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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혈 구직 할머니와 귀농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
전에 한 독자 분께서 이런 댓글을 남겨주신 적이 있다.

"전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데요,
서른이 넘어서도 엄마랑 같이 병원에 오는 남자들 정말 어이없더군요.
멀뚱멀뚱 따라와서 대기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이름을 부르면 대답도 안 해요. 옆에 있는 엄마가 대신 대답하고,
진료실에 같이 들어가고, 처방전 타고 계산 하는 것도 다 엄마가 하더군요.
소개팅에 이런 남자가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끔찍하네요.
이 부분에 대해 따끔하게 지적하는 글도 한 번 써 주세요."



미안하지만 그럴 수 없다. 고백하자면 사실, 나도 그런 남자 중 하나다. 엄마나 공쥬님(여자친구)과 함께 병원에 갔을 때 느껴지는 그 안정감. 나 혼자 갔더라면 의사와 서먹서먹하고, 낯설고, 불편한 시간만 갖다가 돌아올 가능성이 높지만, 엄마나 공쥬님(여자친구)과 함께 병원에 가면 그렇지 않다. 

엄마의 경우 가족력을 모두 소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TV나 잡지, 각종 입소문을 통해 알게 된 병명들을 나열하며 나에 대한 '엄마 소견서'를 제출한다. 공쥬님의 경우 내 아픔을 증폭시켜 의사에게 전달해 준다. 훗날 아이를 낳으면 '엄마 소견서'를 써야 할 입장이어서 그런지, 내 아픔과 관련해 의심되는 다양한 질병들에 대해 의사에게 자문을 구하며 의학적 지식을 축적하기도 한다. 

이렇게 써 놓으니까 내가 무슨 기생충이 된 듯 보이는데, '기생'은 아니고 '공생'이다. 엄마나 공쥬님이 아플 경우엔 내가 보호자가 된다. "아프면 병원 가 봐."라는 딱딱한 말만 오가지 않는다는 게, 때로는 참 감사한 일이다.(물론 매번 빠짐없이 병원에 함께 가는 건 아니다. 서로 시간이 맞지 않거나, 증세가 가벼운 질환일 경우엔 각자 병원을 찾는다.)
 
며칠 전부터 손에 좁쌀만 한 붉은 뾰루지들이 보이더니, 시간이 지나며 녀석들이 옆으로 점점 옮기는 것 같아 병원을 찾았다. 의사에게 손을 보여주며 옆으로 옮기는 것 같다고 했더니, 잠깐 보기만 해도 알 정도로 흔한 증상인지, 별 설명 없이 연고를 처방해 준다고 했다. 48초 정도 대화를 나눈 것 같다.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아 약국을 향해 걸어가며 생각했다. 엄마나 공쥬님과 함께 왔으면 적어도 4분은 대화했을 거라고. 왜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지, 이 증상의 이름은 무엇인지, 혹시 다른 사람에게 옮기는 건 아닌지, 수건을 같이 써도 되는지, 일반적으로 며칠 정도 연고를 바르면 증상이 사라지는지 등을 빠짐없이 물었을 것이다. 


1. 열혈 구직 할머니


약국엔 약을 지으러 오신 할머니들이 많이 계셨다. 난 처방전을 내곤 순서를 기다리기 위해 의자에 앉았다. 내 옆의 할머니께서 신문을 열심히 읽고 계시길래, 무슨 신문인가 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구인구직과 생활용품 매매 정보 등이 있는 생활정보지였다. 70이 훌쩍 넘으신 듯한 할머니께서 생활정보지를 보고 계신 게 좀 의외였다. 그것도 굉장히 몰입해서 읽고 계셨다. 난 할머니의 심각한 표정을 곁눈질로 힐끔 쳐다봤는데, 그러다가 할머니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할머니 - 왜?
나 - 아, 아뇨.

 

몰래 쳐다보려던 것이 민망해 난 폰을 꺼내 뭔갈 하는 척 했다. 할머니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할머니 - 나 취직할라고. 
나 - 예? 아, 네. 
할머니 - 왜? 난 취직하면 안 되나?
나 - 아뇨. 하셔도 되죠.
할머니 - 왜 이렇게 취직하기가 힘들어?
나 - ......



난 지금 할머니께서 보고 계신 면이, '중고 자동차' 면이라는 걸 알려드릴까 하다가 그냥 가만히 있었다. 할머니 친구이신 듯한 다른 할머니께서 약을 타 오시며,  앉아 계신 할머니께 가자고 말했다. 

약탄 할머니 - 얼른 가. 갔다가 우리 수요일 날 또 와야 돼.
취업 할머니 - 수요일? 수요일 날 왜?
약탄 할머니 - 그때 피 조사 한 거 나온다잖어. 
취업 할머니 - 조사가 한참 걸리네.

 

'조사'가 아니라 '검사'라고 말씀드릴까 하다가, 그냥 또 가만히 있었다. 사실 난 당시 할머니께서 "왜 이렇게 취직하기가 힘들어?"라고 하실 때부터 웃음을 참고 있었는데, '피 조사'에서 빵 터지고 말았다. 실례가 될까봐 기침하는 척 하며 웃음을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나만 웃음을 참고 있던 건 아니었는지, 할머니 두 분이 약국을 나가자, 내 옆에서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약사 아주머니도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내가 약국에 오기 전 할머니 두 분께서 아이폰 얘기를 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주셨다. 열혈 취업 할머니께서 조만간 좋은 회사에 취직하시길 바라본다. 


2. 귀농 할머니
 

올 3월,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난 거실 쪽 발코니에 나가 카메라를 들고 ts렌즈 효과를 내기 위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파트 단지 울타리 부근에서 열심히 땅을 일구고 계신 할머니를 보게 되었다. 할머니는 호미질을 하고 계셨는데, 큰 돌을 골라내 (울타리 내)배수로 바깥으로 던지셨다. 그러니까 배수로와 울타리 사이에 있는 일 미터 남짓한 땅을 길게 일구고 계셨던 것이다. 

난 흥미를 느껴 매일 그 시간에 그곳을 내다 봤다. 며칠 후엔 거실 쪽 발코니에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고, 내 방 쪽 발코니에 나가 고개를 내밀어야 보일 정도까지 할머니가 땅을 일구셨다. 며칠이 더 지났을 땐 할머니를 볼 수 없었다. 할머니가 일구신 그 땅 앞쪽에는 빨간색 글씨로 쓴 '농작물 경작금지'라는 현수막만 걸려 있었다. 

훗날 농작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당연한 조치지만, 할머니께서 열심히 땅을 일구신 노력이 좀 안타깝긴 했다. 여하튼 할머니에 대해선 잊어가고 있던 어느 날, 새벽 두 시쯤 '서걱서걱'하는 소리가 들렸다. 밖을 내다 봤더니 그 할머니가 계셨다. 할머니는 주위를 살피며 화단과 계단 사이에 뭔가를 심고 계셨다. 서둘러 일을 마치신 할머니는 금방 자리를 뜨셨다. 난 눈으로 할머니를 쫓았다. 할머니께선 다른 동 부근으로 가 또 서걱서걱, 뭔가를 하나 심으시더니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셨다. 

'저, 저건, 경비아저씨들이 모두 퇴근한 시간을 노린 거야...'


할머니는 며칠간 경비아저씨들의 동선을 파악하셨을 것이다. 발코니에서 내다보거나, 혹은 어딘가에 숨어 '마지막 순찰은 이 시간이군.', '다시 출근할 때 까진 4시간이 비어.', '카메라는 놀이터에 하나, 단지 입구에 하나닷!', '최대한 티가 나지 않도록, 우연히 자라난 것처럼 보이게 심는 거야.' 등의 생각을 하신 뒤, 행동에 옮기신 것이다. 그 즈음 나도 '아파트 화단 부근에 몰래 허브씨를 뿌리면 어떨까. 그럼 알아서 자랄 거고, 다 자라면 나는 잎만 좀 따면 되는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동지를 만난 듯 반가웠다. 

그 이후 아직까지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막 키를 키우고 있는 작물들이기에, 화단의 다른 식물들과 어울려 눈에 띄지 않게 자라고 있다. 할머니의 '뻐꾸기 작전'은 성공했다.(뻐꾸기는 지빠귀나 때까치의 둥지에 알을 낳는데, 지빠귀나 때까치는 그 알이 자기 알인 줄 알고 키운다.) 오늘 보니, 날이 가문 까닭에 조경업체에서 나와 화단에 물을 주고 있던데 인부 아저씨들도 눈치를 못 챘는지 차별 없이 할머니의 작물에도 물을 주고 있다. 

고비는 다음 달쯤 찾아올 것 같다. 고만고만한 화단의 식물들과 달리 할머니의 작물은 시간이 지나며 눈에 띄게 된다. 울타리에 호박이 매달려 있다거나, 조팝나무 군락 옆에 고구마 줄기가 보인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가끔 찾아오는 '잡초제거반'도 문제다. 한 무리의 아주머니와 아저씨들이 화단에 들어가, 본래 있어야 할 식물들을 제외하곤 모조리 뽑아 버리니 말이다. 할머니께서 무사히 작물을 수확하시길 바라본다. 


이대로 이야기를 마무리 하면 뭔가 정이 없는 느낌이니, 보너스로 요즘 키우고 있는 허브와 미나리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칠까 한다. 




▲ 요즘 키우고 있는 허브와 미나리.


위로부터 세 번째까지는 '페퍼민트', 네 번째는 '카모마일', 다섯 번째는 '애플민트', 여섯 번째는 '레몬밤',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는 '돌미나리' 사진이다(돌미나리는 보름만에 저렇게 자랐다.). 각각의 용도는 아래와 같다.

페퍼민트 - 식용(차, 칵테일)
카모마일 - 꽃잎으로 베개 만들기. 실패하면 식용(차) 
애플민트 - 식용(차, 칵테일)
레몬밤 - 식용(차)
돌미나리 - 식용(녹즙)



지금 파종하면 가을 쯤 맛있게 먹을 수 있으니, 끌리시는 분은 허브 화분 하나 들여 놓으시길 권한다. 블링블링한 후라이데이가 하루 남은 오늘, 무사히 잘 버티시길 바라며. 



▲ 미나리는 보름간 저렇게나 자랐는데, 난 보름간 얼마나 자랐나. 나도 물 좀 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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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2012.06.22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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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알같은 에피소드네요!ㅋㅋ 어르신들께 이런 표현은 실례지만, 할머니 귀여우세요ㅎㅎ 외할머니 생각나서 웃으며 봤네요.
무한님 허브 소식도 반가워요:) 예쁜 것이 식용도 되니 저도 하나 들여볼까봐요. 오늘도 감사히 읽고갑니다-

빛창2012.06.22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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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를 세우신 할머니에게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요즘 젊은사람들 중엔 꿈도 목표도 없이 그냥 반복되는 삶을 사는 경우도
있는데 그 연세에도 오히려 나는 하면 안되냐는 반문으로 자신있게 취업을
알아보시는 자체가 너무 멋져보이세요~^^

ejsl2012.06.22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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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 '나도 나중에 구직 할머니가 되면 어쩌나..'살짝 불안했네요.
요트 타고 남태평양 바다위를 떠 가지는 못할 망정 말입니다 ㅋㅋ
담주엔 평안이 찾아왔으면....

피안2012.06.22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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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기 물~ ㅋㅋ
쑥쑥 자라세요

ann2012.06.24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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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네요. 귀여운 할머니 두분^^

엄마미소2012.06.2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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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번째 돌미나리!
슬며시 본 사진이네요~~^^



...하지만 난 그게 돌미나리인 줄은 몰랐지. 미안해, 돌미나리야.


++ 저는 방앗잎 맛있게 잘 먹으면서도, 방앗잎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잘 몰랐네요. (잠깐 문법을 논하며 '잘 알지 못했네요'라고 적으려다가, 아무래도 그렇게는 못 적겠어서 그냥 버릇대로 적습니다 ㅎㅎ)

소마님의 관찰력에 오오-! 하며 어제 추천을 눌렀고,
이 글에 다양한 의견을 나눠주신 분들 글에도 조금씩 다 공감하다가..
오늘 컴으로 새로 들어와서 realrosty님의 댓글을 보고는 끄덕끄덕 종합세트와 함께 울컥- 하고 갑니다.
마지막 문장이 특히 와닿네요.

// 어제 무한님이 댓글에서 추천해주신 책 말고도 예전에 추천해주신 책들이랑..
뭣보다 노멀로그에 오면서 무한님을 통해 알게 된 성석제 작가 책을 얼른 보아야겠는데,
더운 날 최고의 피서지인 서점은 물리적으로 멀기만 해서 통 갈 수가 없네요.
북큐브에 그분 소설 하나 나왔던데, 조만간 그 책부터 냉큼 사 읽어야겠습니다ㅎㅎ

미미미2012.06.26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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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좋네요. 좋아요...

안녕하세요2012.06.26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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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브를 사랑하는 동지군요!! ㅋㅋㅋ

작년에 키우던 허브는 잘 먹고, 죽었어요;;;;

전 로즈마리랑 애플민트, 바질을 키웠는데요.

무순 심어서 잘라 비빔밥 해먹으니 넘 좋더라구요 ㅎㅎㅎ

김군2012.06.27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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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계신 할머니 심심허지 않으시게 더 말동무 해드려야겠네요ㅎㅎ 그나저나 저 허브 탐나네요 나도 뽑아서 비빔밥먹어봐야지

Linezolid2012.07.02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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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님! 오랜만이에요ㅎ

저도 허브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 했었는데!
아직 실행으론 못 옮기고 있어요.
올 가을에 햇빛 잘 드는 집으로 이사 예정인데
그러면 음지식물말고 허브도 키워보고 싶네요 ^_^

전 차보다는 요리에 활용할 수 있는 바질을 키워보고 싶은데
무한님 글이 의욕의 불씨에 입김을 불어넣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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