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도록이면 사연은 결혼 전에, 결혼을 했다면 결혼사진액자를 부수기 전에, 짐 싸서 집 나가기 전에 주셔야 합니다. 저런 일들을 다 겪거나 저지르고 난 뒤, 이제
"어디 한 번 끝까지 해보자. 이러면 누가 더 손해인지 보자."
라는 말까지 오가는 '악만 남은 상황'에서 사연을 주시면, 제가 담배를 끊긴 더더욱 어려워집니다.
사연이 심각한 만큼, 저는 오늘 필터링이나 안전장치 없이 이야기를 할 예정입니다. 그래서 부끄럽거나 불쾌하실 수 있는데, 그렇다고 부정하시려 들거나 분노만 하시진 마시고, 멀리서 볼 땐 두 사람이 이렇게도 보일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출발하겠습니다.
1. S양의 남편과 가난.
미당은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노래했습니다만, 남루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 때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남루하지 않은 남들을 보는 것에서, 또는 남들이 내 남루함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에서 초연해지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와 함께라면 신혼여행을 부산으로 가든 제주도로 가든 그냥 무조건 좋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그러다 누군가
"신혼여행을? 제주도로?"
라고 물어오면 휘청일 수 있습니다. 남들이 올리는 몰디브 신혼여행 사진을 보며,
'몰디브나 모슬포나 세 글자에 발음도 비슷하니까 뭐….'
하긴 어려운 것처럼 말입니다.
저런 가난에 놓인 상황에서, 그 가난과 어느 정도 협의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현 상황에 대해 잔인할 정도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양해각서를 주고받듯,
- 의, 식, 주에 필요한 것들부터 챙긴다.
- 막연한 꿈은 꾸지 않도록 멀리 미뤄둔다.
- 뭔가를 할 때면 항상 내 상황과 처지를 다시 돌아본다.
라는 것들을 원칙으로 삼는 것입니다. 차가 있으면 편하다는 건 알지만 당장 차를 사면 감당하기 어려우니 차 사는 걸 미뤄둔다든가, 유럽여행 안 가고 싶은 사람 없으니 본인도 가고 싶지만 그랬다간 먹고 사는 것에 지장에 생기니 당장은 자신과 상관이 없는 얘기라고 생각한다든가, 뭐 그런 겁니다.
S양의 남편은 저런 생활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몰디브나 모슬포나 둘 다 바다고 둘이 가면 신혼여행인 것인데, 뭐하러 그 멀리까지 열 배 넘는 돈을 주고 다녀 오냐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차라리 그 돈으로 오랫동안 쓸 가전제품 하나를 바꾸는 게 훨씬 더 이익이 되는 거라 생각하는 듯 보입니다. 아니, 사실 가전제품도 당장은 멀쩡하니, 현금으로 가지고 있으면 그게 분명 더 현명하고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에서 가난과 체결했던 수많은 양해각서의 흔적이 보입니다. 그는 신혼여행을 가서 기념품을 사오는 것에 대해서도, 많이 사봐야 짐 무게 초과하면 돈이나 더 내야 하는 거고, 또 자잘한 선물 몇 개 사도 다 돈인 건데 뭐하러 많이 사냐고 생각하는 타입입니다. 그래서 S양이 선물을 사려고 할 때에도 하나하나 비판하며 막았습니다. 물론 그래 놓고는 나중에 돌아와 사람들 만나면 빈손인 게 머쓱해
"좀 사올 걸 그랬나?"
하는 이야기를 했지만 말입니다.
남편이 저런 사람이라는 걸 S양이 지금이라도 깨달아야 합니다. 그는 완벽하지 않으며, 그가 하는 말들이 전부 확고한 어떤 가치관에서 비롯된 게 아닙니다. 그냥 돈 나가는 일 있으면 덜컥 겁부터 먹는 거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니 그가 저런 이야기를 꺼낸다고 급격히 실망하며 "아 몰라. 됐어. 안 해."라고 대응하지 마시고, 왜 그러려고 하는지에 대한 S양의 생각을 이야기 해주시길 권합니다.
"지금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돌아가서 이러이러한 일이 생길 수 있으니까, 사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술 한 잔 할 돈이면 이거 다 사고도 남으니까 낭비는 아닌 것 같아."
라고 얘기를 하면 됩니다. 그렇지 않고 지금처럼 그 쪼잔함과 인색함에 기분 상하고 정 다 떨어졌다며 한숨 쉬어 버리면, 둘의 마찰은 늘 필연적으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단순히 감정적으로 맞서려고 하거나 '오빠가 틀렸어'라고 말하지 마시고, 설명해주시고 가르쳐주시길 바랍니다.
2. 남편은 왜 S양을 미워하고 골탕 먹이려 하는가?
남편이 S양을 점점 미워하며 어떻게든 약 올리고 골탕 먹이려는 이유는, S양이 '아내'로서의 몫을 안 하거나 못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빠는 결혼 전에, 제가 돈을 벌든 안 벌든 그 돈에 대해선 터치할 생각이 없다고 했어요."
무슨 얘긴진 알겠는데, 저 말이 그저
"넌 내가 벌어오는 돈 쓰며 즐기기만 하면 돼. 내가 버는 건 네 거고, 네가 버는 것도 네 거야."
라는 의미는 분명 아닐 겁니다. 저건 나가서 생활비를 벌지 않아도 좋으니, '아내'로서의 역할을 잘 해달라는 말입니다. 흔히들 말하는 '내조'라는 것 있지 않습니까? 남편은 그걸 기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결혼해 보니, 밥을 안 차려줍니다. 물론 S양이 사연에
"저도 차려준 적 있어요. 그런데 맛있다는 얘기도 안 하고 직설적으로 평가만 하는데, 그런 말 들으면 다음에 또 음식 하고 싶은 생각이 드나요?"
라고 적긴 하셨습니다만, 그런 일들이 다른 부분에서도 거듭되며 둘은 왜 같이 사는지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남편의 입장에서 보자면, S양은 아래의 여자가 되어버린 겁니다.
- 밥 안 차려줘서 라면 끓여 먹게 함.
- 일 마치고 집에 가면 소파에 누워 티비 보고 있음.
- 들어오든 나가든 신경 안 씀. 집에 가면 불 끄고 자고 있음.
역시나 S양은 왜 저런 일들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또 할 말이 많으실 텐데, 인과관계를 따져 누구의 잘잘못인지를 가리는 걸 잠시 미뤄두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저 '상황'만 좀 보시길 바랍니다.
"예전에 늦게 들어오면 늦게 들어온다고 전화라도 해달라고 했을 때, 남편이 그냥 기다리지 말고 자라고 해서 그때부터 그렇게 된 건데요?"
거라는 이야기를 하기 전에, 그런 모든 일들이 다 벌어지고 난 후 현재 남편이 보기에 S양은 어떤 아내일지를 한 번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현재 S양 부부는 둘의 명의로 소유한 집도 없고 은행에 빚까지 있는 상황입니다. 남편은 일을 하고 S양은 거의 전업주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또 S양은
"저도 직업이 있는데요. 벌이가 고정적이지 않고 수입이 얼마 안 되어서 그렇지만, 직업이 있어요."
라고 하실 텐데, 그럼 그건 '부업'이라고 봐야 합니다. 남편도 그 지점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S양은 그것에 대해
"현실적으론 맞는 말이지만 정말 자존심 상하고 기분 나쁘더라고요."
라고만 이야기 할 뿐입니다. 여하튼 이런저런 나름의 이유들로 인해, S양은 앞서 말한 대로 '아내'의 역할에서 많이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낮에 차를 몰고 나가 돌아다니기도 하고, 돈을 쓰기도 하고, 친구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런 모습에 남편이 울화가 치밀어 입장을 바꿔서 살자고 말하면, S양은
"가장이 돈을 벌어야지 왜 자꾸 나한테 그러냐. 나 일 시켜 먹으려고 결혼했냐."
라는 이야기를 했고 말입니다.
왜 두 사람이 계속 극단을 향해 치닫게만 되는지 명확히 보이지 않습니까?
3. 그럼 저는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하나요?
서로가 서로를 돕지 않는 결혼생활은, 둘 모두에게 지옥과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S양이 한 말을 잠시 보겠습니다.
"정말 돈이라도 많이 갖다 주고 그러는 거라면 억울하지나 않지요. 제가 돈을 펑펑 쓰기라도 하고 그런 소리 듣는 거라면 억울하지나 않지요."
그래버리면, 저런 이야기를 들은 남편 역시 -정말 유치하지만- 돈을 안 줘가며 S양을 괴롭히려 들게 됩니다. 저건 달리 말하자면 그에게 무능하고 속 좁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데, 저 말을 듣고 더 잘 해야겠다고 생각하거나 반성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없이 잘 살고 있는 어떤 부부를 보면, 아내는 남편의 손을 잡으며
"오빠가 있어서 든든해."
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제가 비교를 해가며 S양을 탓하려는 게 아닙니다. S양은 한 번이라도 저런 이야기를 한 적 있는지 생각해 보시길 바라며 하는 얘깁니다. S양은 남편에게 저런 말을 대신, 남편이 '안 해준 것'에 대해서만 분노합니다.
"다른 부부들을 보면 서로 챙기는데, 오빠는 식당에 가서 덜어먹을 수 있는 음식이 나와도 지 밥그릇에 혼자 딱 퍼서 먹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와이프도 좀 챙겨라'라는 이야기를 할 때, 그럴 때 전 정말 울컥할 때도 있습니다. 그제야 '먹을래?'이러면서 담아주려고 하고…."
속상한 건 알겠습니다만, 저럴 때 '복수'를 생각하시거나 엎드려 절 받고 싶진 않다는 생각으로 굳은 표정을 하면 안 됩니다. 늘 '잘 되는 방향'을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애교를 좀 부리며 떠 달라고 말하며 가르쳐줘도 되고, 먼저 남편의 그릇에 음식을 덜어주며 모범을 보여줘도 됩니다.
S양도 남편이 오랜 자취생활로 살림 더 잘해서 잔소리를 해대니, 그때 짜증나고 다 하기 싫어졌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S양이 '못 하는 부분'에 대해 남편이 화부터 내니 짜증났듯, 바로 저 지점이 '남편이 못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럴 땐 말에 뼈를 담아 들으라는 듯 한 마디 하거나 남편을 탓하기 보다는, S양의 기분이 어떤지에 대해 부드럽게 이야기를 해주시길 권합니다. 장담하는데, "오빠 입만 입이지."라는 말을 하는 것보다, "오빠 나도! 아리가또."하는 게 훨씬 현명한 일입니다. 전자의 멘트를 하면 미움만 살 확률이 90%이상인 것이고 말입니다.
상대를 더 약 올리기 위해 일부러 '미운 짓'을 한다거나, 치킨게임을 하려 드시면 안 됩니다. 남편이 참 멋도 없고 전혀 여자에 대한 학습이 되어 있지 않은 까닭에, 분위기를 풀려 해도 그게 '여자를 더욱 열 받게 만든 일'이 되어버린다는 걸 저도 압니다. 아는데, 어쨌든 평가해서 낙제처리 시킬 것 아니면 가르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남편이 정말 어이없게, 싸우고 나서 먹을 게 없으니 치킨 시킨 뒤
"나와. 나와서 먹어. 치킨 안 먹어? 나와~"
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믿기 어렵겠지만 저게 그에게는 '화해'의 제스처 입니다. 하지만 남편의 저런 태도에 더 화가 난 S양은 아예 대답도 하지 않았고, 자리를 피해 밖으로 나가버리기까지 했습니다. 나중에 집에 들어갔을 때 남편이 잠을 자고 있자, S양도 배달음식을 시켜 홀로 술을 마셨고 말입니다.
이쯤 되면 정말 갈 데까지 가보자는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둘이서 이렇게 부수고 망쳐 놓으면, 이걸 누가 복구시켜줄 수 있겠습니까. 저런 상황에선 우선 상에 같이 앉아 남편에게 닭다리 하나 쥐어주고, 치킨 먹다가 울면 됩니다. 대답도 안 하고 우는 거 말고, 그냥 울며 남편에게 안기면 됩니다. 대답도 안 하고 울고 있으면 남편이 그걸 '스트레스'로 여기겠지만, S양이 안기게 되면 남편은 자신이 보호할 대상이 S양임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S양의 바람대로 꼭 안아줄 수도 있을 것이고 말입니다.
두 가지 더. 저는 S양이 직장에 다니길 강력하게 권하고 싶습니다. 현재 S양은 남편의 가게로 가서 얼마쯤 일을 돕다가 계속 싸우는데, 죄송하지만 남편은 같이 일하기 순조로운 타입이 아니며, 서로에 대한 불만이 가득한 상황에서 둘이 일을 해봐야 싸우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는 뭔가를 친절히 설명해주기 보다는 일단 짓누르고 갈구는 스타일이니, S양만의 직업을 찾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직업을 통해 얻은 수입을 둘의 생활에 보태시길 권합니다. 남편에게는 S양도 생활에 보탬이 되고 싶다고 미리 이야기를 하는 게 좋습니다.
또, 둘의 공동 목표를 세우시길 권합니다. 당장은 둘이 얼마씩 얼마쯤 함께 모아 집을 구입하는 걸 목표로 삼으면 될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이 현재 얼마의 빚이 있고 벌이가 어느 정도 되는지를 파악하는 게 좋습니다. 남편이 하는 가게의 특성 상 많이 버는 계절이 있고 또 적게 버는 계절이 있으며, 그 중에서도 또 많이 버는 날과 적게 버는 날이 있는데, 그것까지를 함께 체크하시길 권합니다. 그냥 있으면 쓰고 없으면 말고 하는 생활을 하거나, 이렇다 할 목표 없이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건, 둘 모두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끝으로 하나만 더. 이렇게 적어 놓으면 S양만 잘못을 한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그건 S양이 보낸 사연이고 매뉴얼을 읽을 사람도 S양인 까닭에 그렇다는 것을 밝힙니다. 이 모든 문제가 발생한 근원에는 S양을 알바생 취급하는 남편의 태도와 밖에 나가 아내 흉까지 보는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더불어 S양의 남편은 현재도 '아내 개조'라는 명목으로 투박하고 매정한 방법을 사용 중인데, 그것 역시 이 관계를 파탄으로 이끌어 가는 것에 한 몫 하고 있습니다. 다만, 지금 해야 할 건 잘잘못의 비중을 따지는 게 아니니, 모쪼록 좋은 합의를 이끌어 내시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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