근하기가 점점 무서워 지고 있다.


 

2009년 3월 어느 날

아침 출근길에 S과장님이 죽어있는 꿩을 한마리 주워 오셨다. 상처가 없는 걸로 봐서는 무슨 일을 당해 죽은게 아니라, 나이가 들어 저절로 죽은 것 같다는 의견이 모아졌다.

점심에 그 꿩과 닭을 섞어서 만든 '꿩만두'가 나왔다.

"근데, 이거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고 균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먹어도 돼요?"

이렇게 묻자, Y차장님이 대답했다.

"먹어. 비싼거야. 밖에서 먹으면 얼만데"

K누나 한명 빼고 다 그 만두국을 먹었다. 다행히 난 아직 살아있다.



거래처 사람들이 방문할 때면 우리회사 같은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다. 사시사철 자연의 모습이 변하는 것도 가까이서 보고, 공기도 좋고, 밭에서 직접 먹을 것도 가꾸고, 평화로운 분위기 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말이다.

"하하, 그렇죠?"

예의상 대답하지만, '사..살려줘, 날 여기서 꺼내줘' 이런 말과 '다음엔 뭘 잡아먹을지 몰라' 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아무튼 아직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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