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 어스로 구경하는 거 말고, 실제로 외국에 나가 구경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간 외국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면 구글 어스를 켠 뒤 스트리트뷰를 보며
'오! 로마에도 비둘기가 있네.'
'이 성당 앞에 있는 카페거리엔 낭만이 넘치는 군.'
'나중에 이 강가에 가게 될 일이 생기면 저 쪽에서 사진을 찍어야지.'
등의 생각을 하곤 했다. 이런 내 취미생활을 어느 날 친구 결혼식장에서 다른 친구들에게 털어 놓았더니 요즘 많이 힘드냐고 걱정하던데, <오 솔레 미오>를 틀어 둔 채 피자 한 조각 먹으며 나폴리 스트리트뷰를 보면 이태리의 냄새가 풍겨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쿠바음악을 틀어둔 채 모히또를 마시며 쿠바 스트리트뷰를 보다 보면, 경기도 파주 하늘이 쿠바 하늘인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말이다. 발코니 빨래 건조대에 흰 빨래가 매달려 바람에 살랑살랑 거리면 더욱 쿠바스러운(응?) 느낌이 드는데, 여하튼 이건 내 취향이니 존중해 주길 바란다. 아, 구글에서 제공하는 '구글 마르스(Google Mars)'를 보며 화성의 한 지점에서 숨을 참고 있으면 우주에 나온 느낌이 드는데, 이 얘길 길게 하면 날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으니 이쯤하자.
이번 내 여행의 목적지는 마닐라와 세부였다. 몇 달 전 마닐라에 살고 있는 지인이 "비행기 표만 끊어 가지고 오세요, 그럼 나머진 제가 알아서 다 해드릴게요."라는 얘기를 했는데, 난 그런 떡밥은 무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신뢰가 가는 지인이라 덥석 물어 버렸다. 하여 마닐라 행 왕복 비행기 표를 구매했는데, 이후 마닐라에 대해 검색하다 보니 마닐라는 관광하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인에게 부탁해 6일 중 절반은 세부에서 보낼 수 있게 항공편 예약을 부탁했고, 난 숙소를 예약했다.
그러고는 떨리는 마음으로 준비를 하다 보니, 어느새 멀게만 느껴지던 출발 당일이 금방 찾아왔다.
오른쪽은 이전 글에서 소개한 적 있는 내 캐리어, 왼쪽은 공쥬님(여자친구)의 캐리어다. 내 캐리어에 글씨를 새기고 보니, 공쥬님 캐리어에는 그림을 넣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간디(애완견, 애프리 푸들)와 가장 비슷한 그림을 웹에서 찾아 열심히 새겨 넣었다.
공항으로 가는 길, 내가 인천공항을 처음 가보는 거라고 하니 공쥬님이 놀렸다. 하지만 난 그런 장난도 받아주기 힘들 정도로 긴장해서는, 공항 어플을 깔아 타는 곳을 확인하거나 영어회화 어플을 다시 한 번 보며 마닐라에 도착해 할 말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공항에 도착해 밥을 먹으려 했는데,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음식점들이 대부분 공사 중이었다. 부족한 SD카드도 면세점에서 사려고 했는데, 하필 전자제품관이 공사 중이라 SD카드도 살 수 없었다. 뭔가 불길한 느낌이 엄습해 왔지만, 그냥 기분 탓이겠거니 하며 게이트로 향했다.
마닐라까지는 4시간이 넘는 비행이었기에, 니코틴 파워가 모두 소진되어 가슴이 먹먹하고 손발이 떨려왔다. 비행기 좌석이 편치 않아 없던 허리 디스크가 생기는 느낌이었고, 날개 바로 옆쪽에 앉은 까닭에 가는 내내 엄청난 소음에 시달려야 했다. 마닐라 공항에 내리기 직전부터 이미 반은 넋이 나가고 만 것이다.
마닐라 공항에 도착했을 땐, 일단 밖으로 얼른 나가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지인이 "호텔에서 직원이 나갈 거예요. 호텔까지 데려다 줄 거고요."라는 이야기를 했던 까닭에, 난 공항에 도착해 그와 기념사진이라도 한 장 찍을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 운전기사가 나와 있을 거란 내 예상과 달리 정장을 입은 현지 여자 두 명이 내 이름을 든 채 나와 있었고, 공항에 촬영 금지 스티커도 붙어 있었으며, 무엇보다 담배가 절실해 일단
"저…, Where can I smoke?"
부터 지르고 봤다.(이후 저 문장은, 내가 마닐라와 세부에서 사용한 말 중 'Excuse me'를 제외하고 가장 많이 사용한 문장이 된다.)
직원 중 하나가 나를 밖으로 이끌었고, 흡연을 원하면 길 하나만 바로 건너 피우면 된다고 했다. 난 당연히 횡단보도까지 걸어가 길을 건너려 했는데, 그 직원은 그런 나를 이해 못 하겠다는 듯 다신의 입술에 두 손가락을 갖다 대며 담배 피는 흉내를 냈고, 이어 그 손으로 길 건너를 가리키며 곧장 건너라고 했다. 공항 경찰들이 입구에 서 있는데 무단횡단을 하라고 한 것이다. 내가 난감한 표정으로 망설이고 있자, 그녀는 자신이 먼저 앞장서서 무단횡단을 하며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난 경찰을 힐끗힐끗 보며 건너갔는데, 경찰은 내 무단횡단에 아예 신경도 쓰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담배를 피우니 그제야 살 것 같았다. 맑아진 정신으로 주변을 둘러보니, 그녀들과 기사가 내 짐을 검은색 벤츠에 싣고 있었다.
'어? 이거,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사람을 헷갈렸나? 왜 저 차에 싣지?'
하며 바짝 긴장해선 얼른 차 쪽으로 다시 건너갔다. 마침 그때 지인이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왔는데, 지인은 직원에게 나를 바꿔달라고 한 뒤 그 차가 맞으며 타고 오면 된다고 말했다. 난 안내를 해줬던 직원들도 같이 가는 건줄 알았는데, 그녀들은 공항에서 안내를 담당하는 직원이라 호텔로 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럴 줄 알았으면 미리 이름을 물어 보는 거였는데, 차에 타고 나니 그녀들이 문을 닫아줬고 그게 우리의 마지막(응?)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긴 얘기를 풀어 놓으면서도 사진을 첨부하지 않는 건, 그때 찍은 사진이 없기 때문이다.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낼 생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지금 보니, 내가 담배 피우는 동안 공쥬님이 폰으로 찍어둔 사진이 한 장 있어 첨부한다.)
사진 왼쪽의 여성분이 나를 담배 피울 수 있는 곳까지 인도해 주신 분이고, 우측에 보이는 차가 내 짐이 실린 차다.
기사는 말이 많고, 빨랐다. 엄청나게 막히는 마닐라의 교통사정 때문에 우리는 현지 음식에 대한 긴 수다를 떨었는데, 내가 졸리비에 정말 가보고 싶었다고 말하자 그는 메뉴를 추천해 주기도 했고, 족발튀김과 그릴 치킨을 꼭 먹어 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아, 물론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은 부분도 있었다. 난 그가 '워너 콜어 어쩌고'하는 질문을 하기에
"미스터 장."
이라고 대답했는데, 그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같은 질문을 했다. 그래서 난
"풀 네임?"
이라고 물었더니, 그가 차에 들어오는 무드등의 색을 바꿔가며 '컬러'라고 말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공쥬님은 배꼽을 잡고 웃었고, 난 시무룩해졌다. 무드등 색깔을 뭘로 바꿀지 물어볼 거라고 누가 상상을 할 수 있었겠는가.(물론, 이때의 경험을 통해 나중에 차를 탈 땐 먼저 무드등 색상을 바꿔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호텔에 도착해서는, 호텔의 크기와 분위기에 놀랐다. 내 짐을 호텔 직원들이 막 가지고 가서 놀랐고, 복도를 지날 때마다 마주치는 직원들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웃으며 인사를 해서 또 놀랐다. 엘리베이터에선 룸키를 대야만 해당 층의 버튼이 눌렸는데, 그걸 몰랐으면 방에 걸어 올라갈 뻔 했다. 다행히 지인이 호텔로 마중 나와 있었고, 앞장서서 척척 처리해 주었다.
내가 신발을 벗고 들어가려 하자, 지인이 여긴 신발 신고 들어가는 곳이라고 알려주었다.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변기가 저절로 열려 누가 있는 줄 알고 심장이 얼어붙을 뻔 했는데, 역시 지인이 센서로 작동하는 변기라고 알려주었다.
냉장고엔 마실 게 많이 준비되어 있었다. 물론, 콜라 하나를 마셔도 돈을 내야 한다는 게 함정이긴 하다. 지인이 우리에게 줄 산미겔 맥주와 안주를 잔뜩 들고 온 까닭에, 우리는 꽤 늦은 시간까지 담소를 나누며 다 마신 맥주캔을 쌓아갔다.
다음 날 아침, 커튼을 젖히자 창밖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호텔 야외 수영장엔 일찍부터 나온 사람들이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이렇게 사진으로 보면 평화롭고 즐거워 보이지만, 저 물에서 나와 맨발로 바닥을 밟으면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겁다. 야외의 날씨가, '습식 사우나' 안에 들어와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나가서 잠깐만 움직여도, 땀구멍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샤워를 하곤 1층 식당에 내려가서 밥을 먹었다. 클럽 샌드위치, 그릴 치킨, 망고 샐러드, 스파게티 등을 먹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클럽 샌드위치와 스파게티가 맛있었다. 앞으론 나도 집에서 샌드위치를 해 먹을 때, 식빵을 토스트기에 한 번 구운 뒤 해먹을 생각이다. 그럼 훨씬 맛있어 지는 것 같다. 치킨은 언제나 옳은 메뉴지만, 마닐라와 세부에서 모두 치킨은 너무 짰다. 여하튼 한국에선 볼 수 없는 '폭발하듯 피어나는 구름'들을 보며, 식사 내내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내 재주가 신통치 않아 그 하얗고 풍성하고 푹신해 보이는 구름들을 사진으로 잘 담지 못했는데, 실제로 보면 계속 올려다보게 될 정도로 아름답고 신기하다. 그리고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마닐라의 구름들은 한국의 구름보다 빨리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밥 먹으러 내려간 거라 삼각대를 안 가지고 간 까닭에, 계획했던 타임랩스는 담지 못 했다. 그게 지금도 미련으로 남아 있긴 하다. 난 저런 구름이 여행 내내 계속 있을 줄 알았는데, 딱 저 날 하루만 저랬다.
호텔에서 얼마쯤 시간을 더 보낸 뒤, 세부로 이동하기 위해 마닐라 공항에 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공항 앞 가게에서 아이스커피를 사 먹으며 들떠 있었는데, 이후 급격히 멘탈이 붕괴되는 사건이 이어졌다. 공항 검색에서 라이터를 빼앗겼고, 이어 비행기가 2시간 30분 연착되었다. 게다가 수속을 마치고 들어간 곳엔 흡연실이 없어서, 강제로 다섯 시간 쯤 금연을 하게 되었다.
또, 공항에 들어갈 땐 분명 하늘이 저렇게 맑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천둥 번개가 치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세부에 도착해 짐을 풀고 놀 준비를 마쳤어야 하는 시간에, 공항에 발이 묶인 채 멍하니 있는 시간이 아까웠다. 게다가 비행기 연착으로 인해 식사 시간도 애매해졌다. 세부에 도착해 현지 음식점에 갈 예정이었는데, 배가 너무 고파 어쩔 수 없이 공항 내에서 간단히 끼니를 해결했다.
세부 행 비행기를 탔을 땐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해변에 앉아 일몰을 보고 있었어야 하는 시간이었는데…. 어쩔 수 없이 좁은 비행기 좌석에 앉아 일몰을 봐야 했다. 게다가 우리 말고는 탑승객이 모두 외국인이었는데, 어딘가에서 낯선 냄새들이 풍겨와 살짝 역한 느낌이 들었다.
조금만 더 비행기가 빨리 가준다면 붉게 물든 세부 하늘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생각을 잠시 하기도 했지만, 창밖으로 해가 완전히 지는 것을 보며 포기했다. 아, 그건 그렇고 내가 날개 옆자리 피해서 자리를 달라고 말했는데, 직원이 잘못 알아 들은 건지 내가 잘못 말을 한 건지 날개 바로 옆 자리를 배정해 주었다. 너 이 자식, 잊지 않겠다.
이날까진, 비행기 연착을 제외하곤 그다지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없었다. 마닐라에선 지인이 옆에 있었기에 내가 영어로 대화를 할 일도 별로 없었고, 호텔 차량으로 이동한 까닭에 그냥 다 준비된 대로 알아서 척척 진행되었다. 하지만 세부에선 지인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고, 모든 걸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세부에 도착해 리조트로 가기 위해 탄 택시, 그 택시에서부터 내 여행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번 여행 중 내 기억 속에 가장 강인하게 남아 있는 벤자민(택시기사 이름). 그의 이야기는 2부에서 풀어 놓기로 하자. 즐거운 수요일 보내시길!
▼ 2부를 부르는 공감과 추천버튼, 눌러 주실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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