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하를 해드리고 싶은데 염려가 되기도 해서, 매뉴얼을 어떤 방향으로 써야할지 모르겠다. 염려가 되는 부분만을 말하면 찬물을 끼얹는 일이 될 것 같고, 행복한 연애 즐겁게 하시라고 적어두면 두어 달 후에 원망이 섞인 메일을 받게 될 것 같다.
내가 염려하는 부분이 더 많다는 것은, K양이 연애 중 사연을 보냈음에도 그 사연을 '커플생활매뉴얼'이 아닌 '솔로부대탈출매뉴얼'로 분류했다는 것으로 표현하기로 하자. K양은 내게
"나이만 먹고 정신연령은 어린 제게 조언 부탁드립니다."
라고 하셨는데, 그 요구대로 '연애에 임하는 태도와 연애 중 잡아야 할 중심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한다. K양이 바라는 '상대에 대한 확인'은, 내가 해줄 수도 없을 뿐더러, 사귄 지 일주일도 안 된 상황에서 우리끼리 확정 짓는다 해도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니 상대와 만나보며 K양이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리는 거라 생각해 주셨으면 한다. 출발해 보자.
1. 상대의 칭찬과 다짐, 약속은 걸러 들어야 한다.
K양과 상대가 현재 연인이 되긴 했지만, 두 사람이 서로 알게 된 3일 전이며, 만난 시간을 따져보면 10시간도 채 안 된다. 게다가 저 3일 중 2일은, 단 둘이 만난 게 아니라 사람들과 어울리는 자리에서 모임의 구성원으로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뿐이다.
꼭 만난 시간이나 알아온 기간이 호감표현의 진실성에 비례한다고는 말할 순 없는 것이겠지만, 아직 서로의 손바닥도 제대로 들여다 본 적 없는 상황에서 열정적인 구애를 하는 건, 현실의 K양에 대한 호감표현이라기보다는 그가 상상한 K양의 이미지에 대한 호감표현일 확률이 높다. 그가 오랜 시간 꾸준히 만나보고 싶다는 걸 표현한 건 그의 희망사항을 이야기 한 것으로, 사소한 것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은 건 그의 처세술로 볼 수 있는 것이고 말이다.
"제가 돌싱은 아니지만, 그는 제가 돌싱이었어도 상관없었을 거라는 얘기를 했어요."
"자긴 연애 하면서 한눈을 판 적 없다고, 그것만은 확실히 약속해줄 수 있다고 말했어요."
상대로부터 긍정적인 이야기나 칭찬을 들어 기쁠 순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걸 단순히
- 그게 그의 본래 모습이며 그는 앞으로도 계속 그런 모습을 보여줄 사람인 것.
- 그가 K양이란 사람을 완전히 파악해 그런 이야기를 한 것.
이라고 생각해버리면 곤란하다. 저런 이야기는 상대의 마음을 얻고 싶을 때 누구라도 꺼낼 수 있는 이야기이며, 꼭 상대가 K양이 아니더라도 저런 다짐이나 약속은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들이니 말이다.
저게 상대의 진심이라고 해도, 그건 상대가 '지금 이 순간의 내 마음이 그렇다'는 걸 표현한 것 정도로 여기는 게 맞다. 자전거 국토종주길 낙동강 구간은 몇 시간을 달려야 슈퍼가 하나 나올 정도로 열악한데, 그곳에서 생수 500ml를 5천원에 팔아도 난 사서 마셨을 것이다. 그땐 한 모금에 천 원을 달라고 해도 돈을 주고 마셨을 텐데, 그 구간을 지난 다음엔 물 같은 건 돈 주고 사서 마실 생각을 하지 않았다.
훗날 상대가 "마음이 바뀌었다,", "미안하게 됐다."라는 말 한 마디만 해도 완전히 뒤집힐 수 있는, 그런 칭찬과 약속 등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진 말길 권한다. 늘 얘기하지만, 상대는 그의 말 보다는 그가 그 말을 지키는지, 말과 행동이 다르지는 않은지 등으로 증명된다. K양은 내게
"저 말들이 진심일까요? 혹시 그가 바람둥이 기질이 있어서 저런 말을 하는 건 아닐까요?"
하는 이야기를 하시는데, 그것에 대해 누구에게 어떤 답을 듣든 다 소용 없는 거란 얘기를 해주고 싶다. 심지어 상대로부터 "그냥 하는 말 아니고, 내 진심을 표현하고자 한 말들이다."라는 확답을 듣는다 해도, 그가 마음을 바꾸거나 지키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는 거라는 걸 잊지 말자. K양이 그를 만나보며 판단해야 하는 거지, 누구에게 물어 확답을 들어야 하는 게 아니다.
2. 갑옷은 벗더라도, 칼은 쥐고 있어야 한다.
내가 가장 염려하는 부분은, 연애에 임하는 K양의 태도가
- 상대가 괜찮은 사람인 것 같으면, 전부 다 믿고 따라가 보려는 것.
이라는 점이다. K양은 자신이 밀당이나 여우짓에 소질이 없다며 상대가 괜찮은 것 같으면 올인하겠다는 식으로, 내게 상대가 괜찮은 사람 같은지를 묻고 있다.
특히 K양이 남친과의 관계에 대해
"저는 사귀는 건 좀 부담스럽긴 한데, 남자 분은 우리가 사귀는 사이랍니다."
라고 말한 것은, '뭐지? 이 사람들 지금 뭐 하는 거지?'하는 생각까지 들게 할 정도다.
밀당이나 여우짓 안 해도 좋으니, 정신줄만은 꽉 붙잡길 권하고 싶다. K양은 긴 솔로생활 동안 남자들에게 좀 단호하게 구는 버릇이 생겼다고 했는데, 그런 단호함은 좀 내려놔도 괜찮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상대의 리드대로 다 따라가면 곤란하다. 같이 가더라도 어디를 왜 가려는 건지는 알고 가야지,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면 훗날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미아가 될 수 있는 위험이 있는 것 아닌가.
지금까지 K양과 상대의 연애 진행을 보면
- 상대가 사귀자고 해서 사귐.
- 상대가 손잡자고 해서 손잡음.
- 상대가 연애는 타이밍이라고 설득해서 설득 당함.
이라는 수순을 밟고 있다. 뭐, 이러면 나중에 상대 탓을 할 순 있겠지만, 누굴 탓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어쨌든 책임은 고스란히 K양이 져야 한다. 상대의 연애에 K양이 얹혀 가는 게 아니니 K양도 자신의 의견을 밝힐 수 있는 건데, 그러진 않고 하자는 대로만 따라갔을 뿐이니 말이다.
연애라는 게, 완벽한 짝을 만나 이쪽은 뭔가를 하지 않아도 알아서 다 되는 게 아니다. 상대가 괜찮고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해도 상대 역시 사람이니 실수를 할 수 있고, 또 친해지고 편해지다 보면 함부로 대하게 되거나, 둘 중 한 사람이 희생하고 양보하는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게 될 수도 있다. 그럼 그땐 K양도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말해가며 조율해야 하는 건데, 정신줄 놓고 따라가기만 하던 중이라면 조율은 꿈도 꾸지 못한 채 상대가 휘두르는 대로 휘둘리기만 할 수 있다.
갑옷은 벗더라도 칼은 쥐고 있자. 사랑이란 상처를 허락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무장해제를 한 채 포로역할을 자처할 필요는 없다. '밀어내느냐, 무릎 꿇느냐'의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만 고르려 하지 말고, 친구를 사귈 때처럼 그렇게 만나보길 바란다.
끝으로 하나 더 이야기하고 싶은 건, 알 거 이미 오래 전에 다 알게 된 나이에 시작한 연애라고 해서 너무 많은 것들을 생략하진 말라는 것이다. K양과 상대는 알게 된 지 3일 만에, 연애 시작한 지 하루 만에 스킨십 진도를 꽤 많이 나갔으며, 세 번의 만남 중 두 번은 술자리였다. 관계가 그렇게 굳어져 버리면 찐득하지만 무기력하고, 시끌벅적한 분위기에서 서로가 누군지도 알아갈 틈 없이 그저 '연인'이란 간판만 달고 있는 사이가 될 수 있으니, 막 첫사랑을 시작했을 때의 마음으로 연애에 임해보길 권한다.
오늘 준비한 얘기는 여기까지다. 밀린 사연이 많아 한 편이라도 더 다루고 싶었는데, 어제 주꾸미 삼겹살을 먹곤 탈이 난 까닭에 더 쓰는 건 무리일 것 같다. 아무래도, 뭔가 시큼하던 치즈 퐁듀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비주얼로만 보자면 치즈 퐁듀에 주꾸미를 찍어 먹을 경우 환상적인 맛이 날 것 같은데, 막상 먹어보면 주꾸미 맛도 안 나고 시큼한 치즈 맛만 더해져 역 시너지 효과가 나는 것 같다. 삼겹살 안 익었는데 익은 줄 알고 먹어서 탈났나?
여하튼, 다들 배탈 나지 마시고 즐거운 월요일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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