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의 주인공이 내가 아는 사람 맞냐고 묻는 분들이 계신데, 그건 제게 어떻게 부탁하시든 알려드릴 수가 없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니, 솔직히 목에 칼이 들어온다면 제 생각이 좀 달라질 수는 있습니다. 제 목숨은 소중하니까요.
여하튼
"제가 아는 그 사람이 분명한 것 같은데, 만약 그 사람이 맞다면 대답을 하지 마시고, 아니라면 대답을 해주세요. S시에 살며 S사에 다니는 K씨죠?"
"제가 무한님께 바라는 건 정말 딱 하나입니다. 그 사람인지만 말해주세요. 전 진짜 노멀로그 애독자이며 책도 다 구입했고…(생략). 제발 그것 하나만 알려주세요."
"제가 연상이라는 것과 지방에 살고 있다는 것만 적용시키면 제 얘기인 것 같은데요. 실제로 매뉴얼에 나온 대화를 저희가 나눈 적도 있고요. 절대 알려주실 수 없다면, 그 사람에게 저 역시 마음이 있었다는 것만 좀 전해주세요. 다만 제가 실망했던 부분들은…(생략)."
등의 이야기를 하셔도, 저는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부탁을 하신 뒤 제가 그 부탁을 안 들어줬다고 해서 저를 원망하지 마시고, 저런 부탁은 제발 안 해주시길 제가 먼저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미 눈치를 채신 독자 분도 계시겠지만, 노멀로그엔 한 매뉴얼이 '본인이 사랑했던 사람이 보낸 사연을 토대로 한 것'이라 굳게 믿으며 몇 달 째 그 글에 편지 쓰듯 댓글을 달고 계신 분도 있습니다. 그것까지는 뭐 개인의 자유니 저도 터치하고 싶은 생각 없습니다만, 제게 사연을 누가 보냈는지 알려달라는 질문만은 안 해주셨으면 합니다. 이 시간 이후 전 무조건 '아닙니다'라고 대답할 생각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자 그럼 공지는 이쯤하고, 사연을 만나보러 출발해 보겠습니다.
1. '취준생'이 가질 수 있는 불안 들여다보기.
우선, 취업을 준비하고 있을 때 종종 자신이 '잉여인간'인 듯한 생각이 드는 건 지극히 정상이라는 얘기를 해드리고 싶습니다. 특히 몇 번의 탈락을 맛 본 뒤라면, 자신을 필요로 하는 회사가 아무 곳도 없다는 듯한 생각이 들 수도 있고, 이미 그곳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며 낙담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어찌 그리 자신의 진로를 잘 찾아가 사회생활을 문제없이 해나가고 있는지 부럽고 궁금한 마음까지 들 수 있고 말입니다.
혹 운전을 하신다면, 운전면허 처음 딸 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필기 합격 후 실기시험 준비를 할 때, 도로에서 차를 몰고 다니는 모든 운전자들이 다 존경스러워 보이지 않습니까? 이후 도로주행 때 이쪽은 대체 어디서 끼어들어야 할지 몰라 직진만 계속하기도 하고, 또 뒷 차가 경적을 울리면 심장이 얼어붙는 느낌도 드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찌 그리 능수능란하게 운전을 하는지 그게 참 놀랍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처럼 운전하려면 좀 타고난 강심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별에 별 생각이 다 들기도 하고 말입니다.
자랑스러운 경험은 아닙니다만, 전 면허를 따고 난 뒤 차를 몰고 나갔다가, 주차한 차를 뺄 수 없어 지인에게 도움을 요청한 적도 있습니다. 제가 주차한 뒤 다른 차들이 빽빽하게 차를 세워 못 빠져나왔던 건데, 당시 전 한 30분쯤 헤매다가 결국 근처에 사는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부탁했습니다. 지인 역시 한 5분 쯤 왔다 갔다 하다가 겨우 빼냈는데, 이후 전 얼마간 주차공포증이 생겨 무조건 '넓은 곳'에 차를 댔던 게 생각납니다. 마트에 가서도 입구에서 가장 멀어 차들이 얼마 없는 곳에 차를 댔습니다. 물론 지금은 오랜 시간 차를 몬 까닭에 '깻잎 세 장' 정도의 틈만 남기고도 주차를 할 수 있는 걸 자랑으로 삼고 있지만 말입니다.
미래를 상상해 볼 땐, '현재 혜원씨의 상황'이 6개월 후, 또 1년 후엔 지금과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까지 고려해서 상상해야 합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미래에도 계속될 거라 생각하며 계획을 짜거나 미래를 상상해 버리면, 그냥 다 자신 없어지거나 도망가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전에 매뉴얼을 통해 소개한 적 있는 제 지인 중 하나는, 임용고시에 매달린 채 낙방도 해가며 참 많은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다시 도전한다고 다음 번 성공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니 포기하고 싶은 적도 있었고, 그 길이 자신의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으며, 차라리 외국에 나가 다른 일을 하며 돈을 벌어올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지금 그 지인은 예전에 했던 그런 고민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습니다. 그런 고민을 한 적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잘 자리 잡았고 말입니다. 물론 '학부모들 중엔 왜 이렇게 이상한 사람이 많은가?'하는 다른 고민을 가지고 있긴 한데, 여하튼 이처럼 상황이 달라지면 현재 혜원씨가 하고 있는 고민은 아예 생각도 안 날 정도의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될 수 있으니, 자존감이 바닥을 드러내고 절망감이 발목을 잡은 상태가 앞으로 계속 될 거라 생각하진 마시길 권합니다.
혜원씨를 불안하게 만드는 실체가 무엇인지 정말 냉정하게 들여다보셔야 합니다. 들여다봤을 때 아무리 봐도 그게 이렇다 할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혜원씨의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것일 뿐이라면, 그걸 의식적으로라도 떨쳐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 없이 그저 남들에게 어떻게 될 것 같냐고 묻다간, 불안함만 더 커질 수 있다는 걸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2. 이상한 비교, 또는 극단적인 선택에서 벗어나기.
혜원씨가 신청서에 적은 말을 잠시 보겠습니다.
"하지만 남친은 제가 가려는 곳보다 더 좋은 회사에 다니고 있고, 또 출신 학교도…."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경쟁자나 비교대상으로 놓을 필요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남친이 명문대 출신에 좋은 회사 다니고 있다는 건 혜원씨에게도 좋은 일이지 결코 나쁜 일이 아닙니다.
좀 다른 얘기긴 하지만, 제 경우 이번에 새로 새 모이통을 만들려고 계획 중입니다. 그리고 전 그걸 가구회사 다니는 친구에게 부탁할 생각입니다. 그 친구가 현장에서 나무를 많이 만지는데다 기술도 가지고 있으니 부탁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그 친구는 만들 줄 아는데 나는 왜 못 만들까. 그 친구는 나중에 자신이 살 집에 들어갈 가구 전부 자신이 디자인하고 제작할 수 있는데, 난 겨우 가구점 가서 사는 게 고작이겠지….'
라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인생이 참 피곤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중엔, 어느 구간을 누가 제일 빨리 달렸나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즘엔 스마트폰으로 자전거를 타고 간 거리와 속력을 공유할 수 있는 까닭에, 그 순위의 상위권에 들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뭐 그건 그들 나름대로 재미를 느끼는 방법이니 가타부타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만, 그것만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그 길을 삼십 분 만에 죽을 힘 다해 달려 순위권에 든 사람과, 그냥 마음 맞는 사람과 이야기하며 세 시간 동안 슬슬 달린 사람이 있다고 하면, 정말 전자만이 가치 있는 일일까요?"
라는 질문을 해보고 싶습니다. 혜원씨도 이 부분을 곰곰이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당장 취업이 먼저니 모든 것을 접거나 모든 것으로부터 도피하는 게 먼저인지, 아니면 취업도 행복을 위해 하려는 것이니 지금의 행복을 현명하게 간직하며 나아가는 게 맞는 건지 말입니다.
더불어 '둘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혜원씨는
"남자친구가 없었다면?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그만큼 큰 힘이 되었어요."
"그런데 남친 생각이 나서 집중이 안 될 때도 있고, 또 지금 제 상황에 연애라는 게…."
"그래서 막상 헤어지려고도 마음먹었었지만…, 그건 잘 안 될 같아요."
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 '큰 힘이 되었다'는 게, 그저 모닝콜 해주고 응원의 말들 해주며 맹목적으로 헌신해주었다는 것뿐이라면 곤란합니다. 혜원씨가 혼자 고민의 늪에 빠져 이별까지 생각하고 있을 때, 상대는 혜원씨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꿈에도 모르고 있지 않았습니까?
정작 정말 함께 고민하거나 같이 방법을 생각해야 할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 데이트를 즐기거나 '연인 역할극'에만 몰입해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 취업준비에 대한 부담 때문에 점점 모든 일이 혜원씨의 시간을 빼앗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이야기도 털어 놓으시고, 연락이나 만남의 횟수 등도 함께 조정해 나가시길 권합니다. 이런 걸 해보지도 않은 채 다급함에 쫓겨 혼자 판단하고 혼자 결정한 뒤 상대에게 통보하진 않으셨으면 합니다.
3. 연애, 그리고 가족들의 말에 대해 생각해보기.
혜원씨의 사연 마지막은,
"남친에 대한 제 마음이 자꾸 커지는데, 이러다 남친이 달라지면 어쩌나 불안하기도 하고…."
"이 모든 걸 컨트롤하면서 현명하게 오래오래 잘 만날 수 있는 방법 있을까요?"
라는 말들로 마무리 됩니다.
위와 같은 이야기를 한다는 건, 아직 혜원씨의 마음에 보호필름이 붙어 있으며, 상대의 '여자친구 대접'에는 정말 만족하지만 그만큼 상대와 공감대를 만들진 못한 상황이라는 걸 의미하기도 합니다.
때문에 이건, 저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연애'라기 보다는 '연인 역할극'에 가깝습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상대가 이쪽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도록 '날 것의 나'까지 상대에게 어느 정도 보여주며 만나고 또 희로애락도 같이 나누어야 하는데, 이 연애의 경우는 그냥 다 긍정적이며 좋은 말들만 가득합니다. '남친의 서비스'를 혜원씨가 누리는 것과 같다고 할까요.
남친에 대한 혜원씨의 마음을 서술한 부분도 좀 이상하긴 합니다.
"공부하고 있으면 책에 남친 얼굴이 나타나고, 인강듣고 있으면 남자친구 얼굴이 모니터 화면 위에 나타나요. 하루에도 정말 몇 번씩 남자친구 생각이 나는지…."
저 말만 놓고 보면 이상할 게 없습니다만, 또 다른 부분에서 혜원씨가 한 말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말에 한 번밖에 안 만나고 있긴 하지만, 시간적인 부담이 너무 많이 되기도 해요. 계속 지금 제 상황에서 연애는 사치라는 생각도 들고…."
이게 혹시, 상대와 연락하는 순간에는 '해야 할 몫의 공부'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어서 그런 건 아닌지도 한 번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공부할 때'에만 남자친구 생각이 간절하며, 막상 남자친구 만나는 날엔 그게 공부 할 시간을 빼앗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건 남자친구가 점점 더 좋아져서가 아니라 공부에서 도피하기 위해 마음을 쏟는 것일 가능성 98.72% 이상입니다.
어쩌면 현 상황이 위와 같기에, 혜원씨 가족들의 '연애 반대'가 심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혜원씨는
"가족들도 지금 취직이 먼저지 연애할 때냐고 뭐라고 하고…."
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가족 중 누구에게 현재 이런 혜원씨의 고민을 털어 놓아봐야, 연애 그만두고 공부 하라는 대답 밖에 안 돌아올 거라고도 하셨고 말입니다.
현재 혜원씨 스스로가 상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취업을 위해 상대와의 연애를 그만두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그걸 옆에서 그대로 지켜보고 가족들은, 필연적으로 '그럴 것 같으면 연애를 그만둬라'라는 얘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갈팡질팡 하고 있다가는, 최악의 경우
시험, 또는 취업을 망친 것 - 남친과의 연애 때문
남친과 헤어지게 된 것 - 가족들의 반대 때문
라는 답을 얻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누구 때문'이라는 핑계를 댈 일 없도록 일단 혜원씨가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해두시길 권합니다. 예컨대, '해외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는 건 막연한 바람일 뿐 확실한 계획이 아니잖습니까? 그런 마음만 가진 채 누구 얘기 들을 땐 미국으로 기울고, 또 다른 누구 얘기 들을 땐 영국으로 기울면 방법 없는 겁니다. 확실히 마음을 정하고, 그 후엔 '잘 되는 방향'으로 계획을 함께 세우시길 권합니다.
혜원씨가 제가 물은 건
- 지금이 상황이 좋은 건 아니지만, 나쁘지도 않다. 지금 남친은 정말 좋은데, 중요한 시기라 불안하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며, 남친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만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아닌 위의 이야기들을 한 건, 저게 바로 그런 연애를 위해 필요한 토양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연애 초반의 행운'이 따라주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남친은 혜원씨에 대해 잘 모르지만 어쨌든 열정적으로 헌신하고 있고, 혜원씨 역시 남친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이만큼 자상하고 착한 남자는 없는 것 같으니 계속 만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속내를 털어 놓을 정도로 진짜 가까운 사이는 아니니, 마음속의 불안은 가시지 않습니다.
비유하자면, 제가 큰 시험을 앞두고 동호회 활동에 열을 올리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호회 사람들이 다 잘 해주고 친절해서 좋지만, 그 시간동안 전 공부를 하고 있지 않으니 근본적인 불안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와중에 공부를 하려 책을 펼치면 또 괜히 동호회 사람들에게 카톡 한 번 더 해보고 싶고, 그냥 오늘 공부를 내일로 미룬 채 나가서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됩니다. 앞서 말했듯 동호회를 일종의 도피처로 삼아버린 겁니다.
전 혜원씨의 현재 상황이 위의 비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만약 저런 상황에 놓여있는 거라면, 전 동호회 사람들에게 제 사정을 설명한 뒤 도움을 요청할 것 같습니다. 시험 전까지는 모임에 자주 참석하지 못해도 양해해 주길 부탁할 것 같고, 혹 제가 공부를 안 하고 카톡으로 말을 걸면 공부하라는 이야기를 좀 해달라고도 말해둘 것 같습니다. 그러지 않고 제가 두 마음을 가진 채 계속 갈팡질팡하고 있으면, 시험에 떨어질 경우 동호회에 대한 원망으로, 또는 동호회 끊고 시험에 합격할 경우 동호회에 대한 미련으로 힘들어 질 수 있으니 말입니다. 이 이야기들을 잘 생각해 보신 후, 현명한 결단을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혜원씨의 합격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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