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은씨, 알겠으니까 울지 말고 천천히 얘기해봐. 그 남자가 그간 여친 없고 외롭다고 이야기를 해왔고, 또 투정 부리면 받아주고 같이 밥도 먹고 했는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내년에 결혼을 할 계획이라 지금 돈 모으는 중입니다."
라는 이야기를 했다는 거잖아. 서은씨는 저 얘기를 듣고 패닉에 빠진 채 내게 사연을 보낸 거고 말이야.
그런데 나도 이것만 가지고는 뭐라 해 줄 말이 없어. 그가 현재 여자친구가 있어서 내년에 결혼할 거라는 걸 구체적으로 밝힌 건지, 아니면 결혼하고 싶다는 얘기를 농담처럼 흘린 건지 알 수 없잖아. 이 부분에 대한 대답은 서은씨가 그에게 물어서 알아내야 하는 거지, 나에게 물어서 알 수 있는 게 아니야. 진지하게 묻기 어렵다면 지나가는 말처럼 던져 봐도 돼.
"내년 여름에 결혼하신다고요? 아니, 얼마 전까지 여친 없고 외롭다고 하시던 분이…, 요태까지 저희를 다 속이신 거예요?
정도로 그냥 던져보면 돼. 그런데 사실 저렇게 말하면, 상대는 또 "묵비권을 행사하겠어. ㅎㅎ" 정도로 답변하지 않고 넘어갈 거야. 그래서 난 그가 좀 별로라고 생각해. 그는 자신에 대한 모든 건 비밀로 둔 채, 휴가를 같이 가자는 등의 끼를 부리기도 하거든. 외롭다며 장난스레 불쌍한 표정까지 짓던 사람이 또 어느 날은 내년에 결혼 할 거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말이야. 서은씨는
"그가 내년에 결혼한다고 한 게, 여자친구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본인의 계획을 말 한 거라면, 저는 얼마 남지 않은 내년까지 어떻게 관계를 발전시켜야 할까요. 시간이 너무 촉박한데…. 도와주세요."
라고 말했는데, 난 그것보다 서은씨 자신에 대해, 또 상대에 대해 살펴봐야 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볼게. 출발해 보자고.
1. 짝사랑에 대한 태도의 이야기.
우선, 서은씨는 현재 자신이 '짝사랑'의 배역에 너무 몰입해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해. 그거 여린마음동호회 회장인 내가 언젠가 미용실에서 했던 일과 비슷한 거거든. 왜 대개 동네 작은 미용실엔 미용사가 한 명 밖에 없는 경우가 많잖아. 그래서 사람들이 오면 순서대로 기다렸다가 머리를 잘라야 하고 말이야.
난 언젠가 그런 상황에서, 내 뒤로 파마 손님이 많길래 그냥 다음에 오겠다고 하고 집에 온 적이 있어. 한 사람 파마 끝나면 내 차례였는데, 난 급한 게 아니라 다음에 깎아도 되니까 양보를 하고 그냥 집에 온 거야. 미용사 입장에서 보자면 남자 커트는 싸니까 별로 돈이 안 되는 거고, 여자 파마는 비싸니까 여자 손님을 잡고 싶을 거잖아. 그래서 그것까지 다 생각하며 혼자 고민하다 양보하고 집에 돌아온 적이 있어.
내 얘기를 듣고 나니까 어때? 뭐 이런 이상한 사고방식을 가진 채 사는 사람이 있나 싶기도 하고, 자기 권리도 못 누리는 한심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잖아. 맞아. 계속 저런 태도를 고집하며 살면, 나중엔 남들에게 권리까지 빼앗기게 돼. 몇 번 저러고 나면 미용사가
"오늘 좀 바빠서 그런데, 내일 오시겠어요?"
라며 대놓고 돌려보내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거지. 그때 가서 땅을 치며 '호이가 계속되니 둘리인 줄 아네(응?)'라며 후회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 '을'은 고사하고 '병'이나 '정'의 태도만 고집한 까닭에 저런 일이 벌어진 건데 말이야.
서은씨의 경우를 봐봐. 서은씨가 상대에게 보인 태도들로 인해, 상대는 서은씨에게 '임마체'를 쓰는 지경까지 이르고 말았잖아.(여기서 잠깐. '임마'가 아니라 '인마'가 표준어라는 걸 알지만, 여기선 '임마'라고 적도록 하겠습니다. 맞춤법 애호가 분들에겐 읽을 때마다 턱턱 걸리는 느낌이 들 수 있겠지만 조금만 양해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얼른 자 임마."
"내일 나 일해 임마."
"거기는 가지 마."
저걸 그저 '그 정도로 친해졌다'고 보기엔 좀 무리가 있어. 두 사람이 무슨 이십대 초중반의 선후배도 아니고, 사회에서 업무와 연관되어 만난 사인데 저렇게 흘러가 버린 건 좀 이상한 거거든. 나이도 겨우 한 살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 서은씨는 상대에게 '오시게요?'같은 존칭을 쓰고, 상대는 서은씨에게 '임마, 임마'하고 있잖아.
물론 저런 관계가 되면, 츤데레인 '키다리 아저씨'를 만나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순 있어. 이렇게 배역이 형성되면, 나중에 술 좀 먹고 카톡을 보낸 뒤 다음 날
서은 - 미쳤어. 제가 어제 무슨 얘기를 한 걸까요. ㅠ.ㅠ 다 잊어주세요. 그건 제가 아니에요.
남자 - ㅋㅋㅋ 알았어. 출근이나 잘 해 임마.
라는 대화를 할 수도 있거든. 저런 대화를 나누며
'우리는 빙빙 돌려 이야기 하지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있다. 그는 함축적인 뜻이 담긴 웃음으로 내 말에 답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구박하는 것처럼 거칠게 말하며 날 챙겨준다.'
하는 상상도 해볼 수 있는 거고 말이야.
그런데, 그러면 곤란해. 당장 상대에게 이것저것 묻고 신세지면 그가 챙겨주는 것 같아서 좋을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가면 갈수록 상대는 서은씨를 '다 챙겨줘야 하는 아이'정도로 보게 될 거야. 뭔가를 물었을 때 예의를 갖춰서 대답해 주기보다는 "그건 또 왜 물어 임마. ㅋㅋ"하며 장난스럽게만 답할 수 있고, 서은씨가 계속 부탁을 하면 이제 들어줄 때마다 보답으로 뭘 해줄 건지 등을 말하게 될 수 있어.
서은씨는 그렇게라도 상대와 가까워지는 걸 '서서히 친해지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건 상대가 서은씨를 얕잡아 보게 만드는 행동일 뿐이야. 위로해 달라느니, 도와 달라느니 하는 이야기를 계속 하는 사람은, 그냥 딱 그런 사람으로만 보일 확률이 높은 거라고. 그러니 앞으론 어떤 상대에게든 도움이나 칭찬을 받으려 애쓰지 말고, 그냥 서은씨라는 한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길 권할게. 주말에 시간 있냐고 물어서 만나 같이 밥 먹을 수도 있는 걸, 그렇게는 못 하고 그저 술 마시다 연락 닿으면 어디로 데리러 올 수 있냐고 묻진 말자고. 그래버리면, 최악의 경우 '이 여자는 늘 아는 남자에게 이런 식으로 연락하는 사람인가보다.'하는 오해까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까 말이야.
2. 상대에 대한 이야기.
서은씨가 들으면 힘 빠질 수 있는 얘기를 먼저 좀 하자면, 난 상대가 서은씨와 진지하게 만날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거든. 그냥 같은 회사 직원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에, 조심하고 말 것 없이 그냥 막 들이대는 거라고 생각해. '허물없는 오빠동생' 정도로 지내려고 하는 거지, 서은씨를 이성으로 보며 나름의 계획대로 움직이거나 그런 건 아닌 것 같아.
내가 이렇게 얘기하면,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본인의 계획을 말 한 거라면, 저는 얼마 남지 않은 내년까지 어떻게 관계를 발전시켜야 할까요."
라고 한 서은씨의 얘기는 의미가 없어지는 거지? 그런데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어. 단순히 위로해주자고 안 보이는 가능성을 보인다고 말할 순 없는 거잖아.
상대가 서은씨에게 한 일들은, 내 친구 A가 같은 회사 여직원에게 했던 일들과 비슷해. 내 친구 A군은 유머감각이 있으며 끼가 넘치는 남잔데, 같은 회사 여직원이랑 그 누구보다 친해져서 서로 드립치며 놀았어. 나중에 친구가 회사를 옮길 때, 여직원이
"오빠 나가면 나 무슨 재미로 회사 다녀? 나도 데리고 가."
라는 이야기까지 할 정도였지. 회사에 다닐 때에는 진짜 둘이 사귀는 사이인 것처럼,
"나 17시 사무실 복귀한다. 커피 준비 하도록. 롸져."
"붕어빵 사줄 테니까 내 출근카드 같이 찍어주셈. 서랍에 넣어놨음. 두 마리 사줌."
등의 이야기를 해가며 놀기도 했거든. 저런 달달한 얘기만 한 건 아니고
"오빠 외롭다. 주말에 소개팅 준비해 놔. 잘 되면 참치 쏜다."
같은 이야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러면 상대는
"뭐래. 나부터 시켜주면 나도 오빠 시켜줌."
라고 화답하며 또 놀았지. 물론 저기에 아무 감정도 없었던 건 아닐 거야. A군은 가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확 수정이랑 사귀어버릴까. 얘랑 나랑 진짜 잘 맞긴 하는데…. 아니야 안 돼. 걘 너무 많이 먹어."
라는 이야기를 내게 하기도 했거든. 실제로 둘이 따로 만나서 영화를 본 적도 있고 말이야.
여하튼 서은씨의 상대 역시, 서은씨와 저렇게 드립을 치며 노는 관계를 생각했던 것 같아. 그래서 처음에 막 드립을 쳐가면서 던졌던 건데, 서은씨가 그걸 다큐로 받으니 그도 좀 난감해 진 거지. 앞서 얘기한 내 친구 A군의 경우는, 소개팅을 하고 소개팅 상대와 잘 될 때 회사 여직원에게
"오빠 내일 애프터 하는데 추천 좀 해줘봐. 뭐 먹냐. 선지해장국? ㅋㅋㅋㅋ"
하며 놀기도 했거든. 그래서 어쩌면 그도 서은씨와 저런 사이로 지내려고 한 건데, 진짜로 서은씨가 '짝사랑'의 배역을 맡곤 진지하게 받아들이니 한 발 빼고 있는 걸 수도 있어. 실제로 서은씨와 상대의 개인적인 연락은 점점 줄고 연락이 닿아도 일과 관련된 대화만 나눴잖아.
그렇다고 '상대는 A군과 정확히 같은 타입입니다.'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야. 이성을 대하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으며 친밀함을 강하게 표시한다는 그 큰 범위 내에서 비슷하다는 거지, 저기서도 또 얼마든지 다른 작은 범위로 갈라질 수 있거든. 정말 여자친구가 있는 건데 그걸 숨긴 채 계속 '오피스 와이프'와 지내듯 지내려고 할 수도 있고, 서은씨가 상대에게 반했다는 마음을 가지고 서은씨를 휘두를 수도 있어. 특히 그가 내년에 결혼할 거라는 얘기를 꺼내놓고도, 그것에 대해 확실히 밝히지 않은 채 서은씨에게 연락하는 걸 보면, 혹시 다른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을 지우기 어렵고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 서은씨는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묻고 있는데, 나는 솔직히 모르겠어. 일단 난 그가 '내년 몇 월'이라고 결혼얘기를 한 게 그냥 한 말은 아닐 거라 생각하거든. 그리고 그가 끼를 부린 부분들을 보면, 의도적으로 먼저 들이댔다기 보다는 서은씨가 먼저 여지를 줘서 들이댄 게 대부분이야. 그가 들이댈 수 있게 멍석을 깐 것도, 또 그를 불러낸 것도 서은씨고 말이야.
서은씨 친구가 서은씨에게
"일과 관련해서든 사적으로 궁금해서든 먼저 연락을 하지 말아 봐라."
라고 했다고 했는데, 난 그게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 혹시 왜 요즘 갑자기 연락이 없어졌냐고 상대가 물어보면, 내년에 결혼하실 분에게 자꾸 연락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라고 대답하면 돼. 나쁘게 보자면 상대는 '긍정의 부정의 대답도 안 해서 책임질 일 안 만들기'를 하고 있는 거거든.
그에게 여자친구가 있고 내년에 두 사람이 결혼 하는 게 맞다면, 그가 한 말은 사실이니 그는 분명 밝힌 거야. 그리고 서은씨가 그게 정말이냐고 물었을 때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며 장난으로 넘기면, 그는 '아니라고 한 적은 없는 것'이 되는 거야. 게다가 그 와중에 서은씨가 그에게 연락하고 또 전화해서 불러내고 하면, 그건 서은씨가 불러낸 게 되는 거야. 그가 보이는 불분명한 태도를 근거로 부정적인 예측을 해보자면, 예상되는 시나리오가 딱 이런 거거든. 그래서 난 서은씨가, 더는 휘젓지 말고 그냥 둔 채 이 관계를 좀 바라봤으면 좋겠어.
나중에 상대가 아닌 다른 사람과 만나게 되더라도, 수동적인 태도로 지켜보며 혼자 예측만 하는 습관은 내려놓고 만나야 해. 지금 이 상대와의 관계만 하더라도 서은씨가 좀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상대가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 건지 알 수 있었을 거거든. 상대가 도와준 것도 많으니 밥을 한 번 산다고 해도 됐던 거고, 아니면 영화 한 편 같이 보자고 해도 됐던 거야. 하지만 서은씨는 상대가 뭘 어떻게 하나 지켜보기만 하며
"상대의 속을 모르겠음."
이라는 말을 할 뿐이었잖아. 서은씨는 그걸 '홀로 마음속으로 사랑을 키워가는 것'이라고 말하던데, 아니야. 그건 '현실의 상대를 상상 속으로 끌어들여 마음대로 시나리오 쓰기 시작하는 것'일 뿐이야. 그러니 속으로만 여러 생각을 하지 말고, 말과 행동으로 조금씩 표현해가길 권할게. 그저 지켜보기만 하다가 뭔가 잘못된 것 같으면 소개팅을 한다느니 하는 말로 상대를 자극하려 들다 다 망쳐버리는 사례들도 많으니까, 서은씨는 그 사고다발지역을 피해갔으면 좋겠어. 내 맘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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