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아씨, 난 8년 째 연애사연을 받고 있어. 그러다보니, 이제는 사연만 딱 봐도
'아, 이 분과는 앞으로도 계속 볼 일이 많겠구나.'
하는 느낌이 오곤 해. 왜, 영어회화 배우러 갔는데 그 반에
"아이 원트 고 외식? 외식이 영어로 뭐지? 아 몰라요."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 좀 오래 다니셔야겠구나.'하는 느낌이 오잖아. 그런 것처럼 민아씨 사연을 처음 받았을 때에도 그런 느낌이 좀 들었어.
왜 이런 슬픈 예감은 틀리질 않는 걸까. 이후 연락이 없어서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안타깝게도 전과 같은 문제로 또 사연을 보냈네. 뭐, 괜찮아. 매뉴얼을 발행하는 건 잘 될 때까지 발행해 줄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런데 발행된 매뉴얼에서 짚었던 문제를 그 당시엔 그저 합리화 해버리고, 다음에 또 같은 문제로 사연을 보내면 우리 둘 모두에게 시간낭비가 될 뿐이야.
"저번 사연에서 무한님이 잘못 받아들이신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그것 먼저 짧게 쓸게요."
저 부분에 대한 내 대답부터 시작해 볼게. 출발해 보자고.
1. 지난 매뉴얼에 대한 이야기.
민아씨, 민아씨가 내게 '잘못 받아들였다'고 하며 이야기한 부분의 서술어를 봐봐. 특히 세 번째로 해명한 지점에 잘 나타나 있으니까, 그 부분이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끝나는지를 봐봐. 첫 문장은
"단순히 상대가 저를 떠보는 행동에 정이 떨어진 건 아니에요."
잖아. 그렇지? 그리고 중간은 생략하고, 마지막 바로 전 문장을 봐봐.
"시간이 지나서 연락이 왔는데 제게 남친이 있는지 없는지 떠봤어요. 거기서 완전 정이 떨어진 거죠."
민아씨 사연에 등장했던 남자가 넷이야. 내 입장에선, 그걸 매뉴얼로 발행하며 굵은 뼈대 외에 디테일한 부분까지 전부 다 설명할 수가 없어.
- 세 번째 남자에 대해 작지만 어쨌든 정이 떨어진 부분 1, 2, 3, 4. 그리고 그 다음 결정적으로 정이 떨어진 부분 1, 2.
저렇게 적을 수는 없단 얘기야. 가장 결정적인 문제를 찾아 각 남자와의 '절교 사유'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
다른 남자에 대한 부분도 그래. 내가 첫 번째 남자에 대해서는
- 그가 자꾸 말 걸고 참견한다며 민아씨가 속으로 짜증냄.
이라고 적었잖아. 그런데 민아씨는 거기에 대해
- 자꾸 말 걸고 참견해서 짜증난 건 아님.
- 며칠 간격으로 음악추천 카톡을 보낸다든가 하는 게 좀 무서웠음.
- 상대가 눈치 없이 계속 들이대는데, 그래서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음.
- 아무튼 말 걸고 참견해서 짜증났다기 보다는 섬뜩한 쪽에 가까웠음.
라고 말을 했지. 그런데 봐봐. 내가 말하고 있는 부분은,
"아니, 가까워지기 위해 연락하는 것을 무서워한다거나, 만나자는 얘기를 한다고 섬뜩하게 생각해 버리면, 그럼 뭐 방법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라는 거야. 내가 이렇게 말하면, 민아씨는 분명
"저 사람들은 썸남이 아니라 제게 대시했던 남자들인데요? 그래서 싫었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 사람이 대시해도 제가 싫으면 무섭거나 섬뜩하게 생각할 수 있잖아요."
라는 이야기를 할 거야. 그렇지? 바로 그거야! 내가 그 매뉴얼을 통틀어 민아씨에게 전했던 이야기가 뭐야?
"이건 이래서 싫고 저건 저래서 싫으면, '솔로부대의 냉혹한 비평가' 자리 말고는 다른 자리가 없습니다. 상대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며 감점할 생각하지 마시고, 채점표부터 내려놓으세요."
라는 거잖아. 이제 좀 알 것 같지 않아? 난 민아씨가, 민아씨를 위한 내 매뉴얼마저도 현미경으로 본 거라고 생각해. 그러면서
- 짜증은 아니고 무섭고 싫었던 건데 저긴 짜증이라고 적혀 있음.
- 남친 유무를 떠봐서 싫은 게 아니라, 다른 것도 싫은데 그게 가장 싫었던 것임.
라는 분석을 한 거지.
민아씨의 이번 사연에 등장하는 남자는 한 사람이니까, 이번에는 민아씨가 원하는 세세한 부분가지 한 번 이야기 해보도록 할게. 아래에서 자세히 살펴보자고.
2. 이번 사연에 대한 이야기.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에 민아씨는 습관적으로 방어를 하고 싶을 수도 있는데, 우선 아무 핑계나 변명도 하지 말고 그냥 들어봐 봐.
ⓐ 만날 생각 없는데, 누가 남자 소개시켜준다고 하자 소개 받은 것.
의견을 밝혀야 하는 바로 그 순간엔 민아씨 의견을 말해야 해. 내가 민아씨 사연을 읽으면서 가장 황당했던 게 바로 이 부분이었어.
"소개팅 시켜준다며 제 번호 알려줘도 되냐고 묻는데, 어떻게 안 된다고 하겠어요. 만약 제가 안 된다고 그러면, 그 사람이 '참나 네 번호가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네가 그렇게 잘났냐?'할 것 같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하라고 했죠."
아니, 민아씨는 신청서에 그 남자를 만나기 싫었던 이유와 함께 민아씨가 현재 연애를 할 생각이 없다는 식의 이야기까지 잘 적었잖아. 바로 그런 이야기를 저 상대에게 하면 되는 거야. 그런데 민아씨는 정작 말해야 할 순간엔 어영부영 넘어가고, 이후 속으로만 생각하거나 집에 돌아와서 혼자 합리화를 하거든.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아니면 아니다 말을 해. 바로 그 자리에서 해야 해. 멍하게 있지 마. 그게 민아씨의 연애가 계속 꼬이는 결정적인 이유야.
ⓑ 말 놓는 거 원하지 않으면서 말 놓으라고 한 것.
소개 받고 나서 상대에게 말 놓으라고 한 사람이 누구야? 민아씨잖아.
"말 놓으라고 하니까 바로 놓더라고요. 뭐, 먼저 놓으라고 한 제 잘못이긴 하지만, 그래도 엄연히 따지면 제가 그쪽의 고객일 수도 있는 건데,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에이, 어떻게 말을 놔요.'하면서 안 놓지 않나요? 저는 그럴 줄 알았는데…."
그렇게 몇 번씩 꼬아서 함정을 만들지 마. 원하는 게 아니면, 그냥 차라리 그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마. 민아씨가 일을 만들어 놓고, 그 결과에 대해 상대가 좀 잘못한 건 아니냐고 이야기를 하는 게 잘못된 거라고. 내가 민아씨에게 "새벽이라도 괜찮으니 제게 카톡을 주세요. 그러면 대답해 드릴게요."라는 이야기를 했어. 그래서 민아씨가 나한테 카톡을 보냈어. 그런데 내가 그걸 두고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새벽 두 시에 카톡을 보내나. 보통 잘 시간이라고 생각해서 안 보낼 텐데….'라고 생각하면, 이게 지금 뭐 어떻게 되는 거야? 나와 민아씨 둘 중 누가 이상한 거야? 둘 다 이상한 거야? 이 부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봐봐.
ⓒ 상대에게 마음 없다면서 만나기로 한 것.
우리가 지금까지 두 가지를 살펴봤잖아. 여기까지 어때? 두 가지 이야기 속에서 민아씨가 말하고 있는 건 '만나기 싫은데 어쩌다 보니 억지로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상대와 카톡대화에서도 기분이 좀 상하는 일이 있었다.'라는 거야. 우리 지금 같이 가고 있는 거 맞지? 잘 따라오고 있는 거지?
아주 상식적으로 생각해봐. 지금까지 민아씨가 말한 게 전부 증명되려면, 지금이라도 관계를 더 이어나가지 않으면 돼. 그렇지? 만나자는 말에 승낙하거나, 아니면 먼저 나서서 주선자와 함께 보자는 얘기를 안 하면 되는 거야. 맞지? 그런데 민아씨는 어떻게 했어? 만났잖아. 거기에 대해
"전 서로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에서, 며칠에 걸쳐 문자로 대화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해요. 만날 생각이 있는 거라면 그냥 약속 잡아서 만나는 걸 더 선호해요."
라는 또 다른 이유까지 대면서 말이야. 이래버리니까 앞뒤가 안 맞고 계속 '핀볼'처럼 흘러가 버리는 거야. 민아씨가 예전에 다른 남자와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한 부분도 봐봐.
"저는 그 분을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바쁘다고 했었어요. 그랬더니 계속 카톡대화로만 이어지더라고요."
민아씨는 자신의 생각은 전혀 안 밝힌 채, 상대가 얘기하면 다 받아줘. 그건 민아씨가 잘못하는 거야. 혹시, 둘러서 거절했는데도 그 사람이 계속 연락하는 거니까 그 사람 잘못인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야. 민아씨는 여지를 남기고, 또 상대가 착각할 만큼 반응을 해주잖아. 이번 남자와의 관계도 봐봐. 연락을 튼 이후로 둘은 매일 하루 종일 연락하지? 매일 연락하고, 또 다음 주에 만나기로 한 게 왜 문제가 되냐고? 민아씨 저 남자에게 마음 없다며. 마음 없는 남자와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 건 완전 큰 문제인 거야.
ⓓ 이 남자가 괜찮다 싶은 부분도 있다고 하는 것.
민아씨, 갑자기 또 왜 그러는 거야? 이래버리면 진짜 방법이 없어.
- 관계를 정리하려면, 주선자에게 마음 없음을 말하면 되는 걸까요?
- 그런데 또 상대와 같은 관심사에 대한 얘기를 할 땐 재미있어요.
- 그런데 이건 다른 사람과도 그런 얘기하면 재미있는 거죠?
- 이건 제가 상대에게 인간적인 호감은 있는데 이성적인 호감은 없는 거죠?
- 상대는 서비스직인데, 고객에 대한 호감인지 저에 대한 호감인지 어떻게 구별하죠?
- 다음 주에 만나기로 했는데 벌써 걱정돼요. 어떡하죠?
이 시간 이후로, 민아씨 결정에 대해서는 민아씨가 책임을 져야해. 더 이상 '원래 그러려던 건 아니다'라고 발뺌해선 안 되고, 어느 순간 잘 해 볼 생각이 식었다고 해서 그게 다 상대 탓인 것처럼 말해도 안 돼.
한 쪽 발만 담가놓곤 언제든 틀어지면 그 발을 뺄 생각을 하니, 이도저도 안 되는 거야. 최소한 허리까지는 들어가야 수영을 하든 잠수를 하든 할 수 있는 거잖아. 발목만 담그고 있으니 물가에 와있는 의미도 없어지는 거고, 또 그게 재미있는지 재미없는지도 확실히 알 수 없는 거잖아. 그러니 갈팡질팡하며 모든 경우의 수만 다 따져보려 하지 말고, 들어갈 건지 나올 건지를 먼저 정해.
나올 거라는 마음을 먹었을 땐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민아씨도 잘 아니, 들어갈 때에 대한 얘기만 짧게 적어둘게. 들어가기로 한 거라면 민아씨도 노력을 해야 해. 썸이나 연애라는 게, 상대 혼자 알아서 다 하고 민아씨는 소감문 적어 내는 거 아니잖아. 민아씨의 생각을 이야기 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은 민아씨에게도 책임이 있는 거고, 또 호불호를 표현하지 않고 그냥 팔짱낀 채 보기만 했다면 그건 민아씨가 상황을 더 안 좋게 만들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닌 거야. 그러니
"제가 선호하는 방식대로 상대가 하지 않아서 짜증났어요."
라는 이야기를 하기 전에, 그게 뭔지를 말해주고 그렇게 흘러갈 수 있도록 상대를 도와.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도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마. 민아씨가 별로 대화하고 싶지 않은 시간에 상대가 카톡으로 음악추천링크 보냈다고 해서 속으로라도 그냥 짜증내버리면 안 되는 거라고.
"세 번째 남자는, 제가 정말 할 일이 생겨서 카톡을 못 하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래서 뭐뭐 해야 하니까 카톡 나중에 하자고 보냈더니, 떨떠름하게 답장하더라고요. 감정이 묻어나게요."
카톡 전문이 포함된 게 아니라 말하기가 조심스럽긴 한데, 이번 상대와 카톡한 대화내용으로 미뤄보았을 때, 민아씨는 정색하듯 저 이야기를 했을 수 있거든. 더불어 민아씨는 자꾸 말에 뼈를 섞어서 상대에게 던지는데, 그거 상대가 바보가 아닌 이상 상대도 알아들어. 그러니까 그런 것도 하지 말고, 그냥 만났으면 좋겠어. 민아씨 친구 만날 때 그렇게까지 다 계산하고 분석해가면서 만나지 않을 거 아냐. 그렇게 만나보자고.
끝으로 하나 더. 상대에게 말하는 것도 너무 많이 생각해가면서 말하지 마.
"상대가 약속 있다고 하던데, 무슨 약속이냐고 물어보면 제가 호감이 있는 것 같아 보이잖아요. 제가 그렇게 물으면, 상대는 '누구랑 무슨 약속이 있는지 궁금해 하는구나'하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 저는 사실 그게 궁금하지 않기도 했고, 또 괜히 물었다가 오해가 생길 수도 있어서 그냥 안 물어봤어요."
그렇게 다 소수점 둘째 자리까지 구하려는 식으로 살면, 삶이 너무 힘들어질 수 있어. 소수점 떼고 반올림을 하든 버리든 하자고. 그것으로도 충분해. 지금은 민아씨가 상대에게 큰 관심이 없으니 문제가 안 될 수 있지만, 나중에 진짜 좋아하는 사람 만나면 어쩌려고 그래. 그땐 혼자 다 계산하고 재서 말하느라 딜레이 걸려서 어버버 하다가 그냥 끝날 수도 있어. 그래버리면 정말 슬퍼질 수 있으니까, 지금이라도 이성과 '사람 대 사람'의 관계를 맺는 연습을 시작해 보자고.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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