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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매뉴얼(연재중)/커플생활매뉴얼

남친에게 더는 설레지 않는데, 결혼을 해야 할까요?

by 무한 2015. 10. 13.

제가 자주 받는 질문 중 하나긴 한데,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제가 결혼을 권했는데 결혼해보니 결혼생활이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을 경우 저는 인생을 망친 사람이 되고, 헤어지길 권했는데 헤어져보니 그보다 더 나은 남자가 없을 것 같으면 역시 저는 인생을 망친 사람이 되니 말입니다.

 

그래서 전

 

- 상대에겐 책임감이 있는가?

- 상대는 이쪽을 존중 하는가?

 

라는 참 간단한 두 기준을 확인해보길 권하고 있습니다. 저 기준을 충족시킨다면 함께 뭔가를 해나갈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기반은 마련된 것이니, 결혼 후 이쪽이 손 놓은 채 요구만 하고 있는 게 아닌 이상 함께 궁리하고 도울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저 기준에 정말 부합하는 게 맞는 건지 아닌 건지 참 애매한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게 백지장 같이 하얀 남친을 둔 경우입니다. 이번 사연의 주인공인 L양의 사례와 같은 건데, 그런 사연 속 남자들은 대개 아래와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 강하게 말하면 잘 따라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소심하게 엇나가거나 안 함.

- 여자 문제로 속 썩이진 않지만 그건 아는 여자가 없어서 그런 것일 확률 높음.

- 성실하게 연락하고 데이트에도 충실하지만, 뭔가 영혼이 없는 느낌임.

- 주변에선 다 그런 남자 또 없다고 하는데 단점이 없는 거지 장점이 있는 건 아님.

 

이런 얘기를 하면 일부 남성대원들이 "여자만 저렇게 느끼냐. 그리고 문제없으면 된 거지 뭘 어디까지 더 해야 하냐."라며 분노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여성대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글이고, 누구의 기분도 상하게 하지 않으려 막연한 이야기만 주례사식으로 읊는 것은 시간낭비가 될 것 같아 현실적인 고민을 가져다 이야기 하는 것이니, 조금만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양해해 주시리라 믿고, L양에게 보내는 이야기들 시작해 보겠습니다.

 

 

1. 현재에 더 무게를 두고 보기.

 

앞서 이야기 한 '백지장 같이 하얀 남친'들은, 아직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전이거나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 정서적 독립을 하지 못한 상황인 경우가 많습니다. 때문에 그가 많은 약속을 하고 달콤한 미래를 이야기 하며 사랑을 맹세했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 그 전과 완전히 달라지곤 합니다.

 

가장 흔한 사례는, 상대가 취업준비생일 때 만나 연애를 한 경우입니다. 그러면 대개

 

- 취업만 하고 나면 너에게 더 많은 것을 해 줄 것이다.

- 취업 하고 자리 잡으면 우리 결혼을 진행할 것이다.

- 취업 후에 서로의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상견례도 하자.

 

라는 말들을 하곤 하는데, 막상 취업 한 후엔 얘기가 완전히 달라지곤 합니다. 취업만 하고 나면 모든 것이 다 보장되며 '고생 끝 행복 시작'이 될 줄 알았는데, 취업을 해보니 그게 아닌 겁니다.

 

벌이가 커지고 나니 씀씀이도 커집니다. 그리고 예전엔 돈이 많이 들 거란 생각에 알아보지도 않았던 차량구입까지도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회사에 들어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과 친해집니다. 이젠 회사원이 되었으니, 취준생일 땐 만나지 않았던 친구들에게도 연락해 대인관계를 정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참 슬픈 얘기지만, 목적을 달성하고 나니 이제 갚아야 할 일들만 남은 여자친구와의 관계가 의무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뭐, 대략 이런 심경의 변화들로 인해 전과 태도가 달라지곤 합니다. L양의 남친은 어땠습니까? 그도 역시 취업 전과 후의 모습이 많이 바뀌지 않았습니까?

 

제가 말하는 기준들을 살펴볼 땐, '현재'에 더 큰 무게를 두고 살펴봐야 합니다. 상대가 취업 전에 무슨 약속을 하고 어떤 맹세를 했는지에는 2 정도의 무게만 두고, 지금 어떤지에 8 정도의 무게를 둬야 합니다. 그가 과거에 이러이러한 약속과 맹세를 했다는 얘기는 과거의 상황에서 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친구와의 금전거래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빌려갈 땐 정말 매달릴 곳이 이쪽밖에 없다는 듯 굴지만, 갚을 기한이 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다음 달로 미루는 친구가 꼭 하나쯤 있지 않습니까? 그러다 독촉하면 줄 건데 왜 독촉하냐며 적반하장으로 나오기도 하고, 갚을 땐 돈 주며 "돈 생겼으니 술이나 한 잔 사라."라는 괴상한 소리를 하는 경우도 있고 말입니다. 이런 친구가 있다면, L양은 '돈 빌려갈 때 상대가 보인 행동'과 '돈 갚아야 하는 상황에서 상대가 보인 행동' 중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상대에 대해 정의하시겠습니까? 당연히 후자일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L양이 이 부분에서 실패한 건 아닙니다. 이미 위와 같은 기준으로 상대를 바라본 후,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것을 눈치 채곤 이별을 선언해 헤어진 적 있으니 말입니다. 한 번 낙제한 전력이 있는 건 상대입니다. 때문에 전 이제 막 상대와 재회를 한 상황에서 '결혼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를 결정하려 하시기보다는, 얼마쯤 더 상대를 겪어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재회할 때 그가 한 말들이 행동으로 증명되는지,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단, 일부러 상대를 시험에 들게 하진 마시고, 상대가 잘 할 수 있도록 도와가면서 살펴보시길 권합니다.

 

 

2. 10자 이상으로 대화하기. 진지하게도 대화하기.

 

역시나 '백지장 같이 하얀 남친'을 두고 있는 여성대원들은, 제가 '연인 역할극'이라고 말하는 연애를 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둘이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면 달달하고 행복해 보이는데, 그게 연인이니까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일 뿐 둘 사이에 끈끈함이나 신뢰, 서로에 대한 비전은 없는 겁니다. 좋아서 만나고 있긴 하지만, 그게 그냥 좋아서 만나고 있는 것일 뿐인, 그런 거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들의 대화엔

 

"맛있게 먹엉~"

"웅. 잘자."

"알았어 쉬엉~"

"알았엉~"

"그러겡 그랬나보넹~"

 

등의 짧고 깊이 없는 멘트들만 등장합니다. 분명 연락은 자주하고 다양한 주제들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는데, 그저 '좋게좋게'만 대답하고 넘겨버리는 거라고 할까요.

 

매뉴얼을 통해 제가 "상대가 학창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어느 고등학교를 나왔는지 정도는 알아야 친한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앞서 말한 이 대원들은, 저의 저런 조언을 듣곤 아래와 같은 대화를 합니다.

 

여자 - 자기 고등학교 어디 나왔지?

남자 - 나? 백신고.

여자 - 그렇구낭 ㅎㅎ

남자 - 왜?

여자 - 그냥. 궁금해서 ㅎㅎㅎ

남자 - 퇴근했어?

여자 - 웅웅. 지금 집 가는 중.

남자 - 응. 들어가서 쉬어~

 

저 대화문을 보니, 평소의 대화들도 어떨지 대략 감이 잡히지 않으십니까? 저게 바로 제가 '연인 역할극'이라고 부르는 연애입니다. 저런 식이라면, 두 사람이 1000문 1000답을 해가며 10년을 사귄다 해도, 왠지 모르게 여전히 멀고 겉도는 느낌이 남아 있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L양 역시 제가 서두에서 소개한 것 중 하나인

 

- 성실하게 연락하고 데이트에도 충실하지만, 뭔가 영혼이 없는 느낌임.

 

이라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건 L양과 상대가 얕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가 파악한 'L양과 남친이 얕은 대화만 하는 이유'는 아래와 같습니다.

 

- L양이 상대를 너무 이해하며 L양 스스로도 얕은 질문만 하기 때문.

- 상대는 자신이 전부 장난식으로 대처해도 문제가 없으니, 장난만 치려하기 때문.

 

제가 사연 신청서를 통해서 느끼게 된 L양과 카톡대화 속 L양은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L양 자신이 봐도 카톡대화 속 자신은 뭔가 연기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L양이 신청서에 적은 것의 딱 절반만큼만 상대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어도, 둘의 관계는 50M쯤 깊어질 수 있습니다. 지금 겨우 발목에서 찰랑대는 수준일 뿐인 것에 비해서 말입니다. 귀엽지 않아도 되고, 애교부리지 않아도 되고, 맹목적으로 긍정적이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 연기를 노력이라 생각하시며 열심히 하시다가 갈등이 생기면 그때만 잠깐 본 모습 보여주지 마시고, 되도록이면 늘 본래 L양의 모습으로 상대를 대하시길 권합니다.

 

 

3. 결혼이 '최종선택'이 아니라는 걸 잊지 말기.

 

아주 단순히 생각하자면 연애의 '최종선택'이 결혼일 순 있습니다. 그런데 결혼이 인생의 최종선택이며 관계의 최종택인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런데 L양이 하는 말들을 들어보면, L양은 결혼을 통해 안정과 정착과 행복과 즐거움과 앞으로의 인생 모든 것에 대한 보장을 얻으려는 것 같습니다. 흔히 얘기하는 '남편 덕' 뭐 그런 게 아니라,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뭔가 정리가 되어 시작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말입니다.

 

인천공항은 그냥 인천공항이고, 출국은 그냥 출국입니다. 출국 무사히 마쳤다고 이후 모든 여행에서의 안정과 행복과 즐거움이 보장되는 건 아니잖습니까? 한국에서 하던 습관이 비행기 타고 외국 나갔다 해서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 거고, 한국에서의 인생고민이 역시 외국 나갔다고 해서 전부 해결되는 것 역시 아니고 말입니다.

 

지금 L양의 생활이 안정적이십니까? 지금 L양의 생활이 행복하십니까? 지금 L양의 생활에 미래에 대한 비전이 있습니까? 이 물음들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다면, 결혼해도 마찬가지일 확률이 98.72%입니다. 혹시 많은 팬들이 '내가 죽기 전에 이 만화가 완결될까?'라고 생각하는 <베르세르크>라는 만화를 아십니까? 27년째 연재 중인 일본만화인데, 많은 팬들이 그 만화의 최고 명대사로 꼽는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이란 있을 수 없는 거야. 도착한 곳, 그곳에 있는 건, 역시 전장뿐이다."

 

L양이 신청서에 적은 문장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제가 처한 상황에서 탈피하고 싶다는 생각에, 남자친구에게 결혼을 독촉하기도 했습니다."

 

좀 더 솔직히 말해도 되겠습니까? L양이 제 여동생이었다면, 저는 지금 당장 L양을 회사에서 불러내서라도 '급하게 결혼해선 절대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둘에겐 준비된 것도 없고, 아무 대책도 없으며, 뭘 어떻게 하자는 진중한 대화조차 나눈 적 없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남친에 대한 L양의 애정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적다는 문제까지 있습니다.

 

"저도 이제 곧 30대가 됩니다. 저를 이렇게 순수하게 좋아해 주는 사람도 없고, 헤어져보니 괜찮은 사람도 없고, 또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자신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대로 만나는 게 맞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전 이 매뉴얼을 통해 L양이 말하는 '순수하게 좋아해 주는 사람'이라는 부분과 '괜찮은 사람'이라는 부분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 부분이 정확히 확인되지 않으면 '더 좋은 사람'이라는 부분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러니 맹목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애교를 부리는 것을 '노력'이라 생각하며 결혼 직전까지 그렇게만 애쓰지 마시고, 정말 그런지 만나며 확인해 보시길 권합니다.

 

 

저는 그간 '백지장같이 하얀 남친'들을 '아직 개간되지 않은 땅'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남친과 사귀게 되었을 경우, 상대가 알아서 다 해주지 않는다고 이별부터 생각하지 말라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개간된 적 없는 황무지인 까닭에 황폐해 보여도, 힘써 가꾸다 보면 그게 금싸라기 땅이었다는 걸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면서 말입니다.

 

'힘써 가꾸다 보면'이라는 부분과 '발견하게 될 수도'라는 부분에 주목하시길 바랍니다. 그냥 두고 묵히면 황무지는 계속 황무지일 뿐입니다. 거기에 몇 년 울타리를 친 채 입구를 지키고 앉아 있어도 황무지는 그냥 황무지입니다. L양은 상대에게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는지, 또 상대에게 어떻게 해주고 싶은지, 어떤 삶을 살아왔고 무슨 삶을 살고 싶은지, 반대로 상대는 어떠했는지, 무엇이 좋고 무엇이 싫은지, 어느 때 좋고 어느 때 싫은지 등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 해준 적 있습니까? 그런 부분들에 대한 교류 없이 "잘자용, 웅웅, 맛있게 먹엉, 그랭, 고마웡…." 등의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면 그건 황무지에 자리 잡고 앉아 있었던 것에 불과합니다.

 

더불어, 상대가 금싸라기가 아닌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아이를 하나 키우는 심정으로 남친을 데려다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용돈까지 줘가며 지원했더니 결국 "누난 엄마 같아."라며 떠난 사연들이 있습니다. 취준생 남친의 자기소개서를 써주고 면접 연습을 시켜주고 자신감 높여준다고 이벤트까지 열어 주며 취직시켜 놨더니, 달라진 상황에 본인도 이제 좀 즐기며 살겠다며 밖으로만 돌다 떠난 사연들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부분은 맹목적인 헌신의 문제와 권력관계의 문제, 기대와 보상의 문제 등이 얽혀있는 부분이긴 합니다만, 상대 인간성의 문제 역시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는 얘기를 해드리고 싶습니다.

 

끝으로 중요한 거 하나 더. 관심이 없으면 애정이 생기지 않고, 애정이 없으면 더는 설레거나 상대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없어집니다. 이쪽이 설정한 상대의 한계를 정말 상대라는 한 사람의 한계라고 생각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상대에겐 권태만을 느끼며 다른 가능성을 가졌다고 생각되는 새로운 사람을 찾아가게 됩니다. 지금까지 L양의 연애가 대부분 그렇지 않았습니까? 콩깍지가 벗겨지고 나면 상대에 대해 지루한 감정만 느끼다 이별을 선언하게 되는 식으로 말입니다. 남친에 대해 좀 더 알아가며 깊은 관계를 가져보기로 한 현시점부터는, L양도 마음의 보호필름을 떼고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는 본 모습으로 상대를 대해보시길 바랍니다. 콩깍지 벗겨진 이후 혼자 마음 정리해 나중에 상대와 헤어져도 아무렇지 않은, 그런 연애는 이제 그만 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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