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L씨를 놀래키기 위해 일부러 멱살을 잡을 때도 있다는 부분에서 빵 터졌다. L씨가 모임 끝나고 먹을 걸 준비해 갔을 때,
L씨 - 이거 먹을래?
그녀 - 아니.
라며 쿨하게 거절하는 부분에선, 시트콤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고, 그것 외에
L씨 - 이거 먹을래?
그녀 - 나 지금 그거 먹으면 쫙쫙 쏟아.
라고 대답하는 장면도 있던데, 확실히 그녀는 거침없으며 직설적이고, 또 이성을 대하는 것을 전혀 어려워하지 않는다. 더불어 L씨가 모임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자폭하려 들자, 그녀는
"야, 너 정도면 괜찮지. 넌 자신감을 좀 가져. 그래도 돼! 매력 있어!"
라며 '힘내 인마!'식의 으쌰으쌰도 해주었는데, 그런 모습에 L씨가 완전히 반한 것 같다. 그래서 현재 L씨는 그녀를 짝사랑하는 중이며,
"그녀가 좋고 자꾸 생각이 납니다. 그녀와 사귀고 결혼하면 그게 바로 천국이겠구나, 정말 행복하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L씨의 이런 꿈과 희망을 깨고 싶진 않지만, L씨도 삼십대고, 애먼 오해와 착각 속에 오래 머물면 곤란해질 수 있기에, 상황을 바로 볼 수 있는 매뉴얼을 준비했다. 출발해 보자.(아, 서두의 '놀래키기'는 '놀래기'라고 써야 한다는 걸 알긴 하는데, 아무래도 '놀래기'라고 하면 어색해서 저렇게 적어두었다는 걸 밝힌다.)
1. 외향적인 그녀를 좋아하는데요.
외향적이며, 이성을 대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여자들이 있다. 내 지인 중에도 내가 "너 닮은 연예인? 조혜련?"이란 얘기를 했다가 지금까지 연락을 끊고 사는 지인이 있는데, 그녀는 이십대 초반부터 약간의 아줌마스러움을 내보이며 이성을 대하는 것에 거침없었다.
붙임성이 얼마나 좋은지, 그녀는 레프팅인가 리프팅인가를 하러 갔다가 그곳의 안전요원으로 있는 남자와도 친해지고, 관광지에 가선 해설사와도 친해져 돌아왔다. 사실 그녀는 핑클의 이진을 닮았던 까닭에 이성들로부터 종종 대시를 받기도 했다. 내가 조혜련을 닮았다고 한 것은, 팔다리가 몸에 비해 짧고 아줌마스러운 느낌이 살짝 있어서 그랬던 건데, 이걸 자세히 설명했다가 혹시나 그녀가 이 글을 보게 되면 큰 충격을 받을 수 있으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자. 현재 그녀는 아이 키우며 잘 살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녀를 좋아하는 남자들 중엔, 대개 이성으로부터 그만큼의 적극적인 들이댐을 경험해 본 적 없는 남자들이 많았다. 그녀는 술자리에 온 남자가 낯을 가리고 있으면, 처음 본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한규 심심하겠다. 아까부터 맥주만 홀짝이고 있어. 자 여기, 안주라도 먹어."
라며 그를 챙겼다. 그녀는 거의 모든 사람들을 그렇게 챙겼는데, 그걸 처음 경험하는 남자는
'쟤가 나 좋아하나?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건가? 안주까지 챙겨주네? 뭐지?'
하며 진지한 오해를 시작하고 말았다. 그래서 같이 영화를 보자든가 밥을 먹자며 데이트 신청을 하기도 했는데, 그녀는 "애들한테 말해봐. 애들하고 같이 봐야지. 누구누구도 부르자."라는 식으로 '다 함께'의 분위기로 상대의 관심을 희석했다.
그녀는 같이 어울리던 친구가 이별을 하면 "야 원래 네 여자친구 좀 별로였어. 네가 아까웠어."라며 위로를 해줄 줄도 알았고, 썸을 타는 친구가 있으면 자신이 도와주겠다며 고백 때 내밀 선물도 함께 골라주곤 했다. 그런 '보통의 여자와 다른 모습' 때문에, 그녀에게 반하는 남자들도 있었다. 그녀는 그냥 으쌰으쌰 해주기 위해 응원해 준 것인데, 상대는 '쟨 나에 대해 저렇게 좋은 평가를 하고 있구나'하며 자신이 고백할 경우 사귀게 될 것이라 착각했던 것이다.
난 L씨가 딱 위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는 거라 생각한다. 현재 L씨는
- 그녀는 이제 남자를 볼 때 조건을 별로 안 따질 거라는 식으로 말했다.
- 모임에서 내가 내 단점을 말했을 때, 그녀는 나 정도면 매력 있는 거라고 말해줬다.
- 아는 척 하기 어려워서 그냥 지나갈 때, 그녀가 먼저 아는 척 해준 적 있다.
라는 것들을 근거로 '그린라이트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하아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할까? 내가 평소
"여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주는 남자보다, 자신이 상상도 하지 못 한 것을 경험하게 해주는 남자에게 더 끌리기 마련입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L씨의 경우는 저 두 가지에도 해당되지 않은 채 오히려 본인에 대한 부정적인 얘기를 했을 때 상대가 긍정적인 말로 반박해 주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본인 - 진짜 이제 뭐 먹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개인 사업을 해보고 싶은데….
친구 - 뭘 하든 열심히 하면 잘 될 거야. 우린 젊으니까, 도전해 봐.
라는 대화 후, 곧바로 "그럼 너, 나랑 동업할래?"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 할 수 있겠다.
뭔갈 해보기도 전에
"제가 시간 좀 내달라고 하면, 마음 있으면 시간 내 줄 거고 아니면 적당한 핑계 둘러 대겠죠. 거절하더라도 제가 상처 받을 거 생각해서 최대한 좋게 거절할 거고요."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남자는, 솔직히 아무 매력이 없다. L씨는 본인의 내면이 착하다는 것을 내세우면 가능성이 있지 않겠냐고 내게 물었는데, 내면이 아무리 착해도 여자가 계속 자신감을 심어줘야 하고 응원해줘야 하고 알아서 먼저 다 해줘야 하는 어린 애 같은 남자라면, 여자 입장에선 그게 '연애'가 아니라 '육아'에 더 가깝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건 너무 현실적으로 말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긴 한데, 그녀가 L씨를 챙겨주는 건, 그 모임의 임원인 까닭에 회원인 L씨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너무 솔직히 말해서 미안하다. 그런데 이 얘기를 안 하면 L씨가 계속 '개인적인 호감'이나 '가능성'으로 오해할 수 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오늘부터는 그녀의 긍정적인 말 한 마디를 주워 담으며 그것으로 겨우 자신감을 더하는 태도보다는, L씨가 그녀를 칭찬하거나 그녀에게 힘을 주는 것에 좀 더 집중했으면 한다.
2. 성향이 다른 것 같다는 이유로 끝난 썸.
재형씨, 이건 방법이 없는 것 같아. 남자인 내가 봐도 재형씨는
'오글거림 기능장, 부담전달 전문가, 아기자기 판타지 산업기사'
인 것 같거든. 총체적 난국이야. 재형씨 스물두 살 아니고 서른두 살인데, 연애와 관련해선 스물두 살인 것처럼 행동해. 얼른 막 사귀고 싶고 사랑한다는 얘기 듣고 싶어서 안달이 난 그런 태도 있잖아. 딱 그런 태도로 상대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거든.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 좋을지 모르겠는데, 일단 순서대로 풀어볼게.
"야근하라는데 전 그냥 갈 거예요. 약속 있다고 하고 나갈 거예요. 오늘 민희씨 안 보면 저 죽을 듯 ㅋㅋㅋ"
"민희씨는 부담 없이 약속 깨셔도 돼요~"
"주말에 출근한다고 했죠? 저도 주말에 출근하려고요. 민희씨도 보고... ^^"
난 읽기만 하는데도 부담스러워. 만나러 나올 거면 그냥 나온다고 하면 되는 거고, 주말에 시간 있냐고 묻고 싶으면 그냥 물으면 되는 건데, 재형씨는 한 벌 돌려서 말하거나 쓸데없이 생색을 내려 하거든. 친구들이 모이는 자리기가 있는데 거기 참석 안 하고 나오는 거면, 그냥 몇 시에 어디서 보자고 약속을 잡으면 되는 거야. 그런데 재형씨는 그걸 다 말해. 사실 어디 가야 하는 건데 그거 취소하고 가는 거다, 라는 식으로. 몸이 아픈데 나가는 거다, 할 일 있는데 나가는 거다, 쉬는 날인데도 보러 나가는 거다, 하면서. 딱 보니까, 재형씨의 그런 태도에 여자도 짜증이 났어. 그래서
"아니요. 그러지 마세요. 제가 부담스러워요. 일 하세요."
라고 반응하거든. 그럼 재형씨는 사실 그게 그냥 생색내려고 했던 말이었으니까, 얼른 '그런 건 아니고 나갈 수 있는 거다'라는 식으로 말을 바꿔. 이거, 괜히 쓸 데 없이 힘 빼고 상대만 짜증나게 만든 거잖아.
그리고 재형씨는 즉흥적인데다, 확실하지 않은 얘기를 종종 해.
"민희씨...제가 지금 가면, 잠깐이라도 볼 수 있을까요?"
이래 놓고는
"오늘... 못 볼 것 같네요. 갑자기 일이 생겨서 ㅡㅡ; 지금 일 보러 가고 있어요."
라고 말하지. 재형씨, 확실하지 않으면 승부를 걸지 마라, 뭐 이런 거 안 배웠어?(응?) 그러니까 이게, 두 사람 다 즉흥적일 경우엔 '생각지도 못했던 만남의 기쁨'이 될 수 있어.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계획적인 걸 더 선호하는 사는 사람 입장에선 그냥 '거절해야 하는 부담'이 될 수 있거든. 상대가 재형씨에게 '우린 성향이 좀 많이 다른 것 같다'고 한 건, 이런 부분에서의 마찰이 있었던 것도 한 몫 했을 거야.
또, 재형씨는 말을 놓은 이후에도 계속
"데리러 갈게 ^^"
"내가 이따가 선물 줄게 ㅋㅋ"
"보고 싶으니까 ㅋㅋㅋㅋ"
라며 트랜스 지방이 들어있는 듯한 멘트를 던지거든. 이게 좀 그래. 게다가 상대가 됐다고 하는데도 재형씨는 집요하게 계속 물어보잖아.
재형 - 오늘 퇴근할 때 데려다 줄까? ㅎㅎ
상대 - 아냐. 나 퇴근 좀 늦어질 것 같아.
재형 - 나도 오늘 할 게 많아서 좀 늦어질 것 같긴 해 ㅎㅎ
상대 - 아냐. 오늘은 그냥 혼자 갈게.
재형 - 음, 그럼 이따가는 마음이 바뀔 수도 있으니 이따 다시 연락해 볼게^^
상대 - 나 오늘은 그냥 혼자 집에 가고 싶어 ㅋ
재형 - 알았어 그럼.
(몇 시간 후)
재형 - 진짜 안 데려다 줘도 괜찮아? 내가 마음이 쓰여서 그래….
상대 - 아냐ㅋ 괜찮아 ㅋ
재형 - 왜? 초췌해서?
상대 - 나 이제 퇴근.
재형 - 버스타고 갈 거야? 아니면 내 차 타고 갈 거야? ㅋㅋㅋ
상대 - 버스.
재형 - 그래 ^^ 조심해서 빨리 가 ^^
괜찮다는데 몇 번을 다시 묻는 거야? 재형씨의 저런 태도는 썸 타는 내내 이어져서, 나중엔 아예
재형 - 내가 데리러 간다고 하면 혼나겠지? ㅠㅠ ㅋㅋ
상대 - 응.
재형 - 알았어 ^^
재형 - 집에 가서 잘 들어갔다는 카톡만 남겨줘. 걱정돼 ^^
라는 상황으로 변하더라고. 이러면 이거, 노답인 거잖아. 계속 만남을 구걸하는 모양이 되고 말았어. 목요일 토요일 둘 중 어느 날 괜찮냐 물어본 뒤 딱 약속을 잡으면 되는 거야. 그런데 재형씨는 그러질 못했지. 그리고 줏대 없이 계속 망설이면 곤란해.
"아, 그럼 영화는 다음에 볼까? 그냥 한강 걸어? 아니면 다른 거 할래? 볼링 칠까? 아니다 그냥 영화 보는 게 더 나을 것 같기도 하고…, 뭐 할까?"
이런 식으로 갈팡질팡 하지 말고 딱 정해야 한다고.
이거 얘기가 너무 길어지는 것 같은데, 하나만 더 말할게.
"나는 너 괜찮을 때 맞춰서 쉬어도 되니까 너 편할 때로 맞춰서 같이 놀아도 돼."
"아.. 네가 나랑 안 놀고 싶을 수도 있겠구나 ㅋㅋㅋㅋ"
"나는 신경 쓰지 마. 내가 너한테 맞추면 되니까... ^^"
연애가 하고 싶은 거야, 노예가 되고 싶은 거야? 이건, 재형씨라는 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고 상대를 접대하려는 사람만 남아 있는 모습이잖아. 재형씨가 다시 한 번 연락을 해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잘 알겠는데, 솔직히 난 이게 재형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사건'을 계기로 급격히 멀어진 게 아니고, 서서히 실망해가다 두 사람이 너무 안 맞는다는 걸 확실하게 확인하게 된 일이라 생각하기에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해.
재형씨는 한두 달 기다렸다가 다시 연락해보면 잘 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러겠다면 난 그것까지 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어. 단, 시간이 알아서 다 해결해 주진 않을 거라고 적어둘게. 상대는 팬클럽을 원하는 게 아니라 연인을 원하는 거라서, 재형씨가 달라지지 않는 한 '더 크고 아름다운 접대'로 상대의 마음을 얻긴 힘들 거야.
나도 좀 달달한 사연, 조금만 손보면 핑크빛 러브러브로 이어질 사연들을 다루고 싶은데, 내 바람과 달리 도착하는 사연들이 대부분 '침수된 폰 전원 연결한 뒤 자가 수리까지 하다 안 되어 가지고 온'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사연을 적어 보내는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가능성 없는 얘기에 자꾸 희망만 덧칠해 줄 순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아닌 건 아니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니, 그 점은 좀 양해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불금이 좀 가까워졌나 하고 요일을 보니, 화요일이다. 이번 주엔 뭔가 많은 일을 하며 차곡차곡 산 것 같은데 아직 이틀밖에 안 지났다니 좀 당황스럽다. 구피 치어 밥 먹이느라 부지런해져서 그런가? 소리쳐 부르지 않아도 불금은 알아서 제 시간에 올 테니, 불금까지 우리 또 힘내서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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