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이 남친과 사귄 지는 이제 갓 100일 정도 되었고, 둘은 일주일에 한 번 만난다고 했으니 만난 횟수는 열 몇 번 밖에 되질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은 성실한데, 만약 결혼을 하게 되면 제가 너무 외로울 것 같아 걱정입니다. 일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항상 바쁜 걸 보면 책임감도 있어 보이긴 하지만…."
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김칫국 드링킹일 뿐만 아니라 '상대와 사귀기로 한 선택' 하나에 남은 인생을 모두 걸려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연애 사연을 9년쯤 받다 보면 이후 그 사연의 주인공들이 어떤 일을 겪게 될지에 대한 그림이 좀 그려지곤 하는데, 이대로라면 김양은 앞으로 두 달 보름 정도 후에 이별하게 될 것 같다고 난 조심히 예측을 해본다. 또, 김양이 인기가 많은 까닭에 다음 연애를 시작하는 것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이후의 연애도 순탄치만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내가 왜 이런 예상을 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예상을 빗겨 나가기 위해 알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아래에서 함께 살펴보자.
1. 남자가 '바쁘다'고 말하는 이유는?
남자가 '바쁘다'는 이유로 여자친구를 안 만나려 한다면, 그건 대략 아래와 같은 경우 중 하나 또는 그 이상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 정말 일이 많은 경우.
ⓑ 연애도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
ⓒ 상대에게 질리거나 지친 경우.
ⓓ 유부남이거나 양다리 중인 경우.
ⓔ 연애보다 다른 것에 더 마음을 두고 있는 경우.
김양 남자친구의 경우, 5할은 'ⓐ 정말 일이 많은 경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김양도 알겠지만, 고액연봉자의 경우 상상을 초월하는 업무량과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근로기준 속에서 일하는 경우가 있다. 많이 주는 만큼 많이 굴리는 거라고 할까. 취직하고 나면 주어진 업무를 하는 것으로 정착되는 보통의 경우와 다르게, 무슨 평가를 받고, 무얼 수료 하고, 어떤 연수를 받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나머지 5할 중 4할은 'ⓑ 연애도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에 속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건 주로 연애 경험이 없거나, 이성과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지 않았거나, 이성과 만나면 뭐든 자신이 리드하거나 조언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부분이다. 김양이 수동 기어 차량 운전에 자신이 없어 하는데 내가 김양에게 그런 차량 운전을 부탁하면 부담스러워 하게 되는 것과 같고, 나와 김양 둘 중 김양만 운전을 할 줄 아는데 내가 차 몰고 지방에 다녀오자고 하면 김양이 부담을 느끼게 되는 것과 같다.
서로가 생각하는 연애의 모습, 또는 서로의 성향이 많이 다를 때에도 위와 같은 느낌을 갖게 될 수 있다. 내가 김양의 친구인데 아랍음악을 좋아한다고 해보자. 그래서 난 김양을 만날 때마다 아랍음악을 함께 들으며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한다. 그러면 아랍음악을 듣고도 아무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김양은 그 만남을 피하고 싶어지지 않겠는가? 이처럼 연애가 '만나면 그저 상대를 대접하거나 상대의 취향에 맞추는 봉사를 해야 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 상대는 다른 핑계를 대 만남을 회피하려 들기도 한다.
그리고 나머지 1할은, 'ⓒ 상대에게 질리거나 지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엔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김양이 사진전에는 별 관심이 없는데, 내가 만약 김양이 야근까지 한 어느 날 심야 전시가 있다며 같이 사진전에 가자는 말을 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럼 김양은 안 간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없으니 '다음번에 가자'고 대충 약속을 미룰 것 아닌가.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남친이 김양과의 만남을 점점 회피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2. 김양이 실수한 부분은?
아무래도 상대가 바빠서 한 주에 한 번 정도만 보게 되고, 그 한 번마저도 못 보고 넘어가는 주까지 생기다 보니, 필연적으로 김양에겐 서운한 부분이 생기고 '다음 데이트'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던 것 같다. 때문의 둘의 대화에선 김양이
"그럼 토요일에 못 본다는 말이야?"
"두 주나 못 본다는 게 이해가 안 돼."
"내가 보자고 할까봐 미리 방어하는 것 같네 ㅋ"
라는 이야기를 하는 일이 늘었고, 실제로 상대는 '미리 방어' 하는 듯한 태도로 "그런데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음"등의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또, 그렇게 '데이트'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다 보니, 데이트 시 잠깐이라도 상대가 김양에게 집중하지 않거나 모든 신경을 김양에게 쏟고 있지 않으면 김양은 서운해지게 되었다. 김양은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오빠도 날 보고 싶었다는 걸 표현하고 내게 한 마디라도 더 하고 싶어 하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식당에서 나와 폰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이동하는 과정에서도 손잡고 장난치고 하는 것 대신 두리번거리거나 별 말 없이 걸었던 것이다. 이것에 대해 상대는
"내가 예약한 곳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느라 폰을 봤던 거다."
"나도 안 가본 곳이라 어느 쪽인지 방향을 몰라서 찾아본 것이다."
라는 변명을 하긴 했지만, 비싼 요리집이나 맛집을 가고 싶은 게 아니라 상대가 관심과 사랑의 표현을 해주길 바랐던 김양에겐 그 말이 와 닿지 않았다.
그런데 저 상황을 또 상대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다 동선을 짜야 하고 찾기까지 해야 하는 와중에, 김양이 무엇에 화가 났는지 말 한 마디 안 하며 차에 타서도 남남인 것처럼 창밖만 보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그렇게 예약한 식당에 도착해서는 또 김양이 입맛 없는 사람처럼 깨작거리다 젓가락 놔 버리니, 상대는
'지금 내가 여기 나와서 얘랑 뭐하고 있는 건가? 차라리 혼자 집에서 쉬는 게 나을 것 같다.'
라는 생각까지를 하게 될 수 있다. 상대가 보기엔 '데이트, 데이트' 노래를 부르던 김양이, 막상 만나면 사람 고문하러 나온 사람처럼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상황만 만드는 것 같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선, '데이트'만이 본편이라고 생각할 게 아니라, 평소에 둘이 나누는 카톡대화와 전화통화 역시 본편이라고 생각하길 권해주고 싶다. 두 사람이 카톡대화를 하는 걸 보면 형식적인 안부인사와 별 의미 없는 이야기만 잠시 나누고 마는데, 그 순간에도 둘의 연애는 진행되고 있는 거다. 만나서 함께 노는 데이트가 아닌 연락이라고 해서, 밥 잘 먹으란 얘기, 잘 자란 얘기, 좋은 하루 보내라는 얘기만 하지 말고, 그 순간에도 대화를 나누길 바란다.
대화도, 되도록이면 '실시간'으로 나누길 권해주고 싶다. 현재 둘은 남친이 바쁜 시간에 김양이 카톡 하나 보내고, 그럼 그걸 보고 남친이 한참 후에 답장 하고, 김양도 또 한참 후에 남친의 답장에 대답하고 그런 식으로 대화를 나눈다. 그러다 보니 질문을 할 때의 감정도 사라지고, 나중엔 의무적으로 응답할 뿐인 대화가 되어가는 것 같다.
또, 카톡대화에 적힌 걸 보면 남친이 전화를 할 때 김양이 다른 통화를 하느라 전화를 안 받는다는 이야기가 계속 등장하던데, 그게 일부러 그러는 것이든 아니면 정말 다른 사람과 전화를 하느라 그런 것이든, 앞으로는 둘이 마음 놓고 통화할 수 있는 시간을 꼭 만들었으면 한다.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기지만, 난 김양이 상대가 바빠서 잘 못 만나고 같이 놀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에 짜증이 났다는 건 확실히 볼 수 있었지만, 김양이 정말 상대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어서 보고 싶어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남친을 정말 보고 싶은데 못 봐서 그게 정말 불만인 사람처럼 말하지만, 그렇게 보고 싶다는 남친을 보러 김양이 남친 회사에 찾아가거나 남친 동네로 찾아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은데, 내가 김양을 오해하고 있는 걸까?
3. 남친의 치명적인 문제.
<가시나무>라는 노래는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라는 가사로 시작하는데, 나는 저 노래를 김양 남친의 현재 인생 주제곡으로 삼아도 별 무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본인에게 70%의 신경을 기울이고 있고, 30%쯤을 가족이나 연인, 또는 친구에게 할애하고 있다.
저렇게 살면 외로워지지 않겠냐고 묻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남에게 손 벌리며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 찾아오면 외로워질 수 있겠지만, 그런 상황이 찾아오지 않으면 그냥 또 모른 채 어느 정도 잘 살 수 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그만큼의 대우를 받고 회사에서 인정받는다면, 사내 인맥과 몇몇 지인들과의 얕은 대인관계로도 퇴직 전까지는 얼마든 생활이 가능하니 말이다.
언젠가 매뉴얼에서, 자신은 당장 끼니걱정 하면서도 결혼하는 친구에게 '이런 게 우정이다'라며 냉장고를 선물해준 누군가의 사례를 이야기 한 적 있는데, 그것과는 정 반대의 입장에서 서 있는 사람과 같다고 보면 될 것 같다. 토요일에 회사 사람들과의 약속이 있어 결혼식엔 못 가지만, 축의금을 보냈으니 그것으로 충분히 표현은 된 거라 생각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김양 남친이 가진 연애관, 결혼관에서도 저런 태도가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충분히 한가하고 여유로울 때 연인과 만나 데이트를 하면 되는 거라 생각하며, 그런 연인과 결혼하면 연인은 '내조'에 힘을 쏟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순종적인 태도로 가사와 육아를 해내는 것이 배우자의 제 1조건 이라 생각하는 거라고 할까.
때문에 그에겐 일주일에 한 번 만나도, 그게 겨우 네 시간의 만남이어도, 자신은 만나러 나왔고 또 자신이 식당을 예약하고 비용을 다 지불했으니 그것으로 충분한 거라 생각할 수 있다. 또, 일 때문에 한 주를 넘기고 두 주 만에 만나게 되더라도, 서로의 얼굴을 못 보는 건, 상대만 자신을 못 보는 게 아니라 자신도 상대를 못 보는 건데, 그게 왜 자신만의 잘못이고 자신만 미안해해야 하는 건지를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저런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건, 정말 좋아하며 함께하고 싶은 사람과 만나던 중 자신이 최선을 다하지 않아 결국 상대가 이별을 고했을 때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에겐 그런 경험을 할 일이 없었던 것 같고, 오히려 구여친이 미련을 가지고 연락을 해오는 일만 벌어지니 더더욱 그 부분엔 무감각해진 것 같다. 예컨대 여친에게 이기적인 태도만 보이다 헤어진 남자가 있다고 해보자. 그런데 그 이별 후, 오히려 상대가 매달리며 재회요청을 해오거나 다른 부탁들을 한다. 그럼 그 남자에겐 자신의 '이기적인 태도'에 대해 돌아볼 아무 계기나 기회도 안 생기는 것 아닐까?
난 사실, 김양이 상대의 바쁨과 만남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를 단 한 번이라도 지적했다면, 이 관계가 이미 끝났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김양의 높은 자존심과 상대라는 사람에 대한 적은 애정이 그런 지적을 자체통제하게 만들었고, 때문에 둘은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 가는 연애를 이어오게 되었다. 만약 김양이 내 동생이었다면, 내가
"야, 스터디 모임도 한 주에 한 번은 봐. 장거리 연애도 아니고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살고 있으면서 앞으로는 한 달에 두 번 정도만 보자고? 나와, 나와. 그거 못 쓰는 거야. 아무런 노력도 희생도 하기 싫은 거라면 혼자 살라 그래. 한 달에 두 번이라는 것도 네가 그렇게라도 만나고 싶다고 주장하니까 그렇게 된 건지, 그런 얘기 안 하면 쟤는 분기에 한 번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할 걸?"
이라는 이야기를 했을 게 분명한, 그런 연애를 말이다.
두 사람이 함께 가고 싶은 곳이 없고, 억지로라도 함께 갈 곳을 정해 같이 가더라도 그곳에서 서로를 마주보았을 때 행복하지 않다면, 그런 연애는 대체 왜 해야 하는 건지 곰곰이 생각해 보길 권해주고 싶다.
물론 사랑이 밥 먹여주는 게 아니니, 그런 연애나 결혼은 그저 생명보험 들고 다달이 보험료 내듯 미래가 보장된 사람과 만나 최대한 맞춰가 보는 거라 여길 순 있다. 다만, 그런 생각을 하는 분이 있다면, 난 당장 그 조건으로 가입하더라도 보험료가 계속 갱신되어 올라갈 수 있고, 보장이 줄어들어도 해약하는 것 말고는 딱히 항의할 방법이 없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해드리고 싶다. 결혼 후 일주일 단위로 아주 적은 생활비만 주며, 거기에 대해서도 빠짐없이 가계부를 쓰라고 말하는 사례도 있다는 말과 함께.
김양은 '새로운 사람을 만날지, 아니면 이 관계에 좀 더 노력을 해봐야 할지'를 고민한다고 하셨는데, 난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그의 이기적인 통보에 김양이 어떤 느낌을 받는지, 그리고 그가 '난 원래 그래'라는 이야기를 하는 게 김양에게는 어떻게 들리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봤으면 한다. 그게 설령 이 관계에 큰 영향을 끼치진 못한다 하더라도, 김양에게는 큰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그리고 다음 연애를 하게 될 땐, 두 번째 단락에서 말한 김양의 실수들을 반복하지 않길 바란다. 행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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