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양은 신청서에
"무한님께서는 아마 제 사연을 읽으시면서 '그래서 문제가 뭐지?'라고 생각하실 것 같네요."
라고 적었던데, 왜 나를 그렇게 2, 4, 6, 8, 10으로 보는가.(띄엄띄엄 보냐는 얘기다.) 만두를 10년 쯤 빚다보면 반죽을 쥐기만 해도 무게를 알 수 있는 것처럼, 나 역시 이젠 신청서만 읽어도 그 기저에 깔린 문제들이 마치 내가 경험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느껴져서 괴로운데 차라리 만두를 빚을 걸 그랬나.
그러니까 J양이 말하고 싶은 건, 남친이 잘해주긴 하지만 그게 꼭 J양이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규격화 되어 있는 친절과 호의를 베푸는 것 같다는 것 아닌가. 더불어 남친이 말로 하는 애정표현과 그의 행동과의 차이가 보이기에 그 지점이 혼란스럽다는 것이고 말이다.
그런 와중에 J양은 연애를 제대로 해 본 적 없기에 보통의 연애가 다 이렇게 진행되는 것인지, 혹 J양에게 문제가 있어 애먼 사람을 의심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이런 기분이 들지 않는 연애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등을 궁금해 하고 있는데, 그걸 알고 싶다면 잘 찾아온 거다.(응?) 진단 끝났으니 아래에서 결과 보며 이야기를 해보자.
1. 두 사람의 만남을 멀리서 다시 보기.
연애 중 남자들이 '자기과시'를 추구하는 경우가 많긴 하다. 여자친구에게 꽃다발을 선물할 때, 꽃다발을 받은 여자친구가 행복해할 걸 상상하기도 하지만, 더불어 그런 행복을 자신이 만들어줬다는 것에 더 뿌듯함을 느끼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니까 이런 걸 생각해 낼 수 있고, 나니까 이런 걸 해주는 것이며, 나니까 이런 행복들을 만들어 줄 수 있는 거라는, 일종의 '자뻑'이 포함되는 거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늘 저런 모습만을 보이는 건 아니다. 전화통화만 보더라도, 그때는 둘의 마음과 마음이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지, 전화통화 중 어떻게든 자신을 과시하려고 하거나 여자친구에게 인정만 받으려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같이 차를 타고 갈 때나 길을 걸을 때, 또는 마주 앉아 밥을 먹을 때 역시 '열정과 추진력' 보다는 '경청과 이해'가 필요하기에, '남자친구 대 여자친구' 보다는 '사람 대 사람'의 관계를 맺는 것이라 할 수 있다.
J양이 '남자친구가 날 사랑하는 게 맞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는 건, 그가 '열정과 추진력'은 있지만 '경청과 이해'가 없고, 이 관계를 오로지 '남자친구 대 여자친구'의 관계로만 생각할 뿐 '사람 대 사람'으로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를 보이는 남자들은 대략 아래의 세 가지 유형 중 하나, 또는 그 이상에 속할 가능성이 높다.
A. 연애가 하고 싶어 무작정 들이댔는데 운 좋게 사귀게 된 남자.
B. 자신이 가진 연애 판타지를 이 관계에서 실행하려는 남자.
C. 여자를 공략의 대상으로 생각하며 레벨업에만 신경 쓰는 남자.
연애 중인 J양에겐 미안하지만, 난 J양의 남친이 저 세 가지에 모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소개팅 좀 시켜달라는 걸 빌미로 접근한 건 A에, 연애 시작 후 스킨십과 관련된 부분에서 J양의 의사와는 관련 없이 밀어붙이는 건 B에,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와 허세가 섞인 이야기들을 하며 당장 J양을 안심시키려고 하거나 호감만 얻으려 하는 건 C에 해당한다.
J양은 '남친이 정말 나라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 연애를 시작한 게 아니라, 여자친구가 필요한데 그게 내가 된 것 같다'고 했는데, 내가 봐도 그렇다. 그가 J양에게 대시할 때에도 'J양이어야 하는 이유'는 없었고, 연애 중인 지금도 그런 이유는 보이지 않는다. '만약'이란 가정은 별로 좋은 게 아니지만, 만약 J양이 친구를 소개시켜줘 그 친구와 잘 이어졌다면, 그 친구와 똑같이 사귀고 있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남자인 내 입장에서 보자면, 그는 그냥 막 던졌던 거다. 그가 소개팅을 시켜달라고 하면 J양은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후 정말 자신의 친구 중 싱글인 친구를 찾아보려 애쓰기까지 했는데, 그렇게 막 던져도 다 받아주니 그는 계속 더 던졌던 거다.
"주말에 같이 술 한 잔 하죠. 우리 술 마시면 그 날부터 사귀는 거예요."
라는 식으로 말이다. 내일 내게 연락해라, 모레 나를 위해 무얼 좀 해라, 라는 식으로 그가 능청스럽게 던지면 J양은 그걸 다 받아줬고, 그러다 결국 연애까지를 시작하게 되었다.
2. J양 남친에 대해 냉정하게 살펴보기.
J양은 남친이 J양에게 대시했으니 그가 '구애자'의 입장에 있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여기서 보자면 오히려 그는 자신이 '선택자'의 입장에 있었다고 생각하는 듯 보인다. 자신의 재치와 능청에 J양이 넘어온 것이라 생각하며, 그는 여자친구를 '내 작업의 결과로 얻은 트로피'처럼 생각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트로피를 내보여 자랑하고 싶어 하긴 하지만 트로피 자체에 대한 애정은 찾아보기 힘들다고 할까.
그의 가장 큰 결점을 볼 수 있는 것은 '스킨십과 관련된 부분'이다. 그는 사귀기로 했으면, 자신이 욕구를 느낄 때 언제 어디서든 여자친구에게 손을 뻗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듯 보인다. J양이 곤란해 하거나 거절해도 그는 시간과 장소를 불문한 채 스킨십을 시도하는데, 그게 귀엽게 봐줄 수 있는 터치 정도가 아니라 성추행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J양이 밀어내도 그는 힘으로 J양을 제압하고, 이러지 말라고 부탁해도 그는 자신의 뜻대로만 밀어 붙인다.
남친이 늘 칭찬을 하고, 훗날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리드하고, 박력 있게 밀어 붙이는 모습을 보이니 그것에 J양이 설렜을 수 있다. 그런데 그게 좋게 봤을 때 그런 거지, 나쁘게 보자면 그건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이고, 자기 과시를 위해 허세를 부리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둘 중 어느 쪽으로 보는 게 맞는 건지를 알아보려면, 아래 세 가지를 살펴봐야 한다.
- 그의 말과 행동은 일치하는가?
- J양이 의사표현이 받아들여지는가?
- J양이 그러면 길길이 뛸 일을, 그 자신은 아무렇지 않게 하지 않는가?
두 사람은 사귄 지 한 달 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남친의 태도에서는 '말과 행동의 불일치'와 'J양의 의사표현 무시'가 보인다. 세 번째 항목에 대해서도, J양이 철저하게 올곧은 생활을 하고 있기에 아직 문제가 터지지 않은 거지, J양도 상대가 하듯 술자리 이후 연락두절이나 피곤을 핑계로 한 연락두절 등을 하게 된다면 곧바로 갈등이 생길 거라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건 그가 이미 J양에게도 말한 적 있는 부분인데, 이 부분만 봐도 J양이 왜 그에게서 큰 애정을 느끼지 못하는지 알 수 있다. 그는 J양의 매력이
"착하고 말 잘 듣는 것. 바르게 자란 것."
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의 연애관은 '여친은 내 말 잘 듣고, 허튼 짓 안 하며, 내조 잘 하면 된다'는 것 같다. 동시에 자신은 이미 여자친구를 가졌으니, 지켜야 할 의무나 원칙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고 말이다. 남친의 이런 태도가, J양이 '진열장에 덩그러니 전시되어 있는 느낌'을 받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3. J양의 문제, 그리고 이 관계의 해결책은?
J양은 착하고, 긍정적이고, 화를 잘 내지 않는다. 내가 J양의 지인이라고 가정했을 때, J양에게 책을 빌려간 뒤 이런저런 핑계로 돌려주지 않아도, 내 마음 상할까봐 J양은 돌려달라고 계속 독촉하진 않을 것 같다. 천부적인 양보와 이해와 인내를 타고난 듯 보일 정도다. 신청서를 적어 내려간 글자 하나하나에서까지 J양이 착한 사람이라는 게 느껴진다.
다만 하나 안타까운 것은, 그 착함의 근본에 회의주의적인 태도가 깔려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거다. 정말 괜찮아서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괜찮지 않다고 말해봐야 서로의 감정이 상하고 얼굴을 붉히는 일까지 이어질 수 있으니 그냥 괜찮다고 말하는 거라고 할까.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또는 갈등을 만들지 않기 위해 금방 포기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에 최적화 된 것 같다. 온화하며 큰소리 내지 않고 도란도란 이야기 하는 것으로 소문난 안동 장(張)씨인 나도 그런 편이긴 한데(응?), 그러면 상대와 부딪혀 다칠 일은 없지만 혼자 삭히느라 속이 새카맣게 탈 수 있다. 특히 연애에서 그런 태도를 보이면 그게 상대의 오만이나 근자감을 키우게 될 수 있고, 내가 포기하거나 참는 것으로 관계를 유지하다보면 괴상하게 변한 관계 속에서 고통을 받게 될 수 있다.
"남친도 타인이기에, 저와 100% 같을 수는 없다는 걸 잘 알아요. 하지만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며 넘기다가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저라면 절대 그럴 것 같지 않은 일들을 남친은 아무렇지 않게 할 때가 있거든요. 그래도 마음을 다잡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해 보려고 노력 중입니다. 어렵긴 하지만요."
연애엔 이해하고 맞춰가 보려는 노력이 필요한 게 맞다. 그게 분명 필요하긴 한데, 이해하고 맞춰가 보려고 노력해도 안 되면 헤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또, 그 과정에서 상대가 앞뒤 안 맞는 이야기로 변명을 늘어놓거나, 궤변을 앞세워 자신의 의무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그때 역시 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연애를 시작했으니 이별통보를 받기 전까진 무조건 맞춰가고 이해해야 하는 거 아니고, 상대와 연인이 되었다고 해서 몇 년 사귀다 무조건 상대와 결혼해야 하는 거 아니다. 상대가 선을 지키지 않는다면, 오늘 저녁에라도 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상대는 J양과 사귀기 시작했을 때,
"난 '원래'라는 말을 싫어한다. '원래'라는 건 없다고 생각한다."
라고 말했다. 하지만 상대 자신이 잘못을 했을 때, J양이 그 부분을 지적하자
"이건 원래 그런 거다. 나 원래 이런 거 알지 않냐."
라고 대답했다. 이런 게 바로 '앞뒤가 안 맞는 말'이다. 권위주의적인 사람은, 자신이 타인에 대해 지적할 땐 이상적이고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지만, 반대의 경우엔 '이 정도도 이해 못 해주냐'라며 또 상대의 이해심을 비판하기 마련이다.
또, 그는 J양에게
"내가 너와 만나는 건 시간을 투자하는 거고, 만약 헤어진다면 너보다 나이가 많은 난 큰 손해를 보는 거다. 난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도 너를 만나고 있는 거다."
라고 이야기 했는데, 저 따위 얘기를 그냥 듣고만 있으면 안 된다. 정말 좋아서 만나는 관계가 맞다면 왜 거기서 손익을 따지고 있겠는가. 절대 저런 이야기에 세뇌되지 말고, 앞서 말했듯 언제든 상대가 선을 넘으면 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길 권한다. J양이 이별을 말하면 상대는 별 핑계를 다 대서라도 J양이 '나쁜 여자'인 것처럼 말할 가능성이 높은데, 그땐 늘 그렇게 몰아가는 상대의 태도 때문에 더 사귈 수 없는 거라고 대답해 주길 권한다.
하나 더. 지금 안 되다면, 분명 '나중에'도 안 될 가능성이 높은 거다. 상대가 말하는 결혼 후, 5년 후, 10년 후의 일 같은 것은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며, 그런 말보다는 현재 상대가 보이는 태도를 보길 바란다. 같은 지점에서 계속 문제를 일으키고 있진 않은지, 행동으로 말을 증명하고 있진 못하진 않은지, 궤변으로 무책임을 정당화하고 있진 않은지 보자. 그는 궤변을 늘어놓다가도 J양이 정확하게 지적하면
"그래서 내가 잘못했다고 하잖아. 미안하다고."
라는 말로 빠져나가곤 하는데, 앞으로 세 달 이내 저 말이 세 번 이상 등장하면, 그건 뒤도 돌아보지 말고 헤어져야 한다는 신호임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이미 눈치 챘겠지만, 난 이 관계를 부정적으로 본다. J양은 상대에게 자신이 고민하는 부분에 대해 털어 놓은 적 있는데, 상대는 일단 그 얘기를 전부 수용하겠다고 대답하며 친구들과의 술자리에 갔다. 난 그의 태도를 보며,
'저건, 일단 무조건 수용하겠다고 대답해 안심시키곤 자기 할 것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걱정이 되기도 한다. 지금이야 연애 극초반이니 상대가 무조건 수용하겠다는 자세를 보이겠지만, 시간이 좀 지난 후에는 상대가
"네가 말하는 부분 다 지켰는데 뭘 어떻게 까지 하라는 거냐. 왜 이렇게 바라는 게 많냐. 나는 너에게 뭘 어떻게 하라고 말한 적 없는데 너는 왜 자꾸 내게 바라기만 하는 거냐."
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정확히 따지자면 J양은 '알아서 잘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으니 지적할 게 없는 거고, 상대는 싱글일 때처럼 살며 여자친구가 트로피 인양 장식장에 넣어 두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지적받게 되는 건데, 이걸 두고 '너는 왜 그렇게 바라는 게 많냐'고 하면 대화가 불가능해질 수 있다.
J양이 헤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남자친구와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최대한 서로 상처 받지 않고 잘 지내는 방법' 등을 물은 까닭에, 결론을 내기가 힘들다. 난 내가 체크한 모든 부분들이 이별을 권하고 있다고 적어두고 싶다. 하지만 이렇게만 말하면 J양이 시무룩해할 수 있으니, 억지로라도 J양이 원하는 '해결책'을 좀 적어두어야 할 것 같다.
J양 혼자 답을 구한 뒤 남친에게 지키라고 하지 말고, 그에게 J양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부분들에 대해 이야기 한 후 남친의 답을 듣길 권한다. 또, 남친이 계속해서 '이해'를 요구할 땐, '내가 그런다면 오빠는 어떨지'를 묻고 답을 듣길 바란다. 물론 남친은 '나라면 아무렇지 않을 것 같은데?'라고 말할 가능성이 높은데, 그럴 땐 평소 그가 보인 행동과 그 답의 차이점을 J양 스스로 비교해 봤으면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썸을 탈 때 J양이 상대의 권위주의적, 가부장적, 자기 과시적 모습을 보고 선을 한 번 그은 적 있었던 것처럼, 연애 중에도 그런 모습이 계속 보이면 헤어질 마음을 먹을 수 있어야 한다는 걸 잊지 말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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