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연, 오늘 아침부터 부여잡고 참 많이 고민했습니다. 짧게 정리하면
- 두 금사빠의 굵고 짧은 한 달 연애.
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렇게만 적어두면 감수성 풍부한 L양이 충격과 공포에 빠질 것이 분명합니다. L양에게 이 연애는 닮은 사람과 깊이 빠진 운명적인 것이었으며, L양은 상대가 한 모든 행동을 '진심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들이라 여기고 있으니 말입니다.
전 청어인지 삼치인지 하는 생선을 먹지 않습니다. 가시가 너무 많아서 발라 먹기가 힘들거든요. 둘 중 어느 생선인지 정확하지 않은데, 여하튼 그걸 구별하는 것도 일이고 해서 그냥 둘 다 먹지 않습니다.(응?) L양의 사연도 L양의 의미부여와 감성이 잔가시처럼 사연을 감싸고 있어서 발라내기가 참 힘들었습니다. 이건 잔가시 걷어내고 큰 뼈대만 보는 작업이니, 폄하한다거나 가볍게 말한다 오해하진 마시고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1. 의미를 부여하면 원나잇도 아름다울 겁니다.
상대의 연락처도 모르는 상황에서, 만난 첫날 스킨십 진도를 거의 마지막까지 나가는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차원적인 연애'를 추구하신다는 L양의 입장에서 보자면, 저건 그저 본능에 충실한 사람들의 가벼운 연애처럼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L양의 이번 연애에서도 저런 모습이 나옵니다. 뭐, L양이나 저나 사람인 까닭에 남이 하면 뭐처럼 보여도 내가 하면 로맨스처럼 보이는 것이겠습니다만,
"'얘기'가 아닌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 우리는 그 정도로 잘 맞았습니다."
라며 무거운 의미를 부여하시기 전에, 한 발 물러서서 이번 연애를 객관적으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L양이 의미부여 한 것을 걷어내고 나면, '고차원적인 연애'라는 것과는 상당히 먼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L양이 말하는
"정말 저와 맞는 사람이 나타난 거라고…."
"순간적으로 엄청나게 그에게 빠져들었고, 마음을 다 열었으며…."
"사랑한다고 완전히 믿었으며…."
라는 부분들을, 저는 '연애에 올인 하는 금사빠 대원들의 변명'에서 자주 봅니다. 그 대원들은 자신이 만든 상상의 옷을 상대에게 입혀 놓고는
"봐봐요. 저 사람이 제가 꿈꾸던 사람이에요. 제가 원하던 사람과 완전히 일치해요. 이건 운명적인 거예요."
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또, 그렇게 믿곤 열렬하게 연애하다, 헤어지고 난 후엔
"정말 모든 면에서 저랑 잘 맞고 운명과도 같았던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된 건 왜 때문이죠?"
라는 질문을 합니다. 저는 늘 "말 보다 행동을 보세요.", "말(馬)은 타봐야 알고, 사람은 겪어봐야 아는 겁니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 대원들은 이미 상대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채 100점 만점에 200점을 부여한 까닭에 대화를 나누기가 어렵습니다. 상대는 완벽한 사람이고, 상대와의 연애 역시
"거짓말 같지만 우리가 다투거나 부정적인 상황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라는 이야기를 할 정도로 완전무결한 것으로 여겨지니, 제가 겉으로 드러난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면 "네가 우리 사랑에 대해서 뭘 알아? 운명적 사랑을 잘 알지도 못하는 놈이!"라는 반응이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싸우자!
2. 진심이 아니라면 절대 할 수 없는 행동들?
전 새벽 1시에 물고기를 입양 받으러 간 적 있습니다. 보통 그런 상황에서는 다음 날 분양약속을 잡기 마련인데, 분양해 주시는 분이나 저나 둘 모두 성격이 급했던 까닭에, 뻘건 눈을 한 채 만나 새벽 세 시까지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그 분은 저보다 성격이 더 급하신 까닭에, 살면서 택배로 물건을 주문해 본 것이 손에 꼽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 기다림이 싫어 파주에서 수원까지도 차를 몰고 다녀오신다고….
이렇게 성격이 급한 두 사람이 만나면 밤이든 새벽이든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금사빠 두 사람이 만나면 사랑에 빠지는 건 일도 아니게 됩니다. 서로 아직 통성명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이런 감정은 처음 느낀다며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오늘 만나 사귀기로 한 직후부터도 보고 싶어서 잠을 못 잘 것 같다며 달콤한 이야기들을 주고받기도 합니다.
금사빠 대원들은 이걸 '운명적이었다'라든가 '정말 잘 맞았다'고 말하는데, 제 입장에서 보자면 이건 그냥 두 사람이 다 금사빠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랑에 빠진 것에 불과합니다. L양은
"그동안 그가 했던 행동을 되짚어 보면, 진심이 아니고서야 정말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는 거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데, 그것 역시 제 입장에서 보자면 상대가 그냥 본능에 충실하며 강한 추진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사람 중에는 '연애하며 내가 이런 짓까지 해봤다'라는 것 자체에 자부심을 가지고 행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L양이 만난 사람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만 해도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추진력과 적극성으로만 따지자면, 집착의 병을 앓고 있는 대원들을 따라가기 힘들 겁니다. 그들 중에는 짝사랑하는 사람의 집 앞에서 밤을 새는 사람도 있고, 상대가 아프다는 걸 알곤 두 시간 거리를 달려가 상대 현관문 문고리에 죽 봉지를 걸어두는 사람도 있으니 말입니다. 이런 행동들을 폄하하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이걸 그저 '애정의 크기'로만 단순하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저는 하고 싶습니다.
'지금 당장 날 위해 어떤 일까지 할 수 있는가?'만을 보는 건 좀 위험한 일입니다. 그럴 경우 연애가 고픈 남자, 또는 당장 여자가 필요한 남자들이 더욱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으니 말입니다. 못 믿겠다면 내일 새벽 2시쯤 온라인 채팅방이나 만남어플에 들어가 '저 너무 힘든데 지금 술 한 잔 사주실 분?'이라는 제목으로 방을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L양에게 오는 데만 두 시간 넘게 걸리는 지역에 사는 사람 중에서도 온다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런다고 해서 그걸 전부 '진심이 아니고서야 정말 할 수 없는 행동'으로만 해석하기는 좀 무리인 것 아니겠습니까?
죄송하지만, 역시 제가 보기에 상대가 했던 행동은 '전력질주'에 가깝습니다. 이건 금사빠나 바람둥이 남자들이 환심을 얻기 위해 펼치는 장기이긴 한데, 공통적으로 이들에겐 지구력이 떨어집니다. 제가 주문한 물건이 택배로 도착하기 전까진 계속해서 운송장 번호 조회를 하며 택배 차가 왔나 창밖을 내다보지만 막상 물건을 받고 나면 그냥 팽개쳐 두는 것과 비슷하게, 그들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거나 흥미를 잃고 나면 어제까지 사랑한다고 말하던 것과 달리 소 닭 보듯 하기도 합니다. '새로운 여자'가 이상형이었던 까닭에 이상형을 향해 열렬히 들이대지만, 익숙해지고 나면 새롭지 않기에 등을 돌리는 거라고 할까요. 제로백 보다 수십만 배 중요한 게 지구력이라는 걸 잊지 마셨으면 합니다.
3. 선수인 남자에게 놀아난 걸까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연애를 하던 중 L양에겐 좀 의구심이 들지 않았습니까? 남친이 L양을 여자라서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L양이라서 좋아하는 건지에 대한 부분 말입니다. 처음엔 그냥 남친이 맹목적으로 잘 해주고 좋아해주니 마냥 기뻤지만, 시간이 갈수록 얕아지는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불안했고, 남친에게 그것과 관련된 질문도 했고 말입니다.
L양이 그 부분에서 의문을 가졌던 것처럼, 남친은 L양과의 관계에서 처음으로 '부정적인 질문'이 나왔다는 것에 환상이 깨진 것 같습니다. 그가 원하던 여자는 자신이 잘 해주면 세상 어디까지라도 군말 없이 따라와 줄 여자였는데, L양이 부정적인 질문을 하자 더는 L양과 함께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해하긴 어렵겠지만, 그런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진정한 연인이라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무조건 웃고 행복하고 즐거워야 한다는 판타지를 가진 사람들 말입니다.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혼자 앓고 말거나 억지로라도 괜찮은 표정을 지어 보입니다. '단 한 번도' 부정적인 질문이 오가거나 다툴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겁니다. '절대 행복'을 목표로 삼고 있기에, 다투다 상대가 화를 내며 집에 가 버리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영영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 할 이유로 삼는 경우도 있습니다.
연애 초반 급격하게 정이 증폭되고 사랑한다는 이야기가 금방 튀어나온 것과 비슷하게, 말기엔 한 순간의 일로 오만 정이 다 떨어져 버린 거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빨리 달아올랐던 것만큼 빨리 식는 겁니다. 금사빠 대원들 중엔 이런 독특한 태도를 보이는 대원들이 종종 있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하나부터 열까지 알아서 다 해주다가 어느 날 상대가 작은 거 하나 부탁하면 그걸로 빈정상해 관계의 끈을 놓는 경우도 있고, 언제든 기대라고 계속 유도해 놓고는 상대가 정말 기대면 힘들다며 일어서서 가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때문에 이들과 급격하게 사랑에 빠지는 건 정말 쉬운 일인데, 그것만큼 어이없도록 쉬운 이별을 겪게 되기도 합니다.
L양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대화를 요청하자, 그는
"이런 대화를 하며 감정소비 하기 싫다."
라며 입을 닫아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 사람과는 희로애락을 함께 못 하고, 희희락락만 가능한 거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결혼 적령기에 만나 남 부럽지 않은 연애를 하던 중, 여자가 결혼에 대한 현실적인 얘기를 꺼내자
"넌 날 믿고 따르면 되는 건데, 날 믿지 못 했다. 내가 잘 되면 알아서 잘 할 건데, 너는 의무를 부여하려는 듯 내게 말을 했다. 난 의무적인 결혼은 하기 싫다."
라며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이별을 통보한 사례도 있습니다. 위 사례의 남자는 그냥 자신의 명령에 잘 따르고 꼬리나 열심히 흔드는 '애완견' 같은 상대를 원했던 거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사연 중엔, 이쪽에서 계산을 하려 하면 자신이 가로막으며 못 하게 했으면서, 나중에
'얜 정말 뻔뻔하네. 돈 지가 낼 것도 아니면서 어디 가고 싶다, 뭐 먹고 싶다 말만 잘 하네.'
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처음엔 그냥 다 주고 싶은 마음에 본인이 낸 것이기도 하고, 또 얻어먹으면 모양 빠지는 거라고 생각해 우겨가면서까지 자신이 계산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카드 고지서를 받아들고 난 뒤엔 버겁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 쪼들리는 와중에 같이 좀 냈으면 좋겠는데 그걸 말하기엔 자존심이 상해 안 말했던 것입니다.
조율해야 할 부분을 말도 안 하고 한쪽에서 꿍하고만 있는, 이런 일들이 꽤 많은 커플들에게서 일어나곤 합니다. 전 L양 커플의 이별사유에도 위와 같은 문제가 포함되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한 쪽이 일방적으로 부담하는 게 당연한 듯 여겨지고 있고, 또 큰돈을 쓸 때 일단 남자 카드로 하고 나중에 정산하기로 했는데 나중에 여자가 정산하겠다는 말 안 꺼내면, 정이 떨어질 때 가중처벌 될 수 있습니다. 다음 연애를 하실 때에는 상대가 돈 쓰는 걸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보고만 있지 마시고, 주기로 한 돈은 제때 바로 정산해서 주며, 상대가 거절해도 일단 부치시길 권합니다. 돈 얘기하면 쪽팔린 거라고 생각해 돈을 빌려가면서까지 데이트 비용을 대다, 마음 정리 서서히 끝내고 두 손 다 들어버리는 사례도 있으니 말입니다. 자 그럼 이번 연애는 이것으로 말끔히 설명 되었을 것 같으니, 툭툭 털고 하반기엔 새로운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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